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새로읽기] 마음울림이 있는 삶과 메마른 삶

놀뫼신문
2020-03-25

 

가슴 울컥, 코끝 찡, 눈시울이 붉어지고 나도 몰래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이처럼 순박한 사람들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코로나19’ 위기의 순간, 순하고 착한사람들이 서로의 아픔 보듬고 다독인다.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할머니가 약국에 갔다. 사람의 인내심이라도 시험하듯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관절염 때문에 성치 않은 다리로 앉았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앞에서 줄이 끝날 즈음 마스크가 품절이란다. 깊은 한숨만 쉬고 되돌아선다. 몇 걸음 떼지 않아서다. “할머니! 여기 제 마스크 쓰세요. 저는 아직 괜찮거든요.” “ 아니~, 괜찮아요, 그럼, 마스크 값 받으세요. “할머니!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건강하세요” 뭐라고 대꾸할 사이도 없이 그 청년은 줄행랑을 친다.

미장원에서다. 중년을 훌쩍 넘어선 아주머니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미안합니다”을 연발한다. 몇 번을 듣고 있다가 “왜 미안하다고 말하세요”  “저~ 마스크를 쓰지 않아서요. 약국에 갔는데 떨어졌다고 해서요, 미안해요.” 사연을 들어보니 내일 딸네 집에 가야 되어서 어쩔 수 없이 미장원에 왔단다. 

한땀 한땀 손바느질로 만들어서, 주민센터에 던져놓고 간 할머니표 마스크, 노약자들을 돌보는 요양원의 의료진과 봉사자는 집에 가본 지가 보름을 훌쩍 넘어간다. 보안경으로 생긴 이마의 상처에 훈장처럼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이고 전염병과 싸우는 의료진들도 숱하게 많다.

모두가 아픔 보듬고 감싸 주고 작은 정성이나마 보태려고 한다. 사랑과 자비가 천당과 극락의 본질이라면 이곳이 우리들의 파라다이스(paradise)다. 감동의 울림은 삶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가정, 직장, 지역사회, 대한민국, 나아가 지구촌이라는 공동체로 연결된다. 홀로 있어도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자칫 한 사람의 잘못된 행동조차도 우리 모두를 침몰시킬 수 있음을 뼈저리게 경험한다. 깨어 있는 시민의식이 건전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역사는 지나친 권리 주장 때문에 자유조차 박탈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면 외부의 힘에 의해 통제받을 수밖에 없다. 


「비난으로 만들어지는 삶」


코로나가 창궐한 지 2개월을 넘어선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그럴싸해 보이는 사진과 글, 영상으로 가짜뉴스를 만들어 국민을 우롱하고 힘들게 한다. 사진을 교묘하게 합성하여 ‘대통령이 왼손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고 모략하기도 하고, ‘북한에 마스크를 퍼주어서 모자란다’는 가짜뉴스도 범람한다. 우리나라 국민에 대한 입국금지를 놓고 정부의 외교력을 비난하면서 특정국가 국민의 전면 입국금지를 주장한다. 늑장 방역과 미흡한 준비에 대한 비난도 끊이지를 않는다. 가짜뉴스는 특정한 세력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고 유통한다. 가짜가 사실인양 호도되고 순박하기 짝이 없는 일부 국민들은 속아서 극단적인 말을 하고 비난에 가세한다. 죄악이다. 공동의 선(善)을 파괴하는 행위다.

비판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일이다. 비판은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낸다. 헤켈은 ‘정(正)’ ‘반(反)’ ‘합(合)’의 변증법적 비판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비난은 이성(理性)보다 감정에 의지한다. ‘좋고’  ‘싫고’가 기준이다. 그래서 파괴적이다. 갖은 감정적 언사들을 구사하여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근거 없는 사실을 사실인양 덧씌우기도 한다. 비난의 목적은 상대방을 파괴하는 것이다. 비난은 삶은 메마르고 황폐하게 만들 뿐이다. 일상을 대하는 우리들의 시각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비판인지, ‘좋고 싫음’의 감정적 비난인지 다시 살펴볼 일이다. 

중세유럽, 1937년부터 3년 동안 유럽 인구 중 9천만명 중 4천만이 흑사병으로 죽어나갔다. 인류 절멸의 위기에 전염병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뉘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날마다 식탐과 호색을 즐기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이미 면죄부나 기도의 약발은 떨어진 지 오래였다. 이들은 순간의 쾌락으로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도피를 꿈꾸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맹목적인 신앙으로 환자와 외부인에게 살의를 품고 증오로 무장한 광신적 종교집단도 등장했다. 광장에 속죄양을 내세워 등에 채찍질하며 찬송을 부르기도 했다. 독일의 일부지방에서는 유대인의 피를 요구하며 유대인의 마을을 불태우기도 했다. 또 다른 부류는 쾌락과 증오심 대신 죽음을 앞둔 환자를 끝까지 돌보다가 죽음까지 동행한 고결한 품성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의 헌신적인 봉사로 절명의 위기에 있는 공동체가 간신히 연명할 수 있었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로 인한 전염병은 인류를 고통스럽게 만들어왔다. 흑사병(페스트)은 중세유럽인구 9000만 명중 400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또 1차대전 직후(1918년) 스페인독감으로 5000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한다. (National Geographic, 인류멸망시나리오). 최근에도 ‘HIV(에이즈)’ ‘사스’와 ‘에볼라바이러스’ ‘메르스’ 같은 신종 질병에 대한 공포가 생생하다. 하지만 페스트, 스페인독감, 결핵, 천연두, 콜레라 등 인류를 위협하는 질병은 극복되어 왔다.

겨울을 뚫고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청아한 물소리가 골짜기에 빼곡하다. 바람은 이골에서 저 골로 미끄러지듯 유영하며 검게 죽은 나무들의 살갗을 어루만진다. 연녹색(軟綠色) 새싹으로 천지가 개벽할 때쯤, 우린 서로가 서로의 가슴으로 바람처럼 유영할 수 있으리라. 그 날까지 모두에게 위로와 희망으로 감동의 바람되어 석회화된 가슴, 눈물  훔쳐낼 수 있기를. 그 날이 되면 비난보다 칭찬의 질퍽한 잔치상과 마주할 수 있으리라. 


최병현 미래인재역량개발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