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수의 스케치-2] 관촉사 석등과 석불

놀뫼신문
2020-07-29

[임의수의 스케치-2] 관촉사 석등과 석불

온화함·위엄 동시에 갖춘 이율배반의 석불상 ‘은진미륵’

모양은 ‘관음보살상’이지만 은진미륵으로 알려진 고려시대 석불상입니다. 크기도 19m나 되니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시대 우리나라 석불 중 가장 큰 부처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부처님은 언뜻 보기에 온화하고 너그러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몸체에 비해 거대한 머리, 팽팽하게 팽창한 두 볼이 주는 긴장감, 부리부리한 눈, 두꺼운 입술이 그 앞에 서면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하는 위엄이 서려 있습니다(사진 참조).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모습이지요. 왜 이런 모습일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이 불상이 세워진 우리 논산지역은 멸망한 백제의 최후 보루였던 계백장군과 5천 결사대가 그 뼈를 묻은 곳이며, 또한 후백제의 근거지로 강성했던 후백제군을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면서 창칼로 제압한, 황산벌이 굽어보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통일한 고려왕조는 백제이자 후백제의 유민으로서 의식이 아직 가시지 않은 이곳 사람들에게 고려의 강력한 왕권을 과시할 상징과 함께, 이율배반적이지만 이곳 민심을 아우르는 일이 시급했을 것입니다. 

나당연합군에 패하고 후삼국의 전쟁에서도 거듭 패하다보니 지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조상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은 황폐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 잃은 유민이 되어 방랑 아닌 방랑으로 목숨을 연명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두 번씩이나 전장에서 패한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줄 강력한 메시아를 갈망하는 무언가(부처님)를 만들어 소원을 빌고 안전을 갈망하며 평화를 발원하지 않았을는지요. 그렇게 제작된 부처님은 멀리서 보면 온화하고 너그러워 자신들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을 품어 안을 모습을 보이는 한편, 기도하던 장소에서 올려다보면 위엄서린 험상궂은 모습에서, 또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서 적들의 침략에 부처님의 위력으로 물리치고자 했던 바람이 이렇게 위엄서린 모습으로 무섭게 만들지 않았나 추론해봅니다.  

석불상 앞의 법당인 관음전에는 부처님을 따로 모시지 않았습니다. 바깥에 세워진 이 석불상이 대신하는 것이기에, 유리창을 두어 법당 안에서도 밖에 있는 불상이 보이게끔 한 것이 관촉사만의 특징입니다. 

은진미륵 앞의 석등 역시 거대하면서도 개성적이며 독특한 모습입니다. 보시다시피 5m가 넘는 사각형의 석등은 단층이 아니라 2층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2층의 석등은 우리 관촉사에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석등이지요. 자세히 보면 상층의 석등은 불을 밝힐 수 없는 가짜 석등입니다. 

만약 사각형의 석등을 단층만 제작해 세웠다면 단순하여 볼품없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2층을 장식으로 만들어 올렸기 때문에 비율과 비례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지붕돌 네 귀퉁이에 솟은 장식(귀꽃) 역시, 석등 위에 더해져 경쾌하며 날렵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거대한 바윗돌에서 풍기는 둔중한 이미지를 이처럼 가볍게 보이도록 처리한 미적 감각이야말로 천 년 전의 우리 조상들로부터 배워야할 미학의 덕목이 아닐까 합니다. (※ 석등= 보물 제232호, 석불상= 제218호)


임의수(펜화가·역사문화유산해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