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고, 꽃이 피고, 천지에 신록이 가득하면 유월. 온 세상이 푸르게 변해 나무며 풀잎 같은 것들도 활개를 친다. 그런데 해마다 유월이 되면 가슴에 박힌 못이 자꾸 들썩여서 그 아픔에 신음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나라를 지키겠다고 처자를 버리고 전쟁터로 뛰어간 사람. 그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지만, 다만 돌아오지 않으니 죽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그는 그렇게 이 땅에 한 줌의 흙을 보태고 말았다. 훨씬 뒤에 나라에서는 이 가족들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기도 했고, 아이들은 국가유공자 자녀라고 해서 학비를 면제해 주어 공부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더 많이 돈을 주고 대우를 해 준들, 남편이 살아 있는 것 같을 것이며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것 같을까. 그렇지만 나라는 이들에게 더 많은 경제적 도움을 주고 혜택을 베풀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았다. 이들은 독립운동가 후손처럼 그늘에서 살아야 했다.
우리 논산에서는 특히 애절한 사건이 있었다. 1950년 7월 17일에 강경경찰서 소속 경찰 83명이 적과 맞서 싸우다가 한꺼번에 순국하였다. 그래서 논산경찰서에서는 매년 이날에 합동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또 논산문화원에서는 논산시의 지원으로 해마다 <유월음악회>를 열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누가 어떻게 지킨 나라인가
우리의 기억에서 점차 지워져 가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의 생생한 증언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구술 채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몇 분을 모시고 그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분들이 이렇게 나라를 지켜 주셔서 ‘우리가 오늘날 편안하게 사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욱 용사(99세)는 전쟁 중에 군에 입대했는데 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비단 이 용사뿐 아니라 그때의 모든 군인이 다 그랬다. 군산의 군부대에서 입대하여 군번을 받고 논산훈련소로 옮겨와 21연대에 편성되었다. 훈련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모든 게 맨땅이었다. 숙소는 건물이 아니라 천막을 치고 지냈고, 변소(화장실이 아니다)도 변변치 않았다.
훈련은 7주를 받았는데 늘 배가 고팠다. 끼니라는 것이 반합의 반찬 그릇에 밥 한 주걱을 퍼 준 다음에 선지를 넣고 끓인 미역국 한 국자를 끼얹어 주었다. 그것마저 온전히 먹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훈련병들이 좀 미흡한 데가 있으면 식사 시간을 시작하자마자 끝내게 하였다. 수저도 없어 손으로 쥐어 먹거나 군번으로 퍼먹었다. 물도 잘 주지 않았다. 목마름은 배고픔보다 더 심했다. 훈련을 나갔다가 물을 보면 청탁(淸濁)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음껏 마셨다.
그렇게 고되고 배고픈 훈련 과정을 마치고 경남 마산의 군의학교로 배속받아 위생병 교육을 받았다. 환자의 상처에 붕대를 감는 방법, 지혈을 하고, 주사를 놓는 법을 3주 동안 배웠다. 교육 후에 강원도에 주둔하고 있는 7사단에 전출, 의무병으로 전쟁 현장에 들어섰다. 화ㅏ천으로, 원통으로, 부대를 따라 산골짜기를 옮겨 다녔다.
처참한 죽음의 현장을 누비다
처음 나간 전장이 백석산 고지였다. 얼마나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는지 산이 아니라 벌집이었다. 포탄이 쉬지 않고 떨어지고, 나무와 풀은 파편과 총알에 맞아 성한 것이 없었다. 전투가 끝나고 보니 부대원 350명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여덟 명뿐이었다. 두렵지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두렵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는 두려움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많은 전우들이 죽어갔다. 한 부대가 통째로 무너지면 그 자리를 다른 부대가 다시 메웠다. 학도병들이 많이 들어와 빈자리를 채우고 채웠다.
부상병은 참호에서 치료했다. 피를 흘리다가 지혈이 되면, 붕대를 감은 병사들이 다시 전투 현장으로 나갔다. 부상이 심한 병사도 있었다. 두 팔이 다 잘려 나간 사람, 다리가 절단된 사람들을 업어 날랐다. 침상 같은 것도 없어 맨바닥에 눕혔다. 후방 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적군 부상병들도 치료해 줬다. 총을 들고 싸울 때는 적이었지만, 부상한 사람은 같은 환자였다. 치료에 필요한 물품은 미국에서 지원해 주어 부족하지 않았다. 그 원조가 아니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 것이다.
죽음을 넘어 백수를 누리다
전쟁 현장에서는 참호가 집이었다. 먹고 자는 것 모두가 참호에서였다. 노무자들이 밥을 지어 지게에 지고 고지까지 올라오면 밥은 꽁꽁 얼어 혀로 조금씩 녹여 가면서 먹었다. 옷은 꿰매고 꿰매어 입었다. 장교 역시 성한 옷을 입지 못했다. 그렇게 헐벗고 굶주리면서 눈이 오면 눈에 젖고, 비가 오면 비에 젖은 채로 마를 때까지 그냥 입고 있었다.
휴전이 되고서 처음 휴가를 나왔다. 논산에서 집까지 삼십 리를 걸어서 갔다. 일주일 후에 부대로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더 멀었다. 군대 생활 4년 5개월만에 제대하였다.
이정욱 용사는 올해 아흔아홉, 백수(白壽)이다. 건강 관리 비법은 남과 다투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지금도 한적한 시간이면 옛 전우들이 눈에 선하다. 살아 있는 동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동행했던 소룡리 김경세 노인회장은 이정욱 어르신에 대해, “당신 일은 당신이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매우 규칙적으로 생활하십니다. 남의 손을 빌리기보다 남에게 손을 내미는 분입니다.”라고 말했다.

권선옥(시인, 논산문화원장)
봄이 오고, 꽃이 피고, 천지에 신록이 가득하면 유월. 온 세상이 푸르게 변해 나무며 풀잎 같은 것들도 활개를 친다. 그런데 해마다 유월이 되면 가슴에 박힌 못이 자꾸 들썩여서 그 아픔에 신음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나라를 지키겠다고 처자를 버리고 전쟁터로 뛰어간 사람. 그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지만, 다만 돌아오지 않으니 죽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그는 그렇게 이 땅에 한 줌의 흙을 보태고 말았다. 훨씬 뒤에 나라에서는 이 가족들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기도 했고, 아이들은 국가유공자 자녀라고 해서 학비를 면제해 주어 공부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더 많이 돈을 주고 대우를 해 준들, 남편이 살아 있는 것 같을 것이며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것 같을까. 그렇지만 나라는 이들에게 더 많은 경제적 도움을 주고 혜택을 베풀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았다. 이들은 독립운동가 후손처럼 그늘에서 살아야 했다.
우리 논산에서는 특히 애절한 사건이 있었다. 1950년 7월 17일에 강경경찰서 소속 경찰 83명이 적과 맞서 싸우다가 한꺼번에 순국하였다. 그래서 논산경찰서에서는 매년 이날에 합동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또 논산문화원에서는 논산시의 지원으로 해마다 <유월음악회>를 열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누가 어떻게 지킨 나라인가
우리의 기억에서 점차 지워져 가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의 생생한 증언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구술 채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몇 분을 모시고 그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분들이 이렇게 나라를 지켜 주셔서 ‘우리가 오늘날 편안하게 사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욱 용사(99세)는 전쟁 중에 군에 입대했는데 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비단 이 용사뿐 아니라 그때의 모든 군인이 다 그랬다. 군산의 군부대에서 입대하여 군번을 받고 논산훈련소로 옮겨와 21연대에 편성되었다. 훈련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모든 게 맨땅이었다. 숙소는 건물이 아니라 천막을 치고 지냈고, 변소(화장실이 아니다)도 변변치 않았다.
훈련은 7주를 받았는데 늘 배가 고팠다. 끼니라는 것이 반합의 반찬 그릇에 밥 한 주걱을 퍼 준 다음에 선지를 넣고 끓인 미역국 한 국자를 끼얹어 주었다. 그것마저 온전히 먹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훈련병들이 좀 미흡한 데가 있으면 식사 시간을 시작하자마자 끝내게 하였다. 수저도 없어 손으로 쥐어 먹거나 군번으로 퍼먹었다. 물도 잘 주지 않았다. 목마름은 배고픔보다 더 심했다. 훈련을 나갔다가 물을 보면 청탁(淸濁)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음껏 마셨다.
그렇게 고되고 배고픈 훈련 과정을 마치고 경남 마산의 군의학교로 배속받아 위생병 교육을 받았다. 환자의 상처에 붕대를 감는 방법, 지혈을 하고, 주사를 놓는 법을 3주 동안 배웠다. 교육 후에 강원도에 주둔하고 있는 7사단에 전출, 의무병으로 전쟁 현장에 들어섰다. 화ㅏ천으로, 원통으로, 부대를 따라 산골짜기를 옮겨 다녔다.
처참한 죽음의 현장을 누비다
처음 나간 전장이 백석산 고지였다. 얼마나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는지 산이 아니라 벌집이었다. 포탄이 쉬지 않고 떨어지고, 나무와 풀은 파편과 총알에 맞아 성한 것이 없었다. 전투가 끝나고 보니 부대원 350명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여덟 명뿐이었다. 두렵지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두렵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는 두려움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많은 전우들이 죽어갔다. 한 부대가 통째로 무너지면 그 자리를 다른 부대가 다시 메웠다. 학도병들이 많이 들어와 빈자리를 채우고 채웠다.
부상병은 참호에서 치료했다. 피를 흘리다가 지혈이 되면, 붕대를 감은 병사들이 다시 전투 현장으로 나갔다. 부상이 심한 병사도 있었다. 두 팔이 다 잘려 나간 사람, 다리가 절단된 사람들을 업어 날랐다. 침상 같은 것도 없어 맨바닥에 눕혔다. 후방 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적군 부상병들도 치료해 줬다. 총을 들고 싸울 때는 적이었지만, 부상한 사람은 같은 환자였다. 치료에 필요한 물품은 미국에서 지원해 주어 부족하지 않았다. 그 원조가 아니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 것이다.
죽음을 넘어 백수를 누리다
전쟁 현장에서는 참호가 집이었다. 먹고 자는 것 모두가 참호에서였다. 노무자들이 밥을 지어 지게에 지고 고지까지 올라오면 밥은 꽁꽁 얼어 혀로 조금씩 녹여 가면서 먹었다. 옷은 꿰매고 꿰매어 입었다. 장교 역시 성한 옷을 입지 못했다. 그렇게 헐벗고 굶주리면서 눈이 오면 눈에 젖고, 비가 오면 비에 젖은 채로 마를 때까지 그냥 입고 있었다.
휴전이 되고서 처음 휴가를 나왔다. 논산에서 집까지 삼십 리를 걸어서 갔다. 일주일 후에 부대로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더 멀었다. 군대 생활 4년 5개월만에 제대하였다.
이정욱 용사는 올해 아흔아홉, 백수(白壽)이다. 건강 관리 비법은 남과 다투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지금도 한적한 시간이면 옛 전우들이 눈에 선하다. 살아 있는 동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동행했던 소룡리 김경세 노인회장은 이정욱 어르신에 대해, “당신 일은 당신이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매우 규칙적으로 생활하십니다. 남의 손을 빌리기보다 남에게 손을 내미는 분입니다.”라고 말했다.
권선옥(시인, 논산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