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겸칼럼] 어제의 나를!

놀뫼신문
2019-09-25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이 가끔은 무의미한 일상을 산다고 느낄 때, 아니면 머리에 남는 것 전혀 없이 세월만 무상하게 가듯 허무하다고 느낄 때, 과거의 나를 잠시 보러 가는 것도 인생에 큰 도움이 된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가끔은 절망에 빠져 고민과 갈등으로 일관했던 과거의 나를 다시 찾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과거에 내가 적어놨던 글들을 찾아보면 된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가끔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도 한다. 과거의 내가 또 있다. 그래서 과거의 나를 찾아가 도움을 받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과거에 써왔던 허접한 글들, 즉 내 인생을 단지 비관하거나 처지를 하소연했던 낙서 뭉치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과정들이 과거의 나를 만드는 작업이었음을 알게 했다. 

가끔씩 어눌하게 글을 쓰는 현재의 나에게도 새로운 아이템을 건네주기도 하고 그 당시의 느낌을 공감하게 해서 넓은 스펙트럼을 공유하게 한 것도 그렇고 사전에 동의나 허락도 없이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는 또 다른 과거의 나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동양철학에서 음과 양으로 나누듯 빛은 단순히 양에 속한다. 그런데 그 양을 깊숙이 파고들면 일곱 색깔 무지개도 됐다가 세부적으로 더 들어가 보면 다양한 색깔의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우리 인간들도 자신의 정신적 영역들이 있다. 

누구는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며 살기도 해서 좁은 영역의 스펙트럼을 갖고 살지만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세부적으로 들어가 많은 생각을 공유하고 넓은 영역의 스펙트럼을 점유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다양한 영역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만큼 학식이 뛰어나거나 다방면에 뛰어난 인재임에는 분명하다. 

그런 인간의 정신적 영역에서 나는 분명히 평범한 영역에 속한다. 남보다 특출 난 것이 없다. 그런데 나는 혼자가 아니라 과거에 내가 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의 두 배의 영역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평범한 누군가는 과거를 잊으며 살기도 하고 글로써 전혀 남기지 않았다면 과거의 기억을 더듬을 수가 없다. 즉 과거의 나가 없고 현재의 나만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고맙게도 과거에 나는 내 삶의 느낌을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적어놨던 것들이 글로써 존재 하다 보니 그것들이 지금의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그래서 과거를 수록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보다 분명 내가 가지고 있는 스펙트럼은 두 배가 될 것이다. 또한 현재의 나도 장차 미래의 나에게 도움을 주는 또 다른 나가 된다는 사실을 느끼게도 해준다. 

미래의 나는 기억력에서 분명 더 뒤쳐질 것이다. 대화를 하다가도 어떤 사물이 떠오르지 않아 순간 난처할 때도 있을 것이고 간혹 언어구사가 잘 되지 않아 힘들 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해서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억울함이 없을 것 같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마음속에는 늘 후회만 남게 되니 삶의 애착을 더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원래부터 난 표현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이것을 살아생전에 고쳐보지도 못하고 결국 생물학적인 퇴보를 맞이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병적인 망각을 통해서 노인성 치매로 가더라도 내가 노력해야 할 일은 과거와 현재를 잊지 않기 위해 지속적으로 사는 느낌을 글로써 남겨야 한다. 

이래저래 몸과 마음이 어눌하다. 분명 나이가 들어서다. 자연적인 현상이라지만 벌써 라는 의문부호가 가슴에 새겨지고 꽃 같은 인생이 그렇게 저무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살면 살수록 머리에 담는 것은 갈수록 더 어려워질 테고 쉽게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손으로 담아야 한다. 현재 내가 느끼고 생각했던 의미 있는 것들을 글로서 남기려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야 미래의 나에게 후회도 없고 삶의 스펙트럼을 좀 더 넓히려는 노력이 가상하여 힘없는 노인으로서 경시당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과연 남은 내 생애에 어떤 목적과 어떤 사고를 갖고 살아야 할까?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것처럼 배금주의 사상에 물들어 현재의 룰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으로 살다가 돈독에 물든 두 눈을 질끈 감는 것이 마지막 임종을 하는 모습이라면 정말 슬픈 일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스펙트럼을 생각하고 있다. 우선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부터 가능한 한 많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내 주위에 온전히 있는 모든 것들을 보존하고 응원하고 사랑하는 것이 나의 마지막 목적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미래의 내가 봤을 때 그래 과거의 너는 참 잘 살았어! 이제는 정말 여한이 없어! 하며 흡족해 하다가 결국 노인성치매로 인하여 머릿속을 강제로 사라지게 하더라도 마지막에는 결국 사랑하는 마음만 남을 것 같아서 그렇다. 그래야지 미소 지으며 저세상으로 홀연히 떠나는 해탈한 고승처럼 그렇게 세상을 하직할 것 같아서다. 

정말 꿈만 같은 일이다. 지금의 우리 자신을 사랑하도록 하자. 우리가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열심히 사랑하도록 하자!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이 순간에도 결국 사랑을 강조하고 요구되는 것을 보면 사랑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사랑은 힘없고 볼품없고 정신력이 감퇴되는 노년의 어느 순간에 홀연히 나타나 잠시 있다 사라지는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사람은 사랑만을 남기고 가야한다. 나를 아낌없이 사랑해주었던 내 부모님들처럼 나에게도 사랑만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고 싶다. 바람과 함께!  




송인겸 사회복지법인 두드림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