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수의 스케치-7] 오스트리아 베토벤 동상

놀뫼신문
2020-12-16

[임의수의 스케치-7] 오스트리아 베토벤 동상

청력상실 고뇌 속에서 피어난 환희(歡喜)의 교향악


올해는 베토벤이 태어난 지 250주년이 되는 해이며 12월 17일이 바로 태어난 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코로나 19로 수많은 행사가 취소되거나 약식으로 진행되어 음악인들에게는 안타깝기 그지없겠지요.

세계 음악사에 영원히 남을 베토벤, 그를 기리는 동상이야 세계 곳곳에 세워졌을 것입니다. 이 동상은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 베토벤 광장에 있는 동상으로 베토벤 동상 중에 대표적인 기념 동상입니다. 베토벤 동상 오른쪽으로 1백여 미터 떨어진 비엔나 시민공원에는 폴카와 왈츠의 왕이라 부르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화려한 금빛 동상이 흰 대리석의 여인들 조각에 둘러싸여 있어 눈길을 끌며,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청년 슈베르트 조각상도 가까이에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의 소유자인 베토벤이 태어난 곳은 독일의 본이라지만, 그의 활동무대는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입니다. 22세 때부터 57세에 사망하기까지 35년간을 지냈으니 공식 국적은 독일이라 해도 사실상 오스트리아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당시 비엔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로 중부 유럽의 독일 폴란드 체코 헝가리와 이탈리아 북부를 아우르는 유럽의 초강대국이었습니다. 여황제였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수도 비엔나를 세계적인 음악 도시로 키우면서 많은 음악가가 몰려들게 됩니다. 또한, 오스만제국의 침입으로 이슬람 문화가 유입되어 커피와 함께 자유로우면서도 흥겹고 빠른 리듬의 튀르크 음악이 유행처럼 퍼지는 국제도시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터키 행진곡’을 작곡하기도 하였고요.

베토벤의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영향으로 베토벤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자 혹독한 피아노 훈련을 시키면서 군중들 앞에서 즉흥 연주를 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모차르트만큼 신동 소리는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22세에 음악의 도시 비엔나로 와서 유명한 스승을 만나 재능을 인정받고 체계적인 지도를 받게 됩니다. 오르가니스트인 스승 ‘네페’는 베토벤의 지도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도움도 많이 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안정된 그는 많은 제자를 길러냅니다. 

피아노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누구라도 알만한 ‘카를 체르니’가 베토벤에게는 훌륭한 제자입니다. 그 역시 작곡가이면서 교육자로 많은 제자를 길러낸 음악가이고요. 스승 베토벤과는 편지로 많이 교류하였고 이 편지들은 베토벤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답니다. 그리고 베토벤 조카 ‘카를’을 가르쳤고요. 


오스트리아 비엔나 베토벤광장의 베토벤 동상


25세가 되자 서서히 두각을 나타낸 베토벤은 26세부터 귀를 앓기 시작했답니다. 청력 상실은 음악가에게 치명적이었기에 감추기에만 급급했던 것이지요. 32세가 되면서 번잡한 수도 비엔나를 떠나 근교의 조용한 마을인 하인리겐슈타트에 살면서 주옥같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베토벤 사후에 알려진 것이지만 그는 이곳 하인리겐슈타트에 살면서 두 번이나 유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그가 사랑했던 연인이 누구인지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연인에게 귓병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비관하며 신을 원망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달콤한 죽음의 유혹을 물리치고 악마 같은 인생의 위기를 극복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고독 속에서도 산책으로 마음을 달래며 수많은 메모로 작품을 구상했던 것이지요. 

이처럼 천재적인 작곡가였지만 악상이 떠오를 때마다 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록하는 습관이 몸에 뱄답니다. 그리고 괴테나 고흐가 많은 편지를 썼던 것처럼, 베토벤도 이들 못지않게 1600여 통이나 되는 많은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또한, 비엔나에 35년 동안 살면서 80여 차례나 이사 다녔다고 합니다. 작곡을 구상하는 것 자체가 예민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으니 조금이라도 집안 분위기가 흐트러지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집주인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마찰도 많았고요.

이러한 환경 속에서 34세가 되던 1804년에 교향곡 3번을 작곡합니다. 바로 ‘영웅교향곡’으로 이 교향곡의 원래 제목은 ‘보나파르트 교향곡’이었다. 베토벤은 한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추앙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교향곡 3번을 나폴레옹에게 바치려 하였지요. 

당시 유럽은 프랑스 대혁명의 열기로 가득했고 나폴레옹이야말로 ‘자유 평등 박애’를 구현해줄 영웅으로 받들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공화정을 철저히 탄압하고 1804년 황제에 즉위하면서 베토벤의 생각은 바뀌게 됩니다. 결국 나폴레옹도 독재자가 되려 한다며 크게 실망했고 ‘보나파르트’라고 적힌 교향곡 3번 악보 표지를 찢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표지에 ‘Sinfonia Eroica’(교향곡 영웅) 라고 쓰게 됩니다. 교향곡 3번 ‘영웅’은 그렇게 탄생했으며, ‘영웅’은 혼란의 시대를 수습해줄 영웅의 탄생을 기다린 베토벤의 바람이 담긴 곡인 셈입니다. 

후에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려 했던 베토벤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공포감에 떨게 됩니다. 아니 오스트리아 사람들 모두 두려움에 떨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 빅토리아 전투에서 영국, 스페인, 포르투칼의 동맹군에게 패하자 동맹군의 수장인 웰링턴 공작에게 승리를 축하하는 ‘웰링턴의 승리’라는 행진곡풍의 악곡을 만들어 축하하게 됩니다. 분노했던 베토벤에게는 그리고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는 나폴레옹의 몰락이 더없이 기쁜 소식이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비엔나 시민공원의 슈베르트 동상


말년, 운명하기 직전까지 그는 여러 곳에서 의뢰받은 곡들을 작곡하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배에 물이 차올라 혼수상태에 빠졌고, 4번씩이나 물을 빼면서도 정신이 돌아오면 작곡에 열중했다고 합니다. 

동시대를 함께 살았던 슈베르트, 소심하며 수줍음 많았던 그가 흠모해왔던 이 대 작곡가를 만날 엄두도 내지 못하다가 지인들의 주선으로 베토벤이 사망하기 일주일 전, 슈베르트는 자신의 악보 몇 장을 가지고 베토벤의 문병을 오게 됩니다. 병상에 누운 베토벤은 슈베르트의 악보를 받아보고 크게 만족하며 “자네를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걸…… 자네는 분명 세상을 빛낼 훌륭한 음악가가 될 거야. 용기를 잃지 말게”라며 병환 중에도 불구하고 젊은 슈베르트를 격려했다고 합니다. 이에 슈베르트는 쇠약해진 베토벤의 모습에 괴로워하며 그의 방을 뛰쳐나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고요.

결국, 베토벤은 57세가 되는 1827년 3월 26일 영원히 잠들게 됩니다. 29일 치러진 장례식에는 2만 명 가까운 인파가 모여 위대한 음악가를 추모했다고 하니, 당시 비엔나 인구는 20만 명으로 베토벤의 추모 열기를 짐작할 따름입니다. 슈베르트 역시 베토벤의 장례식에 참석해 그의 관을 들게 되었고요. 

슈베르트도 건강이 좋지 않아 베토벤이 운명한 다음 해인 1828년, 31살에 생을 마감하며 자신을 베토벤 무덤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비엔나의 베토벤 동상으로부터 6km 정도 떨어진 중앙묘지 음악가의 묘역에는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바로 옆에 자리 잡고 누워있습니다. 

그렇게 불꽃처럼 살았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를 논한다면 주저 없이 그의 이름을 댈 것입니다. 음악가로서 치명적인 청력 상실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고 일어선 위인, 고전음악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그의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연주되는 레퍼토리 역시 베토벤의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베토벤은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해나가면서 음악의 새로운 영역을 확장한 급진적인 예술가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중앙묘지 음악가묘지에 잠든 베토벤 묘지

오스트리아 중앙묘지 음악가묘지에 잠든 슈베르트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