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집] 갈림길에 서서

2025-02-10


눈이 내린다. 아무 소리도 없이 하얀 눈이 내려 쌓인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검게 죽었던 들판과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눈으로 덮여 새로운 세상으로 변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조물주의 위력.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이렇게 단번에 새로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파멸로 가는 길은 넓고 곧지만, 번영에의 길은 좁고 가파르다.


■ 변화는 어렵다

언젠가 내가 사는 마을의 한 선배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문득문득 생각한다. 이사를 하였는데 이삿짐을 다 나르고 마지막에 기르던 개를 끌고 새집으로 갈 참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개는 주인을 따라나서지 않았다. 목줄을 힘껏 끌어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 힘을 겨루다가 억지로 개를 끌고 나섰다. 개를 묶은 줄을 자전거에 매달고 출발했다. 그런데 개는 계속 뒤로 버티며 발을 떼지 않았다. 선배는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았다. 개는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에서 이사한 집까지 억지로 끌려왔다. 집에 도착하여 살펴보니 개의 발바닥에 피가 낭자했다. 발바닥의 살은 다 닳아 없어지고 하얗게 뼈가 드러났다. 장소의 이전이라는 변화를 거부한 대가였다.

많은 사람이 변화를 두려워한다. 마키야벨리는 『군주론』에서 기득권 세력은 변화로 인하여 자신의 이익이 축소되는 것을 싫어하여 변화에 저항하기 때문에 개혁을 추진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강가에 가만히 서서 ‘나는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나는 그 자리에 서 있고, 강물은 벌써 저만큼 흘러갔다. 강물의 속도를 따라 함께 움직여야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동물과 식물, 개인이나 조직도 생존 환경에 맞추어 변화하지 못하면 생태계에서 도태되고 만다. 생존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는 힘에 달려 있다.


■ 그래도 변화해야 한다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어리석음으로 평가받는다. 그렇다고 하여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한 행위들을 늘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일제가 단발령을 내렸을 때 면암 최익현 선생은 상투를 자르지 않았다. 지금으로 봐서는 머리를 자르는 것이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머리를 자르는 사람들이 오히려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목은 자르더라도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항거한 면암 최익현 선생은 오늘날까지도 훌륭한 기개를 가진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옛 자료에 의하면, 1971년 10월 1일 하루 동안 1,000명이 넘게 장발 단속에 걸려 길거리에서 머리를 깎였다. 퇴폐풍조라 하여 장발과 미니 스커트를 단속하던 시대였다. 새로운 풍조를 거부하는 정부가 나서서 시대의 흐름을 막고자 했다. 그런데 요즘 여학생들의 스커트는 누구랄 것 없이 모두 무릎 위에서 멈추어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부모가 이를 저지하지 않고, 학교에서도 단속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시비를 걸었다가는 학생 인권 침해라 하여 치도곤을 당하는 시대가 되었다. 학교에 따라서는 머리의 염색과 파마까지도 허용하고 있다. 


■ 몰락인가 진전인가

선악(善惡)을 판단하는 잣대는 시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한 시대의 정의가 다음 시대에는 불의가 되고 죄악이 된다. 구린데가 있는 정치인들이 선거에 출마하면서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아 보겠다고 하고, 범법행위를 하고서 뻔뻔하게 ‘역사의 심판’을 운운한다. 시간과 시각(視角)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는 궤변으로 가면을 만들어 쓴다.

오늘날도 혼란이 심하다. 갈라진 의견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판단하니 자신은 정당하고 상대는 불의라고 주장한다. 예전에 우리가 가졌던 기준은 실종되었다. 심지어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한다는 법관들마저도 의심하고, 그 판결을 공공연하게 부정한다. 권위의 추락과 수치에 대한 무감각이 일반화되어 있다. 비정상이 정상인 것 같고, 파격이 일상인 것 같다.

갈등, 혼란, 파행, 이것이 시대의 변화인가. 나는 이것들을 수용해야 하나, 거부해야 하나. 여기가 시작인가, 끝인가 모르겠다.



권선옥(시인, 논산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