[문희봉칼럼] 인생은 함께 산맥을 넘는 것

놀뫼신문
2019-08-12

文 熙 鳳 (시인·전 대전문인협회장)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있는 그대로만 이야기하면서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 해답을 멀리서 찾지 말자. 눈부신 추억을 먹고 사는 즐거운 인생이다. 사랑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서정시에서 ‘고향’과 더불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시의 소재다.

‘너무 어렵게 셈하며 살지 말고, 하나를 주었을 때 몇 개가 돌아올까? 두 개를 주었을 때 몇 개를 손해 볼까?’ 하는 생각 없이 계산하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 삶은 항상 낯설 수밖에 없는 미래이지 않은가? 어떤 이는 등불 같은 삶을 살고, 어떤 이는 그림자만 밟고 살아간다. 그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이웃과 등 돌리고 살지 말자. 등 돌린 만큼 외로운 게 사람이니 등 돌릴 힘이 있으면 그 힘까지 내어 이웃에게 다가가는 것이 훨씬 좋다. 멋지게 사는 삶이다. 사랑하는 것이 좋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은 사소한 것도 줄줄 알고, 내가 가진 소중한 것도 아낌없이 나눌 줄 아는 마음이다. 꿀을 따는 벌들의 윙윙 소리가 어떤 관현악단의 연주 소리 같게 장엄하게 들렸다면 그 삶은 존경받을 삶이다. 돌아가는 변두리의 밤 거창한 친구들을 기대하지 말자. 길가의 코스모스, 산길의 망초꽃도 내 인생과 함께할 내 소중한 친구들이다.

좋은 것은 좋다고 하고, 내게 충분한 것은 나눠 줄 줄 알고, 애써 등 돌리려고 하지 않고, 그렇게 함께 웃으며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베풂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를 거닐 때 하나님께서 만나(떡)와 메추라기(고기)를 내리셨다.’고 한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거창한 것을 주는 것은 아니다.

더울 때 시원함을 주고, 추울 때 따뜻함을 주는 사람이 진정한 베풂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하찮은 돌멩이일지라도 그것을 남에게 던지면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지만, 자신의 가슴에 품고 다니면 인격이 된다. 성인은 화날 때도 웃는다. 미친 것이 아니다. 고차원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둔덕에서 삶을 꾸리고 있는 갈대는 빛바랜 세월을 이고도 시류 따라 살지 않아 등이 굽지 않은 채 올곧게 서 있다.

안 그래도 어렵고 힘든 세상인데 계산하고 따지면 머리만 아프다. 그저 맘 가는 대로 따라가고 싶다. 마음을 거슬리면 갈등이 생겨 머리 아프고, 가슴까지 아프니 때로는 손해가 되더라도, 마음 가는 대로 주고, 주고 싶은 대로 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받는 것에 연연하는 삶을 나를 지치게 한다. 인생은 스산한 가는 바람으로도 손끝이 멍들고, 갑자기 산속에서 푸드득 날아가는 꿩 한 마리와 같은 보잘것없는 존재다. 

인생은 만나는 기쁨, 가슴 아픈 이별, 주는 기쁨, 받는 즐거움, 살아가는 과정이 풀리다 막히는 연습문제 같은 것이다. 기다리는 이 없어도 머물다 가고, 반기는 이 없어도 한 번쯤 쉬었다 가는 것이다. 살다 보면 운이 좋아 꽃구름도 만나기도 하고, 운이 나빠 먹구름이나 비구름도 만나며, 맑은 날의 새털구름이나 뭉게구름도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자.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사람, 중턱에까지 오른 사람, 거의 정상에 오른 사람, 정상에 올랐다고 끝이 아니다. 산은 산으로 이어지고, 인생의 삶은 또 다른 삶으로 다시 이어진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지 정상에 오르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지 않은가. 흐린 날과 갠 날, 비 오는 날을 두루 겪으며 사는 게 인생 아니던가. 코카콜라 회장이 남긴 말이다. ‘인생은 목표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좌우 살피면서 여행처럼 좌우 조망 살피며 서서히 가는 것이다.’ 대문을 닫아 건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쉽게 쉽게 생각하며 함께 인생의 산맥을 넘고 싶다. 이제 남아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산들로 이어지는 능선들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인생이 아니던가. 삶은 천칭 같은 것이다. 자애로웠던 세월의 빛바랜 희생이 바로 휘감겼던 치마끈의 은혜로운 사랑으로 표현될 수 있다면 좋겠다. 망망한 인생, 한 생의 바다 위에 젊음이 누워 머리가 희어지도록 훠이훠이 흘러온 긴 생의 연민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