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3미(三味)] 옛 신도안 ‘냉면’과 ‘엿’의 연원

놀뫼신문
2019-07-24

계룡3미(三味)

옛 신도안 ‘냉면’과 ‘엿’의 연원


신도도읍추측도



계룡3미로 팥, 엿까지는 잘 알려졌지만 냉면은 잘 모르는 편이다. 신도안의 맛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1920년대 무렵 신도안의 사회적 환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도안은 정도령의 전설과 종교적 인연으로 전국적으로 관심 지역이 되었다. 그 중에 동학의 뿌리(천교도)에서 갈라져 나온 상제교 본당이 있어서 그 영향으로 3·1독립 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구가 갑자기 증가하게 되었는데, 1929년에는 독립정신이 투철한 선인이 사립학교까지 설립하게 되었다. 1929년 동학계의 사립 신도학교(설립자 임기창)와 불교계의 신성학교(설립자 김정묵)가 설립하게 되었다.

1939년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일으키던 해 두 사립학교를 폐교시키고 중봉산 앞 신도학교의 자리에 두마석계공립심상소학교란 공립학교를 개교시켰다. 1939년 5월 20일이 개교기념일인 이 학교가 현재 엄사리에 복교한 신도초등학교 전신이다. 필자는 1958년에서 1969년까지 신도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황해도 할머니의 신도안 냉면


일제강압시대의 후기로 접어들면서 종교와 풍수지리설로 인하여 신도안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 중에는 당장 생계가 걱정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황해도에서 이주해 온 한 할머니(전 유윤형 초등학교장 모친)께서는 당장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냉면가게를 차렸다. 대궐터(부남2리) 장터에서 좌편 북쪽 골목으로 100여m 들어간 지점에서 처음으로 메밀을 주재료로 한 냉면을 시작하여서 이어 오셨다. 

 1950년 6·25전쟁이 돌발하자 1·4후퇴 때 이북에서 백연웅(신도학교 후배) 가족이 피난을 내려왔다. 그 형 되는 사람이 이 냉면집을 인수받아 영업을 이어 신도안 냉면은 620사업 때까지 이어왔다.

 신도안은 산촌지역이라 토지가 비옥하지 못하고 중앙 지대는 비스듬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 밭이 많았다. 땅이 토박해도 씨만 뿌리면 잘 자라는 메밀을 많이 심어 재료 구입이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이어온 메밀을 원료로 한 냉면은 대전에까지 알려져, 일부러 찾아온 사람이 많아지면서 신도안냉면이 유명해진 것이다. 


경기도로 퍼져나간 신도안 엿


엿은 가정에서 조금씩 명절 때 집집마다 조금씩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 엿이 생계의 수단으로 제조하기 시작한 시초는 1945년 8·15때 38선이 가로 막히기 직전 맨몸으로 황해도에서 내려오신 할머니(필자의 동기생 홍춘영 어머니)이다. 부남리1구 느릿골이란 곳에 정착하였으나 생계가 막막하여 수공업으로 밤새도록 자리를 지키며 제조하여 대전 지역으로 나가 팔아서 생활하였다. 이후 부남2구(대궐터) 장터 근방에 사시던 김석재이라는 분이 이를 배워 시설을 확장하여 제조를 크게 시작하였다. 이 무렵 대궐터에서는 많은 집에서 생계를 위한 엿을 제조하여 외지로 나가 팔아가며 살아갔다

 신도안 엿이 번성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재료 구입이 쉬워서였다. 처음에는 쌀로 조금씩 제조하였다. 6·25 전쟁 이후 유엔식량기구에서 옥수수 가루가 많이 지원되자, 외지로 나가 꿈을 실현한 사람이 있다. 인구가 많던 신도안 엿 제조업자 중 가장 성공한 사람은 필자의 동기동창인 정영묵 씨이다. 

 큰형과 함께 신도안 장터 근방에 살면서 노역을 같이 하며 엿 제조 기술을 배운 정연묵 씨는 1960년대 중반에 서울로 올라갔다. 서대문 연희동 개천가 무허가 집에서 엿 공장을 시작하여 기계식으로 바꾸어 대량 생산하며 신도안 엿을 이어갔다. 영업이 번창하여 경기도 서북쪽 지역에 ‘신도안 엿’이 널리 선전되고 알려지자 개발되지 않은 고양시 능곡 부근의 싼 토지를 구입하여 공장을 크게 확장하여 엿제조 사업에 성공했다. 

 현재 두계리에 있는 신도안 엿 공장의 이수영 씨도 어릴 때부터 부남1리 느릿골에서 신도안 엿 제조 기술을 배워 맥을 이어온 분이다.


김영덕(대림e편한세상경로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