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집] 겨울잠을 준비하는 시간

2025-11-12


입동이 지났다. 산과 들에서 지난여름 동안 활기차게 자라나던 초목들이 모두 숨을 죽이고 있다. 사람 사는 데와 가까운 곳에 사는 나무들은 사람의 훈김을 쐬어서 그런지 아직도 생기가 다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외로 나가보니 어느덧 단풍이 제법 고운 빛을 띠고 있었다. 오래 멍하니 단풍을 바라보다가 그 풍경이 마치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가까운 사람의 혀만 보다가


사람이 사람들 속에 휩싸여 살면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가까이에 사람이 있으면 그 얼굴만 본다. 그 거리가 조금만 떨어져 있으면 그 얼굴 전체를 볼 수 있는데, 바짝 붙어 있으면 그 하나도 전체를 보지 못하고 코나 입만 보인다. 

그러니 그 코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만 눈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는 까닭에 코에 대해서만 말한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눈을 어찌 알겠는가. 그런데 그가 가까이에 있던 사람이고 코에 대해서 자상하게 말하므로 사람들은 눈에 대해서도 그럴 것으로 생각하여 그대로 믿는다. 조금 떨어져 있던 사람이 그의 눈을 보고 눈에 생기가 없다는 말을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정작 눈으로 본 것을 믿지 않고 가까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허풍을 믿는다. 그는 너무 가까이 있어서 코만 자세히 보았지, 눈은 언뜻 본 적도 없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한다. 

세상은 이래서 늘 탈이 난다. 아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제 맘에 맞지 않는 일이 있어도 드러내지 않고 거짓 웃음으로 그를 덮는다. 윗사람은 그에게 아부하느라 그런 줄을 모르고 그가 충성스럽다고 생각한다. 불만이 있어도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입을 열지 않는 모리배를 충복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둘이 손을 굳게 잡고 희희낙락 달려가지만 그 끝은 어둠이 깃든 절벽이다. 


멀리 서야 많이 보인다


엊그제 어떤 행사에 참석했었다. 앞 좌석에 정해둔 내빈들의 자리에 앉지 않고 중간쯤에 앉았다. 얼마 후에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나를 보고 앞으로 옮겨 앉으라 했으나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랬더니 내가 아는 사람이 다가와서 내 옆구리를 찌르며 반갑게 인사했다. 

뒷자리에 앉았으니 좋은 게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나를 주목하는 사람이 적어 내 행동이 자유로웠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기도 하고 빙글빙글 사방을 돌아보기도 하였다. 바로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저희 엄마한테 투정하는 것도, 그러다 잠이 들어 쌔근거리는 모습도 보았다.  

또 앞에 앉은 사람들의 뒤통수를 보면서 그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알고 인사를 나누고 지내는 사이이나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의 장점을 다시 꺼내 보자니 아쉬운 생각도 고갤 들었다. 겸손하여 만날 때마다 나의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게 하는 사람, 뭐가 못마땅한지 늘 화가 난 사람처럼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 똑똑해 보여 그녀에게 조그마한 실례를 하면 삿대질에 치도곤을 당할 것 같은 여인, 참 여러 사람이 모여 공연을 보면서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내가 앞자리에 앉았더라면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앞에서 가까이 보면 더 크고 자세히는 보이지만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 이렇게 조금만 떨어지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크게 보느냐, 많이 보느냐는 선택의 문제이다. 모든 것을 가까이서만 보려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이는 늘 멀리서 관망하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 


지혜를 늘이는 겨울잠


이제 곧 길고 깊은 겨울잠에 빠져들 것이다. 나무는 내년 봄에 꽃을 피워 열매 맺을 차비로 꼬박 밤을 새우기도 한다. 우리가 잠이 깨었을 때 몸피만 불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겨울잠은 무턱대고 잠을 자는 시간이 아니다. 몸을 웅크리고 살지만, 생각은 더욱 깊어져야 하는 시간이다. 행동은 줄이고 생각을 늘리는 시간이다.

어둡고 긴 겨울밤은 지혜를 늘이기에 좋은 시간이다. 봄이 오면 오래 길들여 있던 미망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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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옥(시인, 논산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