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를 돌아본다1] 논산문인협회를 창립하던 때

2026-07-26


하늘에서 갑자기 금덩어리가 뚝 떨어져 부자가 되는 일은 민담과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작은 것도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없다. 우리가 주목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 탄생에는 동기가 있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크고 작은 노력이 뒷받침되어 이루어진다. 

오늘날 55명의 회원을 가진 논산문인협회가 탄생하고, 성장해 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1980년대의 논산은 거침없이 문화의 불모지라고 일컬어졌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그것은 문화에 대한 관심조차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모지라는 인식이 있어야 그 땅에 씨를 뿌리고 가꾸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노력을 기대할 수 없다.

논산에서 예술단체로서 선구적 역할을 한 단체는 미술협회였다. 논산미술협회 회원들은 처음에 공주미술협회에서 활동하다가 부여미술협회가 창립되면서 그 회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논산에 거주하는 회원이 증가하면서 마침내 1987년에 논산미술협회가 창립되었다. 

미술협회의 활동은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얼마간의 자극제가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한 지역의 예술은 어느 한 단체가 활동한다고 해서 갑자기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촉매로 다른 분야에 영향을 끼치고, 그러면서 어울려 함께 발전한다.

문학 분야에서의 활동은 놀뫼문학회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그 이전에 수필가 김영배, 시인 박주남 등을 중심으로 하는 황산벌문학회가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동호인 중심의 매우 제한적인 활동에 그쳤다. 그리고 이들이 각지에 흩어짐으로써 실질적인 활동은 마감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러 고등학교의 문학적 접근


강경상업고등학교는 1960년대에 이미 교지 『팽나무』를 발간하고 있었다. 지방 명문 실업고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던 학교답게 학교 운영 제반이 격조가 있었다. 1970년에 거행된 개교 50주년 기념행사에서 3학년 학생 권선옥이 지은 기념 축시를 낭송할 정도였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직전에 시인 구상회가 근무했었고, 수필가 김영배·강나루 등이 교사로 재직하고 있어서 문학에 대한 이해가 높았던 데에 있다.

또 쌘뽈여자고등학교에서는 60년대 말부터 학생 시화전, 초청 문학 강연 등을 실시하였고, 70년대 초에는 국어 교사로 방석준 시인이 재직하여 문학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강경여자고등학교에서도 소설가 박범신이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에 잠깐 국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문학회 활동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동은 학생 신분일 때에 국한되었고, 아쉽게도 이들이 성인이 되어 논산 지역에서의 활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놀뫼문학회 창립


1982년에 권선옥 시인은 고향의 고등학교에 국어 교사로 부임하였다. 1976년에 『현대시학』의 추천을 받아 활동하고 있던 그에게 논산은 삭막한 도시였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풍토를 개선해 보겠다는 상당히 무모한 뜻을 품고 문학인들을 수소문하여 1988년에 놀뫼문학회를 조직하였다. 창립하자마자 시낭송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문학의 힘으로 논산을 향기롭고 윤택하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각종 문학 행사를 개최하였다. 1989년에 제1회 놀뫼백일장을 개최하여 당시 논산군에서 주최하는 놀뫼축제 개회식에서 시상식을 가졌다. 이후 동인회지 발간, 독서 강좌, 저자와의 대화, 문학 강연, 시낭송회 등을 연이어 개최함으로써 시민들과 문학을 통하여 소통하게 되었다. 

놀뫼문학회는 1989년에 『지심 매고 남을 이랑 없으련마는』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한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거르지 않고 동인지를 발간하였다. 동인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여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면서 지역사회를 두드려 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타 분야 예술 활동보다 문학을 통한 활동은 파급력이 매우 컸다. 지역사회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이 차츰 증대되었다. 


논산문인협회 창립


이는 놀랄 만한 성과였다. 당시 논산군청 예술계장이었던 전영기 씨는 이런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타 지역은 이미 예총이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음을 알고, 권선옥 시인을 만나 예총 결성에 대해 상의했다. 예총을 결성하려면 4개의 예술 단체가 있어야 가능했다. 이미 미술협회가 있었다. 전 계장은 문인협회의 창립을 독촉하였다. 

놀뫼문학회를 통해 많은 문학 활동을 하고 있던 권선옥에게는 그리 긴요한 문제는 아니었으나 이에 응하여 문인협회를 결성하기로 했다. 함께 활동하던 놀뫼문학회 회원들과 그가 전에 틈틈이 지도해 주었던 놀뫼자모독서회 회원 중에서 창작에 열의가 있던 사람들을 골랐다. 그리고 본격으로 문인협회 결성을 서둘렀다. 20명이 조금 넘는 숫자였다. 그만하면 우선 회원은 확보된 셈이었다. 

다음은 회장을 누구로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권선옥 자신이 회장이 되면 문협이 일사불란하게 운영될 일이었다. 그러나 권선옥에게는 한 가지 못다 이룬 꿈이 있었다. 1989년에 충남과 대전직할시가 분리되어 문협도 분리하기로 했다. 수필가 김영배 선생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던 권선옥은 이참에 충남문인협회장에 그를 추대하고자 했다. 후보로 등록한 뒤에 선거운동을 펼쳤으나 대전에 거주하던 김영배는 공주에 살던 한상각에게 선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김영배는 대전에서 문학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김영배는 고향인 강경여중의 교장으로 발령받아 강경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에 권선옥은, 김영배의 충남문인협회장 옹립은 불발되었으나 논산문인협회장은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그를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1992년 11월에 회원 30명이 모여 한국문인협회논산지부의 창립 총회를 가졌다. 지부장에 김영배, 부지부장 권선옥이 선임되었다. 그 외의 회원으로 논산에 거주하는 사람, 고향에 대해 애정이 있던 논산 출신들이 총동원되었다. 그러나 대전에서 제법 활발하게 활동하던 문인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고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고향의 초가삼간을 그리워할 리 없다. 아니, 어쩌면 잊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 뒤에도 오래 돌아보지 않았다. 


139174ff83134.jpeg

권선옥(시인, 논산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