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 계룡시 개청의 주역 ‘심대평 전 충남도지사’

놀뫼신문
2019-09-18

[특별인터뷰] 계룡시 개청의 주역 ‘심대평 전 충남도지사’

One of them이 아닌 Only one을 지향하며, 

바로 보고, 더불어 보고, 멀리 보는 지혜를 찾아야


계룡시를 태동시킨 군사특별시 계룡시의 산모(産母), 1988년부터 충남도지사를 4번 연임한 도백(道伯), 심대평 전 충남도지사이다. 충청도를 한국 정치사의 핵심으로 부각시키는 창당도 서슴지 않았던 심대평 전 지사를 지난 8월 26일(월) 대전 코레일 2층 소회의실에서 만났다. 계룡시 개청 16주년을 맞아 거대 담론 보다 소소한 일상과 남다른 애정을 쏟았던 계룡시에 대한 이야기들을 심도있게 나눠보았다.



∎ 아직도 지사님이 입에 익어서, '지사님'으로 호칭하겠습니다. 요즘 지사님 근황부터 들려주시지요. 건강관리와 가족이야기 포함해서요.


재작년 2017년도에 모든 공직에서 은퇴했습니다. 최종 직책이었던 대통령 소속의 2기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그것을 끝으로 50년 공직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공직생활 중 동료들의 헌신과 협조, 나에게 부족한 역량의 뒷받침으로 대과 없이 일해 왔고, 과분한 사랑도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청송심씨대종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오는 10월 5일 청송에서 전국 한마음대회를 개최해요. 이번 한마음대회에는 3천명 이상의 인원이 함께 모이는 자립니다. 오늘도 당일 행사를 준비하는 여성 회원들과 모여서 행사 준비를 논의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특별나게 운동하는 건 없어요. 주로 산보하며 걷고, 기구 운동을 합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는 동네 스포츠 센터에 나가서 운동을 하지요. 골프를 치긴 하는데 더울 때 추울 때 빼고 나면 많이 치는 게 아니더군요. 10개월 정도에 평균 10회 정도 나갑니다. 그때마다 평균 90개 정도 치는 거 같은데, 옛날보다 거리가 많이 줄었습니다.

가족은 집사람과 아들만 셋 단촐 합니다. 얼마 전 우리 큰아들이 고검 차장검사로 승진해 검사장이 되어 고마운 일이고, 둘째는 서울에서 행정연구원 대외협력실장을 맡고 있죠. 막내는 육사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패스하여 군법무관을 하다가 예편 뒤 변호사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손자 손녀는 다섯 명인데, 두명은 대학에 다니고 둘은 고삼입니다. 손녀 입시 준비로 엄마들도 함께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 같습니다.


∎ 충남도의 가장 큰 현안 중 하나가 지역 불균형입니다. 대전, 세종 등의 대도시 성장으로 충남 북부권은 꾸준히 발전되는 반면, 남부권은 인구마저 감소 추세입니다. 특별한 해결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지사님의 의견은?


지역 간의 균형 발전은 이상적이기도 하지만,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균형 발전이란 서로 크고 작은 것 없이 똑같이 균일하게 발전하는 게 아닙니다. 균형 발전하면 균일화부터 생각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각자의 특색을 살려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1988년도에 도지사가 되면서 대전시가 포함된 충남을 북부권, 남부권, 서부권, 중부권으로 나누었습니다. 북부권은 천안, 아산, 당진 등을 중심으로 하여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현대제철 등의 산업 수요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중부권인 공주, 부여, 홍성 지역은 주로 역사·문화 중심으로 백제문화권 개발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서부권인 태안, 보령, 서천은 서해안 관광 및 어업 산업이 발전하는 지역으로 구분하였습니다. 남부권인 논산, 금산 등은 농업이 중심된 지역으로 발전시키는 4대 권역 개발사업을 세웠습니다. 현재 충남발전 계획의 큰 틀이 여기서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재작년까지 지방자치발전위원장을 하면서 '기회는 균등해져야 되고, 균등해진 기회 속에서 지역에 특성을 살려 균형 발전이 이뤄져야 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공업이 주된 지역은 문화가 약하듯, 어느 지역이든 산업화와 전원·문화생활이 서로 보완 작용을 하면서 발전하는 게 균형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균등과 균형이 다르듯, 획일(劃一)과 다양성(多樣性) 또한 다른 것입니다. 나는 균형과 다양성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라고 봅니다. 정부가 국민 복지를 위해 개개인에게 예산을 많이 쓰고 있지만, 균형 발전을 위해서도 특정 부문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지역의 특성을 살려나가는 데 있어서 재정적으로 부족한 부분들을 정부가 직접 나서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해주어야 합니다.


2003년 6월 30일 계룡시 승격 축하행사


2003년 9월 19일 계룡시청 개청식


∎ 계룡시가 개청한 지 올해로 16년을 맞았습니다. 개청 당시 도지사가 그렸던 계룡의 미래가 현재와 어느 정도 부합되는지, 감회가 남다를 거 같습니다.


계룡시가 탄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3군본부'의 이전입니다. 1989년 1월 1일, 충청남도에서 대전시를 분리하면서 충남 도민들에게 약속을 한 가지 했습니다. “빠르면 3년에서 5년 안에, 대전시 분리로 인하여 충청남도 삶의 질이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이었죠.

1989년 논산군 두마면에 3군본부가 들어서면서, 처음에는 육군, 그 다음에 공군, 해군 순이었습니다. 장군들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많아진 상황입니다. 당시 3군본부가 행정적으로 누구와 상대해야 되냐면 두마면장을 만나야 되는데, 얘기가 안 되니까 전부다 나한테 몰려 왔어요. 

국도 1호선 포장의 경우를 보더라도, 원래 지방 예산을 가지고 국가 시설에 투자를 할 수 없습니다. 정부 예산을 가져올 수 없는 상황에서, 우선 계룡에 사는 군인가족들이 살 수는 있도록 해야 되잖아요. 

군에서 아스콘 포장을 하는 군 장비를 지원해 줄 테니 아스콘 매입비용만이라도 도에서 지불해 달라는 것입니다. 대략 10억의 비용이면 해결되는 사항이었습니다. 우리 시민들이 사는 곳이니까 내가 지원을 하겠다는 심정으로 시작을 했는데, 군 장비를 국도에 사용할 수 없다는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10억에서 두 배 늘어난 20억 정도의 예산을 들여 포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20억 원은 꽤 큰돈이었습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계룡대가 대한민국 안보의 사령부로 들어온 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환영합니다.

그렇게 충청남도 출장소를 두마면에 만들었습니다. 계룡시의 역사는 그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계룡시 탄생이 올해로 16년이 되는 게 아니라 30년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시 면단위의 출장소장 직급을 시장급으로 입명했어요. 청와대와 협의를 해서 그렇게 만들었죠. 


∎ 지사님도 애쓰셨지만, 함께 고생했던 분들 생각도 많이 나지 않으세요?


시 개청은 한 사람이 앞장선다고 해서 될 사안이 아닙니다. 청와대 협의 후로도 논산시민과 계룡시민이 계룡시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주었습니다. 2003년 도지사 시절, 국회에서 계룡출장소를 특별시로 만드는 협의 과정에서 “계룡시는 인구와 면적에 상관없이 국가의 안보를 위해 꼭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니까 “국가가 지원을 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고, 그래서 계룡시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논산시의회 의장이던 현 최홍묵 계룡시장의 지혜와 노력이 없었다면 계룡시는 아마 만들어 낼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임명직 때는 도지사가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당시 논산시가 합의를 안 해 주면 할 수가 없었던 상황입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계룡은 14년 만에 시로 승격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국회 소위원장이 “왜 JP가 총리할 때 하지, 지금 어렵게 한 분 한 분 설득하고 다니느냐?”며 저에게 핀잔을 주었던 기억이 새롭군요.

군사·문화·전원의 도시가 가능하고, 군인 가족들이 계룡시에 와서 생활과 자녀교육에 조금도 불편한 도시가 되지 않게끔 만드는 것이, 계룡시 탄생 당시 현안이었습니다. 용남고등학교가 군학교처럼 지원할 수 있는 분위기도 만들고, 충남도는 물론 교육청도 전 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선생님들을 배치하여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전력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용남고가 얼마나 우수한 학교로 발전했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도지사로 근무할 때만 해도 학업 실력이나 체육이나 모든 면에서 도내 명문고 중 하나였습니다. 

교육도 그렇지만 당시 계획했던 전원·문화 도시로서 전반적으로 상당한 진보를 이루었다 생각합니다. 특히 향적산을 중심으로 한 '향적산 치유의 숲'을 기획 추진 중인 것은 최홍목 시장의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계룡산 중심의 향적산을 전원·문화 도시의 아이콘인 치유의 숲으로 접목한 것은 계룡시민을 위한 삶의 질까지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문화는 물론 산업에서도 계룡시가 생각보다 빠른 시간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제2산업단지까지 확충해가는 가운데 이케아, 가스공사 기술교육원 같은 굵직굵직한 기관들이 들어와서 공해 없는 청정도시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계룡시다운 발상과 기획들이 새로운 일자리도 창출하고 무공해 자연친화도시로 나아가는 좌표가 되면 좋겠어요. 


∎ 반면 아쉬운 점도 눈에 띌텐데요. 


무엇보다 대전시 진잠면(현 유성구) 세동·송정동 일원을 계룡시로 편입시키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때는 “대전시에서 빠져 나가면 땅값이 떨어질텐데...”하는 주민들의 반대를 예상해서 계룡시에 포함시키지를 못했어요. 지금 돌아보니, 그때 그 지역을 계룡시에 편입했더라면 전원·문화도시 형성에 더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 대신, 계룡산이 계룡시에 포함된 건 심대평이한테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겁니다(웃음). 계룡시는 '계룡'이라는 이름을 품게 해 준 계룡산에게 늘 감사하면서 앞으로 계룡산 개발할 일이 생기더라도 자연을 최대한 살리며 부득이한 훼손은 최소로 해야 할 겁니다. 


∎ 계룡시는 2020계룡세계군문화엑스포 개최와 더불어 대규모 기관의 유치로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을 삼고 있습니다. 더 나은 계룡의 미래를 위하여서 갖춰야 할 부분이 있다면?


계룡시는 여타 지자체에 비해 모든 것이 작습니다. 이것을 장점으로 승화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생활의 질과 문화의 향유권이 높아지는 도시로 발전하려면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주민자치가 발전해야 합니다. 

주민자치가 행정의 한 파트가 아니라 자생적이고 독립적일수록 바람직하다고 봐요. 국가가 운영하는 주민자치회와는 다르게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서, 문화·전원생활도 즐기고 자녀 교육도 학부모가 바라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관계부서에 의견을 내는 실질적인 주민자치회가 운영되면 참 좋겠습니다.

이런 발전모델은 스위스를 롤모델로 참고하면 좋을 거 같아요. 스위스는 대도시에 둘러 쌓여있는 지리적 특성을 잘 살려나가면서 선진국으로 살아갑니다. 스위스는 험산준령들을 관광지로 탈바꿈시켰듯이, 계룡시도 계룡산만의 특색을 살린 관광지 개발에 중지를 모으면 좋겠어요. 계룡산 활용이든 국방산업 확충이든 계룡시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계획할 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남들 다하는 거 따라서 하지 말라는 것, 규모를 크게 만들려고만 하지 말고 규모가 작더라도 계룡시 밖에 없는 것, 이런 걸 찾아서 만들어 주세요. 그게 계룡시 도약의 비결이 될 겁니다. 

목표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최고와 일류를 지향해야 합니다. '또 하나가 (One of them)' 아닌 '유일하고 독특함 (Only one)'을 지향해야 합니다. 현실을 바로 보고, 더불어 함께 보고, 멀리 보는 지혜를 함께 찾아야 합니다.


∎ 최근 계룡시는 육군사관학교 이전위원회를 만들어 논산시와 경쟁하며 활동 중입니다. 지방정부들끼리는 경쟁과 동시에 유기적인 협조도 필요한데, 내년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충청권 정치세력의 결집의 필요성에 대하여 한 말씀 해주시죠.


지역발전은 정치, 특히 정당의 이념 같은 것에 휩쓸려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지역 이기주의에 편승해서도 안 됩니다. 지역 이기주의는 고향 사랑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배타성으로 변질할 수 있거든요. 상생을 염두에 두면서 지역 발전으로 갈 수 있는 포용적 이기주의가 바람직하다고 봐요.

‘영남’ ‘호남’ ‘충청’ 이렇게 지역별로 각자 가면 충청이 제일 힘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타 지역에서 얘기하듯 충청도민의 성향은 배타적이며 개인 이기주의에 흐르는 성향이 아닙니다. 밖으로 보면 결속력이 약한 거 같지만, 내심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가장 앞장 서 나선 주체는, 충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충청의 양반들이었습니다. 이웃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아는 선비의 고장이 바로 충청이었습니다. 

지역 색을 중심으로 해서 배타적 이기주의를 하는 정치 성향은 이제 없어져야 합니다. 저는 “지난 역사에서처럼 오늘도 충청이 나서서, 앞장서서 이 나라를 바꾸자”고 말해왔습니다. 이건 지금도 변함이 없는 생각이며, 충청이 좀 더 적극적인 자세와 자긍심을 가지고 발전을 주도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충청의 힘으로 나라를 바꾸자면 개인 간에는 물론 지역사회끼리도 응집력을 키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1990년2월27일 충청남도계룡출장소 개소식 장면

2003년 9월 19일 개청식에 참석한 심대평지사와 각계인사들이 다과회에서 개청을 축하하는  건배를 하고 있다. 


∎ 지사님은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자치분권 실현을 위한 노력을 해왔습니다. 계룡시처럼 인구, 재정 증강에 제약이 많은 소도시가 지방분권의 강점을 최대한 살리려면?


계룡시 인구가 5만이 채 되지 않습니다. 인구가 적으면 적을수록 잘 뭉쳐야 됩니다. 또한 외부의 힘과 두뇌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하며, 모자란 부분이 있으면 외부에서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계룡시의 가장 큰 강점은 '3군본부'입니다. 계룡시는 이 '3군본부'를 확실한 계룡시의 후원 세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계룡시 엄사면 주민과 신도안 주민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죠. 지금은 많이 없어진 거 같지만, 원주민이니 잠시 거쳐 가는 군인가족이니 하는 이분법적 생각이 없어져야 합니다. 지금은 군인가족들이 과거와는 달리 시정에도 적극 참여하더라고요. 

계룡시가 관·군·민이 결속력을 강화하여 주민자치를 잘 이루어 나가면 규모는 작지만 타 지자체의 모범이 되는 강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위스에는 인구가 9명인 시도 있습니다. 시장과 시민이 하나가 된 자치시의 모범을 보인다며, 그게 가장 큰 강점이 될 것 같습니다.


2003년 11월 1일 계룡시 최홍묵 초대시장 취임식에서 건배를 하고 있다. (심대평지사, 최홍묵시장, 김학원국회의원)


∎ 지사님이 충청도정을 4번이나 이끌었던 것처럼 최홍묵 시장 역시 4번째 계룡시정을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선배 정치인으로서 최시장의 시정 운영을 평가하신다면?


내가 최홍묵 시장의 시정운영에 대하여 평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돼요. 다만 최 시장과 함께 각각 도지사와 시장으로 출마했을 때, 내가 최 시장의 유세를 지원해 주었던 일이 생각나네요. 당시 나는 “최시장의 경험이 나만은 못할지 몰라도, 내가 도정을 수행하면서 최 시장의 부족한 행정력은 내가 지원할 수 있으나, 계룡시에 대한 열정과 인성은 나보다 열 배는 높은 사람”이라고 응원했습니다. 

계룡시 만들 때 같이 일을 해 보면서, ‘변하는 사람이 아니다, 계룡시에 대한 열정과 뚝심이 있고, 내공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나와는 가장 가까운 동료입니다.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의 리더입니다. 이제는 행정에 있어서도 나보다 더 뛰어날 것입니다. 최홍묵 시장은 이러한 장점들을 잘 활용할 것입니다. 시행정의 한 축이기도 한 시민들과 함께 하는 주민자치를 적극 활용하여 시민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지혜를 모아 훌륭하고 멋진 정치를 펼쳐나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 계룡시 승격 당시 충남도지사로서 시 탄생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행정구역을 별도 분리 할 만큼 중대차했던 이유와 명분 설득 논리 등은 무엇인가?


계룡시의 승격을 국회에서 논의할 당시, 가장 중요한 설득 논리는 계룡시의 규모가 아니라 계룡시의 특색이었습니다. '계룡시는 3군본부가 있는 안보의 핵심 도시로서 3군본부가 위치한 계룡시에 가족을 맡기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계룡시 승격의 설득의 논리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국회의원들도 반대 의견을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3군본부가 있는 군사·전원·문화도시를 조성하면서 면단위 행정으로는 불가능하며, 도 직할출장소 설치 때부터 시 규모로 출발하였다는 점을 명분으로 세웠습니다.


∎. 계룡시 승격 찬반에서 통과까지, 특별한 소회나 에피소드가 많았을 거 같은데, 이야기를 해 주신다면?


기억에 남는 게 좀 있죠. 내가 계룡출장소를 만들 때 직급을 시장 직급으로 만든다고 했더니, “도 출장소는 지방서기관이면 충분한데 그게 말이 되느냐?”면서 청와대 비서실에서 핀잔을 주더군요. 그러면서 청와대에서 “심대평 도지사는 가끔 엉뚱한 짓을 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국회 법안심의 소위원회 이병석 위원장도 “이 사람 당신은 말이지 JP가 총리할 때는 아무 말 안 하다가, 이제 와서 힘없는 나한테 해 달라고 하냐”고 무척 구시렁거렸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말은 그렇게 해도 무척 도움을 많이 줬습니다.

계룡시 승격 시킬 때 찬반이 많았지만 그래도 비교적 순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법을 만들면서 행자부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을 통과 시키려니, 얼마나 하기 어려운 것인지 직접 부딪히면서 알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2003년에 법이 통과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도에 왔을 때 특례시 설치를 약속하였고, 노무현 대통령 때 비로소 통과가 되었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1989년 관선 도지사 시절 두마면 사무소에서 기념식수로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을 심으면서 했던 덕담입니다. “지금은 면사무소에서 기념식수를 하지만 나중에 계룡시가 되어서 천년을 발전하고 천년 도읍지의 역할이 될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감회가 새롭군요.


인터뷰를 마치고 최홍묵 시장과 함께


8월 26일 대전 코레일 회의실 인터뷰장에서 


∎ 마지막으로 계룡시 공직자와 시민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내가 공직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은 애정을 쏟았던 곳이 바로 계룡시입니다. 내가 초등학교는 논산 부창을 나왔지만, 계룡이 제2의 고향으로 여겨져서 계룡에 거주하기도 했어요. 대전 서구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하면서 떠나게 되었는데 지금도 계룡시에만 가면 푸근합니다. 최 시장이 워낙 의리 있게 잘 대해 주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것이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떤 것을 내 것 이라는 생각하면 행동과 생각이 달라집니다. '이 계룡시가 내 것' 이라는 생각을 공직자와 시민들이 가져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시민의 주인의식입니다. 

'이 시에 오면 담배꽁초 하나라도 없어!, 이 시에 오면 교통위반이 하나도 없어, 이 시에 오면 시민들 간의 시비도 없어 !' 시민들이 이런 꿈의 도시를 그리면서 계룡시를 만들어 가면, 정말 전국 제일의 명품도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교육의 특색을 살리는 계룡시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유치원 교육부터 자연친화적으로 특색 있게 발전시켜 개성 뚜렷한 초등교육이 강화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군인가족은 물론 인근 도시 젊은 부부들이 너나할 거 없이 계룡시로 이사 오고 싶어할 겁니다.

주민들이 중심이 되는, 주민자치 중심의 시정(市政)을 펼치도록 민관군이 서로에게 서로를 열어놓으면 좋겠습니다. 타 시군처럼 시장이나 교육감 위주로 상의하달만 하는 계룡시가 아니라, 시민과 학부형들이 주도적으로 졔안하고 만들어가는 알찬 계룡시를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대담 전영주 발행인

정리 권채윤 시민기자

사진제공 계룡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