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새로읽기] ‘님’만들기

놀뫼신문
2020-09-09


처서(處暑)를 지나 백로(白露)에 다다르니 여름의 끝자락이다. 서늘한 공기가 반소매 입은 살갗을 스친다. 이때쯤 산골의 공기는 청정하기 마련이다. 문득 계절을 느낄 수 있는 오감과 육감이 살아있음에 절로 감사하다. 

코로나19 팬데믹, 판검사, 의사, 목사님, 선량 들이 나라를 온통 분탕질해도 아직 산골의 공기는 청량하고, 서산 너머 해가 진 자리 달빛이 산뜻하다. 

자타가 인정하는 잘난 분들의 목소리가 이골 저골을 휘젓고 다녀도 계절이 주는 감동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하찮다. 내 삶도 어느 누구에게 감동 한 자락 준 적 없고, 누구 위해 따스한 연탄이 되어 준 적 없어 부끄럽기만 하다.


이태석, 이재훈·박재연, 고태진.....


오랜 만에 메마른 마음 밭을 적셔준 이야기가 있다. ‘울지 마 톤즈!’라는 영화다. 주인공 ‘이태석’ 신부님이 대장암으로 선종(善生福終)하신 지 10여 년이 흘렀다. 가난한 가정에서 어머니의 헌신으로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가톨릭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가난과 전쟁으로 아무런 희망조차 없었던 남수단의 ‘톤즈’ 마을로 봉사의 길을 떠난다. 건축가가 되어 학교와 병원을 세우기도 하고 사제이자 의사, 교육자, 음악가로 의료봉사 활동과 교육활동을 하시다가 대장암으로 세상과 이별한다. 

우리가 뜨겁게 감동하게 되는 이유는 “환자의 건강을 가장 우선적으로 배려하고, 신분을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진실함과 자신을 바쳐 사랑을 전하는 모습이었다. 톤즈의 ‘이태석’ 신부님의 제자들 몇 명은 또 다른 이태석이 되어 의료 및 봉사활동으로 사랑릴레이를 이어가고 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는 의료인의 윤리헌장이다’,  ‘오직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선서 하나로도 이미 그들은 우리사회에 공기(空氣)와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인간극장’에 방영된 ‘길 위의 닥터’ 이야기도 감동적이다. 의사라는 직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이재훈·박재연 부부의 헌신적인 봉사활동은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준다. 마다가스카르 원주민들은, 의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몰랐었다. 해열제 몇 알로 열이 내려가니 갑자기 영험한 무당으로 취급당한다. 급기야 토착 무당들로부터 살해 위협까지 당하게 된다.

이태석 신부나 의사 이재훈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거인들이다. 부와 명예, 안락함을 모두 버리고 힘들고 목숨조차 위험한 곳으로 스스로 걸어가 고통을 이겨가며 사랑을 실천한다. 

정승의 씨앗이 따로 있는가? 그들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피가 마르는 고통을 감내하고 「사람사랑」의 뜻을 세워 패배하지 않았다. 우리와 다른 이유다. 뜻을 세워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수행(修行)하는 도인(道人)이다. 언뜻 도통(道通)한 도인(道人)의 모습이 스쳐간다.

또 한 사람, 우리시대의 영웅을 보았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신념에 찬 신앙의 독립군이다. “예배드리면 죽인다고 칼이 들어올 때 목숨을 걸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배 모임이 칼이 되어 이웃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 모이지 않는 것이 신앙이 됩니다.” 안서교회 담임 고태진 목사의 고백이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는 길을 가지 않고, 스스로를 옥죄이는 갈등의 족쇄를 단연코 끊어버렸을지 모른다. 우리들에게 결코 작지 않은 울림을 준다.


공감능력과 감동

  

감동은 공감능력과 일맥상통한다. 공감능력이란 타인의 사고나 감정을 자기의 내부로 옮겨 넣어, 타인의 체험과 동질의 심리적 과정을 만드는 일, ‘감정을 이입한다(feeling into)’는 뜻이다(정신분석학 용어사전).

인정받고 인정해 주는 것이 사람관계의 출발점이다. 상대편의 말을 들어주고 고개를 끄떡여 주면서 시작된다. 반면, 자기생각만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종착점에 다다른다. 이쯤 되면 ‘님’이 아닌 ‘남’의 관계로 돌아서기 쉽다.

통계에 의하면 부부싸움의 원인 1위가 ‘말싸움에 대한 말싸움’이다. 학자들은 “공감능력을 활용하여 이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렇구나!, 그랬구나!”로 시작하는 공감적 대화(I massage), 말을 잘 듣고 있다는 표시로 고개 끄떡여 주는 공감적 행동, 그리고 “나는 늘 네 편이야” 라고 소근거리는 것이다.

공감능력이 결핍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때문에 쉽게 피해를 끼치거나 스스럼없이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이를 ‘반사회성 인격 장애’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만이 중요하기에 별 다른 거리낌 없이 사회적 통념을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능력은 없고 이기적 개인이나 집단만 있을 뿐이다. 

공감능력이 없는 마음 밭은 작은 감동조차 담을 수 없다. 거북등처럼 갈라진 틈새로 삶의 아름다움은 빠져나가 버린다. 메마르고 삭막하다. 삶은 지쳐 있고 온기 없는 거리에는 휭한 바람만 가득하다. “누구에게 한번 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는 안도현의 시가 생각난다. 


“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처지가 되어 보는 것입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배고픈 아이들의 눈으로, 해고된 철강노동자의 눈으로, 당신 기숙사 방을 청소하는 이민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오바마연설, 2006년 노스웨스턴대학교)


최병현 미래인재역량개발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