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자적, 세상이야기] 소통의 고수는 ‘다름의 이해’

놀뫼신문
2021-01-26

소통을 잘해보자는 자리에서 불통으로 감정의 골만 깊어지고, 결국 모임을 탈퇴한 N을 지난주 우연히 만났다. 반가움도 잠시, N은 이미 8개월 전으로 돌아가 섭섭하고 억울한 마음을 여과 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잘났어? 내가 뭐 틀린 소리 했어? 아니잖아. 자기 부모뻘 되는 나한테 말하는 거 봤지? 그게 할 소리야? 나는 정확한 사람이야. 그런 꼴 못 봐...”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에서도 그의 분노가 여기저기로 새어 나오는 걸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몇 해 전 필자가 스피치와 코칭을 지도했던 K. 공기업 임원을 지내다 퇴직 후에는 여러 단체에 몸담으며 사회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근황을 이야기하며, “노 코치, 요즘 젊은 사람들하고 소통하기가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어. 우리 때는 소주 한잔하며 형님, 동생 하면 만사형통인데, 이런 걸 세대 차이라 해야 하나? 말하는 것도 조심스럽고, 단체 대화방에서 좋아할 것 같은 글이나 동영상, 사진을 올려도 다들 반응이 신통치 않아. 시간이 흐를수록 노인네가 주책인가 싶어. 이제는 눈치만 살피고 있다니까. 내 마음 같지 않아.”라며 불편한 마음을 전한다.

두 가지 사례에서 보듯 소통은 한쪽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 방향으로 서로 잘 통하는 쌍방향 소통이 돼야 한다. 자신은 소통을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들여다보면 짝사랑 소통인 경우도 많다. 

나이가 들어 소통하기가 힘들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미국 미시간대학교 연구팀은 ‘좌우 대뇌반구가 만나는 부분인 뇌량에서는 뇌의 좌측과 우측에서 정보교환이 활발하게 일어나는데, 나이가 들면 좌·우뇌의 의사소통 속도가 늦어진다’는 연구를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우선되면 나이 듦이 도리어 지혜로운 소통의 히든카드가 된다.

필자가 자주 언급하는 은사님이 대표적인 분일 것이다. 상대의 나이가 어리다고 반말을 사용한 적 없고, ‘만인이 나의 스승이다’는 말을 늘 하시며, 의견이 달라 상대가 불쾌한 감정을 표출해도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말이 많아지는 것도 경계하셨다. 대신 칭찬은 과하다 싶을 만큼 자주 하셨고, 칭찬의 내용도 구체적이어서 “어떻게 저런 디테일까지 다 보셨지?”라며 섬세한 관찰력에 놀라워하는 주변 사람들이 많다. 

은사님의 소통법은 바로 다름의 이해였다. 내가 맞고 상대가 틀리다가 아니라, 내 의견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였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초등학생들도 저학년과 고학년을 나눠 세대 차이를 운운한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라떼는 말이야’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도 성격이 다른데, 남이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진정으로 소통을 원한다면 타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자세,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필자도 단체 대화방이 여럿 된다. 대부분 알림음을 무음으로 설정해두어 무관심하거나 소통할 의사가 없냐는 오해도 받았다. 집에서만큼은 온전한 쉼을 누리고 싶은데,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대화방의 알람 소리가 때로는 공해가 되기 때문이다. 필자와 같은 고민을 호소하는 지인들은 ‘단체 대화방의 일원이 되었다고 모두 한마음이 돼서 억지 공감을 누를 수는 없다’고 말한다. 환경과 처한 상황이 다른데,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고 억지 소통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마음의 자세가 소통의 고수가 되는 길이다.



노태영 (행복을 리추얼하는 작가/ 라이프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