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호억 “예술은 기교가 아니라 생각의 가치체계”

놀뫼신문
2017-04-26


이호억 작가 (사진촬영사진 월간미술 박홍순 기자)


[특별인터뷰  제1회 광주화루 한국화 대상수상 이호억 ] 


“예술은 기교가 아니라 생각의 가치체계”


지난 4월 18일, 광주은행이 주관하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공동 주최한 제1회 “광주화루” 시상식이 광주은행본점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주인공은 논산 연무 출신의 한국화가 이호억 씨다. 


논산의 경사이기에 앞서, 전국적로 볼 때 위대한 탄생이다. 제1회 광주화루는 넉 달 동안 세 차례의 심사를 진행했다. 1차 포트폴리오 심사, 2차 본 작품 심사, 3차 심층 면접심사로 심사위원들 간 서로를 모르게 따로 심사가 진행되었고 면접을 위한 방도 다섯 명의 심사위원이 방을 따로 쓰도록 하여 심사의 공정성을 더했다. 공모의 권위와 문제의식은 공정성에서 나온다. 규모 역시 한국 미술공모 중 단연 최대 규모다.


화루(畵壘)는 한국화의 거두인 추사 김정희에게서 유래한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제주도 귀양에서 돌아와 용산에서 머물 때, 서화하는 제자들이 모여 자신들의 솜씨를 겨루고 김정희의 품평을 받았다. 당시 화가 그룹은 회루(繪壘), 서가 그룹은 묵진(墨陣)이라고 불렸다. 화루는 회루의 회(繪)를 화(畵)로 바꾸어 만든 이름이다. 즉, 그림으로 경쟁하기 위해 모인 화가들의 그룹을 가리키는 것이다. 


충청남도와 남도 화단의 인연에 대하여 이호억 작가에게 설명을 구하였다. 


“오늘날 한국화의 맥을 잇고 있다고 평가되는 남도 한국화의 뿌리는 진도출신의 소치(小癡) 허련(許鍊)입니다. 이 소치라는 분의 자손들과 제자들은 한국화의 전통적 계보를 잇고 있습니다. 이 소치의 스승이 예산출신의 추사 김정희(金正喜)입니다. 대외적으로 남도가 한국화의 본향이라 인식되지만 충청도에서도 충남이 배출한 한국화가들 또한 남도 화단 못지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같은 맥을 잇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충남이 배출한 홍성의 고암(顧菴) 이응노, 예산의 일랑(一浪) 이종상, 부여의 산동(山童) 오태학, 청양의 일초(逸初) 이철주 선생님 등이 그 증거이며, 이 분들의 맥을 잇는 남도출신의 대가 장흥의 이송(二松) 김선두 선생님과 제자인 내가 충남 논산 출신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남도한국화와 충남의 한국화는 한 몸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인(文人)은 생각을 형식화시킬 수 있는 자이며, 문인화(文人畵)는 그러한 맥락에서 예술로 인식됩니다. 이 땅에서 지필묵을 통해 끊임없이 삶에 대하여 고찰하는 선배 화가들의 뒤를 잇는 작가로 일어서겠습니다.”   


수상 소식을 듣고 기자가 찾아간 곳은 가야곡면 삼전리 작업실이었다. 이 작가의 선조는 대대로 채운면에 살아온 논산의 유지였는데 그때 이 마을 사람들과도 좋은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어려운 사람에게 송아지를 주거나 나무 같은 것을 해서 강경장에 팔러왔다가 못 팔면 채운의 할아버지 집에 들렀단다. 몽땅 사주니까... 그런 연으로 마을 분들이 선조들을 존경했고, 가야곡 이곳 선산에 공적비가 선 인연이 땅이다. 미당 서정주 선생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고 술회한 바가 있다.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이호억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들어본다. 


한국화가로 성장시켜 준 밑거름으로,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과 동네가 준 영향이 컸을 거 같은데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아버지와 선산이 있는 만목마을에서 사슴농장을 만들었습니다. 새벽녘 사슴들에게 밥을 주기 위해 연무에 있는 두부공장에서 비지를 얻어다 먹이곤 했는데, 차고 상쾌한 공기와 새벽하늘의 숭고함을 기억합니다. 겨울날 사슴의 김 서린 호흡과 나의 호흡 아버지의 호흡을 기억합니다. 아버지는 성실한 공직자이며 또한 농민이십니다. 특히 동물을 좋아하셨는데, 이러한 영향이 나의 그림에 동물이 주로 등장하게 된 근간이 된 것 같아요. 나는 산수과 동물을 통해 사람의 이야기를 합니다.


할아버지는 유학자로 조상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셨습니다. 조상의 비문을 세워 영원히 이야기가 전해지도록 하는 것에 힘쓰셨고 육남매를 길러낸 멋진 가장이셨습니다. 카리스마가 대단하셨어요. 따뜻하고 유한 아버지와 또 다른 매력을 갖고 계셨죠. 할머니께서는 지금도 고향집에 가면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주십니다. 할머니의 상대를 배려하는 인품과 사랑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셋째이신 할아버지와 육남매를 이끌고 채운면 배꽃마을에서 연무로 이사와 아버지와 삼촌들 고모들을 기르셨습니다. 청양에서 시집오신 어머니는 의지가 대단하신데요. “항상 할 수 있다.” 라는 자신감을 주시고 아버지의 큰 버팀목이 되어주십니다.  

 채운면 연무읍 가야곡면 그리고 아버지가 면장으로 근무하고 계신 성동면까지 논산의 모든 땅과 공기가 나를 예술가로 길러냈습니다. 드넓게 펼쳐진 논밭과 석양. 숲과 사슴들. 때로는 황량하게 느껴지는 소소한 풍경이 나로 하여금 이 풍경들을 통해 무언가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욕구를 일으켰지요.


이제 중고시절로 올라가보죠. 특히 미술 부문에서 영향을 준 친구, 선생님 이야기나 당시 작품세계의 동인(動因)이 궁금합니다. 

 

할아버지의 권유로 할아버지의 친구이신 인송 선생으로부터 서예를 배웠습니다. 이후 한동안 지필묵과 거리를 두다가 고교시절 다시 접하게 되었는데, 이는 순전히 나를 기록하고 싶다는 불안감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서양화보다 비교적 익숙했던 도구가 지필묵이었던지라 자연스레 한국화를 선택하여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친구로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시는 강신영 선생님께서 많은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중학교 때도 미술시간을 좋아하긴 했어요. 칭찬을 받았었어요. 연무대 중학교 1학년 때 고한일 선생님이 소묘 수업을 하고나서 제 작품을 교탁에 놓더니 “이렇게 까지들 그려와!”하시는 거예요. 하얀 구체를 명암법으로, 힘을 빼고 보이는 대로 희미하게 그렸는데 그 칭찬이 기억에 남았었죠. 과외선생님이 문제집 여백에 가득 만화를 그려둔 나를 보고는,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한 말이 기억에 남고요.....  미술에서 타고난 재능을 강조하는 사람은 맞지 않아요. 미술은 생각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지, 기법 같은 건 노력과 시간으로 다 해결되거든요. 고3생이 미술학원 보내달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엄마가 반대 엄청 했어요. 선생이 되겠다는 조건으로 호언장담하고 시작하긴 했는데, 또래친구들이 너무 잘해서 포기하려고 했죠. 그러자 반대하시던 엄마가 “아니 시작했으면 사과라도 깎아야지!” 그래서 계속 하게 된 거예요. 반대했으면서 아들이 실망하는 건 또 보기 싫으셨던 가 봐요. 부모님이 선택한 길이 아닌 내가 선택한 길을 간다는 것도 좋아서 그 뒤로는 더 열심히 한 것 같아요. 



고려대 정종미교수, 중앙대 김선두 교수, 이호억 작가 (정남진에서)


한국화를 선택한 이유와 매력도 있었을 거 같습니다. 


할아버지의 권유로 시작한 서예에 대한 기억이 작동하여 익숙한 도구로서 지필묵을 선택하게 된 겁니다. 결국 이야기를 건네는 도구로서, 지필묵이 나에게 가장 편안한 친구가 되어 준 것이죠. 항상 고민하는 점은, 내가 전공하고 있는 이 미술의 영역이 우리 삶에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대한 의문입니다. 많은 화가들이 그림의 장식성 혹은 디자인의 세련됨에 집착하는 편입니다. 나는 이 문제를 완전히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미술은 생각의 가치체계이지 공예나 디자인이 아닙니다.” 이는, 문학과 작곡의 기능과도 유사하다 하겠습니다. 작가의 문제의식이 공론화될 가치가 있고, 그 의미가 감정을 쓰는 방식으로 고정될 때 작품은 예술로서의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 삶의 원리로서 작동하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고민의 힘을 길러준 분들은, 중앙대학교 은사님들이십니다. 


은사님이신 이송 김선두 선생님께 그림을 보여드리면 내 그림을 조목조목 평가해 줘요. 또 이론에 관해서는 김백균 선생님께서 가르침 주시는데요. 이 두 분은 무얼 읽고 보라는 식보다 ‘직접 해갖고 와라.’였어요.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하도록 하는 거였죠. 그림이든 글이든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품평해 주시니 그림과 논문에서도 많이 성장했죠. 그림이나 글이나 결국 주관을 전하는 의미에서 같은 행위입니다.  


현실을 돌아볼 때, 정형화된 동양화가 즐비하고 한국화는 이름조차 생소해보이네요. 특히 젊은층을 포함, 일반인이 동양화나 한국화에 매력을 느끼려면...? 한국화/동양화를 취미로 배우려거나 진학하려는 이들을 위해 조언을 해준다면요....


자신이 체험해 본 것은 더욱 잘 볼 수 있습니다. 지필묵을 다루는 경험을 통해서 그림을 읽는 시야를 기를 수 있으리라 생각돼요. 감상과 체험은 결코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죠. 동양화의 다양한 시점과 운필을 통해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한국화는 예술 체계이지, 전통 공예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할 거 같습니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문제는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의도를 전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수려한 말보다, 투박하고 어눌하지만 정확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말솜씨인 것과 같아요!


화법이나 글 쓰는 행위, 그리는 행위가 ‘생각을 드러내는 점’에서는 동질적입니다. 글 쓰는 행위가 텍스트를 이용해서 기승전결로 내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것이라면, 그림은 상징 내지 이미지를 사용해서 한방에 얘기하는 거예요. 한방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보이게 한다는 점에서만 다르죠. 시가 추구하는 기능도 같죠. 예술의 기능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일 겁니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는 사진에 비해 사실성은 떨어지지만,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울렁울렁하고, 더 해바라기를 느끼고, 작열한 태양을 느끼게 되잖아요! 그게 바로 감정을 사용해서 잠재적 사실을 이끌어내는 거예요. 사진은 실제적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지요, 자연을 실제로 볼 때는 실제적 사실과 잠재적 사실이 동시에 오기 때문에 감정을 느끼고 이입을 하고, 대상과 나를 동일시하는 거잖아요. 그게 바로 현장 사생과 회화의 힘 이예요.


예술은, 분야가 달라도 지향점은 동일하다는 관점 같은데요..... 작가생활을 본격 시작하면서 추구한 이상, 테마, 꿈 같은 게 있다면요?


미술공부를 시작하며 부모님과 했던 약속은 미술선생이 되는 조건이었습니다. 부모님 입장에서 자식이 그림만 그리며 가난하게 살 것이 두려우셨겠죠.  부모님과의 약속을 떠나서, 내 목표는 이렇습니다. “첫째, 내가 치열하게 고민해온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둘째, 삶의 안정을 도모한 뒤에는 문화계를 건강히 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 입니다. 예술은 우리 삶에 이상을 부여하죠. 그래서 꼭 우리에게 필요한 체계라 생각됩니다. 논산 출신인 우리가 서울에서든 어디서든 열심히 꿈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나름대로 목표한 이상이 있기 때문이지 않겠어요? ^^


내 초기 작업은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어떤 아름다운 면을 주목하기보다 부조리나 직면한 문제를 주목해서, 그걸 고발하는 형태로 작업해왔어요. 소모품으로서 기능하는 가축인 닭들, 돼지들, 도살장 끌려가는 개라든지 남의 불행을 즐기며 본다던지. 이런 것들을 많이 해왔죠. 위태로운 상황들이 많잖아요. 세월호 선장 같은 어른들이 우리 때도 있었는데, 어른에 대한 불신이 생겼어요. 어른이 다 훌륭하지 않구나. 정말 나쁜 사람들이 많구나. 보게 됐고, 그러다 보니 나라는 사람 자체가 방어적으로 바뀌어 있더군요. 경계하게 되고, 작업자체도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형식이고, 그러다가 계기가 생겼어요. 2014년, 아버지가 위암수술을 받게 된 거예요. 휴직은 한 1년 조금 안 됐고, 제 작업이 그때 다 바뀌었어요.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많지만, 서울 생활 쭉 하다 보니까 정말 참 어른은 위인전 속의 위인이 아니라 바로 부모님이었구나! 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두려움이 오는 거예요. 나에게 소중한 어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시간의 유한함을 직접적으로 느낀 계기로 작품 세계도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뭔지 알게 된 것이죠. 다행이 아버지는 지금 완치단계로 여전히 성실하게 논산시와 성동면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출세를 위한 노력과 예술가로서의 직업, 이 둘 사이를 어떻게 보는지요?


예술이라는 직업 자체가 취직이 아니라는 시선이 있지요. 하지만 예술가의 태도는 공적인 것에 있지 않고, 사적인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어요.


한국에서는 “공적인 영역”이 공기처럼 흐르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 만나면 나이 물어보고 대학 물어보고, 그러면서 서열을 정해요. 그런데 예술이라는 건 사적인 영역이거든요. 그 당시 학생인 저는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부딪혔어요. 논산에 방학 때 내려오면 자랑스럽고 좋다 이랬는데, 학교 마치고나서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내려왔어요. 제 자격지심일 수도 있지만, 술 사주고 띄워주던 친구들도 저에게 실망하는 것 같더군요. “아, 그래. 내가 도망칠 곳은 고향이 아니었어. 다시 서울로 가야 된다!” 해서 다시 올라간 곳이 홍제동이에요. 아버지한테 허름한 빌라 작업실로 쓰겠다고 부탁했죠. 내가 공부하던 중대 흑석동과는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그냥 맨땅에 다시 시작한다는 느낌으로, 다시 시작했습니다. 


당시 중대에는 한국학과 박사과정이 없었던지라 회사에도 잠깐 다니고, 어떻게든 공적 영역에 들어가려 필사적으로 노력했어요. 그래야 부모님이 안심하고, 친구들도 인식이 달라지겠다싶었으니까요. 취직을 못해서 자살하는 청년들을 이해할 수 있겠더라 구요. 예술 하는 저조차도 공적인 영역에 들어가지 못해서 불안해하는데, 일반 사람들이야 그 심정이 어떻겠어요? 한국 사회는 공적인 걸 벗어나면 큰일 나는 걸로 알죠. 지금까지 다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사적인 영역보다 공적인 영역이 더 크고 중요하죠. 열심히 준비해서 2015년 신설된 중앙대 예술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게 되었고 순수하게 공부에 몰입하고 싶다는 욕심이 컸어요. 수석입학으로 전액장학금을 받아 전일제 학생으로 학업과 작업에 몰입했습니다.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예술가는 그런 궤도 밖에서 궤도를 바라보는 것이지, 궤도에서 태엽처럼 같이 굴러가는 존재는 아니거든요. 철저하게 내면에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는 거! 그리고 그걸 통해서 무슨 입장으로써 어떤 얘기를 해야겠다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행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초창기에 했던 나의 작업들은 비명에 불과했어요. 사실 그 정도 수준의 얘기는, 예술 작품이 아니더라도 편의점에서 막걸리 마시는 아저씨도 할 수 있는 얘기예요. 예술은 더 깊은 얘기를 해야 되잖아요. 어떤 시인이 “시가 왜 필요하냐?” 는 질문에, “시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살 수 있게 접착제 역할을 한다.” 사람다움에 주목하는 거, 왜 우리가 모여 살아야 하는지 확인시켜주는 거, 거기에 궁극적인 예술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직접적으로 아버지가 아프면서요.

 


이혁재 성동면장 부부 이호억 시상식에서


만약 이번에 대상을 수상하지 못했다면,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요?


최선을 다했고 마음을 비우고 기다렸습니다. 수상 소감도 압축해서 말했습니다. “나는 왜 미술이 필요한지 생각해봤다. 우리에게 미술이 있어야 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게 내 작업의 원동력이 됐다. 그건 사람다움에 주목하는 일이다.” 미술은 누군가의 장식이 아니라 미술 자체가 고전이 되어야 하고, 인간들이 왜 인간성을 갖고 모여 살아야 되는지 느끼게 해주는 장치라는 취지였습니다. 미술이나 문학이나 같다고 봐요. 『아Q정전』은, 아Q라는 중국인을 등장시켜서 주체적이지 못하고 나약한 중국의 몰락을 비유한 거잖아요. 그러면서 자각을 하게 되는 과정이랄까요, “그러면 나는 어떠한가?” 제 작품은 제 개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분명 우리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거든요. 누구나 아버지가 있고, 누구나 삶의 무게를 감내해야 할 때가 있잖아요. 출세를 위해서든, 투병이든 삶의 무게들, 이런 것들을 공감하기 위해서 미술이 필요하다는 거죠. 



논산에 계신 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텐데요.....


논산은 아름다운 고장이고, 역사적 역량이 있는 고장입니다. 모든 선배님들이 마찬가지겠지만 고향은 따뜻합니다. 내가 힘들 때 품어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준 곳도 바로 나의 고향 논산입니다. 모든 논산의 시민들이 행복하게, 자신만의 이상을 추구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고향을 떠나 살며 부모님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논산은 나 자신이며 부모이며 형제이자 친구임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서울 서대문구에 독립문을 연무대 고향 선배인 서재필 박사가 세웠다고 알고 있는데, 그 독립이 중국에 대한 독립을 상징하는 거잖아요? 어찌 보면 우리는 오랫동안 주체적이지 못한 측면이 많았다고 봐요. 저는 서울 생활 할 때 독립문을 보면서 종종 용기를 얻었어요. 



이제는 작가로서의 이야기를 집중해 보죠. 작가로 공식 데뷔한 작품부터 수상 캐리어 등등요~~~


등단이라는 기준을 따로 삼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작업은 이어질 것입니다. 굳이 예를 들어야 한다면, 이번 제1회 광주화루에서의 대상 수상이 그간의 고민들을 대변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시작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시스템에 젖지 않고 나의 주관을 통해 감정을 움직이는 것에 주목하여 그 가치를 드러내는 작업을 해나갈 생각입니다. 



제1회 광주화루 개막식 국립아시아문화의 전당


이번 광주 수상의 위상과 한국화단에서의 평가와 뒷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 주지요! 


이번 제1회 광주화루는 상금 규모면에서 보더라도 한국 미술공모 중 최대 규모였습니다. 공모전은 넉 달 동안 세 차례의 심사를 진행했습니다. 1차 포트폴리오 심사, 2차 본 작품 심사, 3차 심층 면접심사로 심사위원들 간 서로를 모르게 따로 심사가 진행되었습니다. 면접을 위한 방도 다섯 명의 심사위원이 방을 따로 쓰도록 하여 심사의 공정성을 더했습니다. 심사위원들끼리도 몰랐다고 하니, 첩보작전 방불한 모양입니다. 공모의 권위와 문제의식은 공정성에서 나오죠. 심사위원들이나 나 역시 서로 몰랐어요. 좋은 평가 해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이분들은 한국화의 대가들이며 검증된 석학들이십니다. 우현 송영방, 소산 박대성, 이론가인 김상철 교수 등 을 비롯하여 총 다섯 분이 심사에 참여하셨습니다. 



한국화와 중국화, 일본화의 차이 내지 흐름이 있다면?


근대 용어인 동양과 동양화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로 직결됩니다. 동양(Orient)이라는 개념은 서양 사람들이 타자화한 개념으로 봐야 할 거 같아요. 여하튼 동아시아 삼국의 회화는 지필묵 그리고 아교와 분채라는 동일한 재료를 사용합니다. 채색화, 수묵화 두 가지를 나눌 때 수묵화는 서예에서 출발해서 지필묵을 사용하죠. 채색화는 분채와 아교를 사용해서 색감과 물감을 만들어내는데, 일회로 그치는 게 아니라, 계속 쌓아올리는 거고요... 그런데 일본화는 작가간의 특징이 모호해지고 그 형식이 유사해져서, 예술의 영역이라기보다 공예의 영역에서 다뤄져야 할 당위성이 많아 보입니다. 중국화의 경우도 선배들의 그림을 지나치게 답습하여 유사한 수묵 그림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주체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공적 영역에 있음을 반증합니다. 예술은 철저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로부터 출발하며 감정을 쓰는 방식으로 의미가 고정된다고 봐요. 이러한 면에서 아직 양식화가 진행되지 않은 한국화 영역은 오히려 많은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표현의 적합성을 위한 재료 수용의 부분에서도 중국화와 일본화에 비해 자유로워요!


최초의 회화는 암각화와 프레스코 동굴벽화였죠. 서양과 동양이 갈리는 것은, 서양은 양피를 이용하다가 캔버스 천을 썼고, 동양은 죽간을 쓰다 닥나무를 이용해 종이를 만들고 그 위에 처음에는 글씨를 쓰다가 나중에 그림도 그리게 되었죠. 동양화는 수묵화와 채색화로 갈라지는데, 담백해 보이는 수묵화는 오히려 나중에 출발해요. 채색화는 고대부터 그대로 진화해온 거예요. 중국에서 북조와 남조, 이렇게 갈려요. 북조 지방은 채색화 문화가 위주가 강하게 형성되어 채색화는 북종화라고 하죠. 남쪽은 수묵화 위주여서 남종화라 해요. 그렇게 방간의 문제로 우열을 논쟁하며 진화와 양식의 전복을 거듭합니다. 그래서 동양화는 수묵화와 채색화, 혹은 남종화와 북종화로 구분이 됩니다.


제 작업은 이 두 가지를 겸용한 채묵화입니다. 두 가지를 섞기 위해서는 수묵도 수용할 수 있는 종이인 장지를 사용해요. 화선지는 수묵밖에 사용 못하거든요. 장지는 두터우니까 수묵도, 채색도 가능합니다. 덜 번지는 걸 건필(갈필), 상대적으로 번지는 걸 습필이라고 해요. 그리는 재료는 붓 대신 연필을 쓸 때도 있어요.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에서 입자가 고른 것은 먹을 만들고, 입자가 큰 것은 검정 물감으로 만들어 써요. 염색을 할 땐 직접 열매를 따다가 써요. 치자도 있고, 오리나무도 있고, 이런 것들 끓여서 안료로 사용해요. 



이번 수상을 계기로 꿈과 목표가 새롭게 설정되었을 거 같은데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가 되어 세계적인 예술가들과 전시하는 것입니다. 문학을 제외한 예술계의 노벨상이 베니스 비엔날레의 수상이고 모든 예술가들의 꿈이죠. 동양화와 서양화는 다르지 않아요. 서양화는 색채와 빛을 사용하는 언어인 거고, 동양화는 필선과 여백에 감정을 담아 의미를 고정시키는 거고, 그런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목적은 같아요.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다.” 라는 점에서요.


대담 : 이진영 기자 



이호억은 누구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예술학과 박사과정 수료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한국화학과 석사과정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한국화학과 졸업

 

개인전

2016 돌을 찢는 남자(대한민국예술인센터, 서울)

2016 시림양색-(홍제천갤러리, 서울)

2015 관음(觀淫)에서 관음(觀音)으로 (안회당, 홍성)

관음에서 관음으로 프리뷰 (비채갤러리, 서울)

2014 Red Carpet (The K 갤러리, 서울)

2012 병풍들 (그림손갤러리, 서울)

 

단체전

2017 불안(금천예술공장, 서울)

2015 탕진 수묵전(복합문화공간 에무, 서울)

 

기타(발표)

풍경의 질서로서 글씨[]’, 순수 예술이 되는 지점미술문화연구8, 2016.6, 175-197

인도와 한국 불상의 안면 특징 비교 연구”, 기초조형학연구181(통권 제 79), 381-392





작품 1 이야기 : 이호억 〈돌을 찢는 남자: 팔(八)폭 괴석도〉 화선지에 유연묵 183×900cm 2016 〈제 1회 광주화루〉 공모전 대상 수상작가


이 여덟 폭은 난이 괴석 틈에서 자라나는 장면들입니다. 내가 괴석에 심취하게 된 기폭제는 바로 아버지입니다. 어릴 때 아버지와 이곳 선산 곁에서 사슴을 키웠어요. 선산 근처에 사시는 어르신께서 항상 아버지를 보고는 “맨손으로도 돌을 찢을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아버지가 2016년 위암으로 투병 중 수술 끝나고 산책삼아 걸으시면서 나에게 그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나는 지금 진통제를 적게 쓰고 있다. 빨리 낫기 위해서. 빨리 대문 걸어가는 모습 할머니께 보여드리고 싶어서.”라면요. 그때 들은 이야기에서 이 작업이 출발했습니다. 


견디는 힘이 젊음의 체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아버지라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책임감이나 어른다움에서, 그 강인함은 육체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인 거잖아요. 암이라는 것과 싸우는 것도 강인하게 느껴지고, 어떤 전쟁보다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음이 절절히 느껴졌죠. 그게 영감이 되었어요. 연약한 새싹이 나면서 돌을 비집고 나오거나, 아예 쫙 갈라버리는 경우도 있잖아요. 


즐거운 마음으로 그린 난초는 생명력과 행복을 상징해요. 괴석과 함께 남성성도 상징하죠. 나는 주로 동물들을 가지고 의인화하는데, 여기서는 식물인 난초와 괴석을 가지고 작업했죠. 이 병풍이 정리가 되어서 그렇지, 이 속에는 내가 작업했던 무수한 그림이 들어가 있어요. 완성 후에는 “돌을 찢는 남자”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인물화는 아닌데 인물화인 거죠. 우리들의 모든 아버지를 상징합니다.


 

이번 작품의 배경은 우리 선조들이 묻혀 있는 여기 선산입니다. 겨울산에 올라가서 그렸는데, 멧돼지도 만나고 긴장감 있게 그렸어요. 처음에는, 커다란 흰 장지에다가 풍경을 보고 수묵으로 그려요. 붓이 몇 만 개의 선이 되어 때를 묻히듯 배경을 만들어 주는데, 전체 풍경은 나의 감정을 실기 위한 틀이 돼주는 거죠. 1인칭 시점으로 그리고.... 그러나 하나의 시점으로만 그리는 게 아니라 옮겨 다녀요. 각종 동물들을 박제하듯 배치시키는데, 원근법을 조절하여서 연출합니다. 


동물은 움직일 동(動)으로, 사실 죽으면 멈추잖아요. 두 가지 경험인데 첫 번째는 제가 낙향했을 때 움직일 수 없을 만큼의 공적인 영역에서 벗어나는 거에 대한 좌절감, 두 번째는 아버지 투병할 때 움직이지 못하고 링거 맞고 있는 모습 본 순간, 깨닫게 된 거죠. 생명의 유한함을! 근데 할아버지가 만든 이 선산은 수많은 시간을 지났는데도 나무가 그대로 있고, 살아 있고, 아주 미미하지만 움직임이 있어요, 여기 새들은 사람들입니다. 나는 동물을 의인화해서 그리는데, 박제의 그림자에서 삶의 유한성을 보여주는 거죠. “삶은 유한합니다. 지금이 시간이 중요한 까닭입니다.” 아버지와 요즘 매우 친밀해져 있었는데, 중학교 때 노동을 함께 하면서 감정적 교류가 형성됐고, 나중에 더 큰 존재가 되셨던 것 같아요. 집을 떠나보니 어른 같지 않은 어른도 있고,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과도 부딪히곤 했어요. 출세한다고 다 출세가 아니라, 사람다운 게 출세하는 거잖아요. 이기적인 세상에서 좋은 어른들도 있다는 걸 발견했죠. 부모님 같은 분들이요.






작품2 이야기  <수덕사 대웅전 곁에서> 2017


이런 아버지와의 경험을 토대로 이번 겨울은 거의 모든 걸 걸고 준비한 과정인데요, 저 나름대로 승부를 걸었어요. 지금까지는 다 가짜였다. 이제부터는 내가 느낀 예술로써 작업을 하자. 그 동안 배운 장식성 그런 걸 다 버리고 육질적인 거에 집중하기로 했어요. 제가 수덕사에서 종이에다가 나무 같은 걸 드로잉했는데 ‘육질적(肉質的) 회화’라는 한 단어가 딱 떠오르는 거예요. 육질이란 군더더기 없이 형질만 있는 것, 살코기와 뼈만 있는 것, 비계가 덜어진 상태입니다. 장식성 이런 것들은 군더더기 비계였던 거죠. 그것들을 덜어내면 내가 충분히 할 얘기를 지필묵 하나만 가지고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바뀌기 위해서는 떠나야 한다. 그래서 서울 작업실 비워놓고 찾아온 곳이 예산 수덕사였고, 한 달여 오가기도 했지만 열흘간은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그림만 그렸어요. 설날 전까지 머무르면서 대웅전에서 108배도 드렸죠. 불교는 사실 기복신앙이 아니라 자기수양입니다.


수덕사에 한 달 가량 머물었는데 지속적으로 작업을 한 것은 열흘 정도. 왔다 갔다 했어요, 멀지 않으니까. 이 작품을 수덕사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나왔어요. 대웅전에서, 대웅전이 어떻게 보면 어른이라는 개념이잖아요. 우리는 80을 먹건 90을 먹건 부모님한텐 어리잖아요. 그런 개념으로, 부모님은 아니지만 큰 존재로서 내가 나약함을 인정하는 장면이죠. “수덕사 대웅전 곁에서”라는 제목도 의존적인 얘긴데, 나약함을 인정하는 방식, 솔직함으로써 정한 거예요. 그 때 “육질적” 회화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을 때 그냥 살 어름 낀 먹으로 그린 거예요. 먹의 번짐이 없이 갈필로 나왔는데, 얼어서 나온 거예요. 갈필로 완성되는 이유가 붓이 빠르게 지나가서 그렇기도 하고, 먹물이 건조해져서 그럴 수도 있죠. 정말 천천히 그렸는데 얼어서 건조해진 겁니다. 물 대신에 눈을 묻혀서 그린 거예요. 





작품3 이야기 : 시간과 움직이는 것과 살아있는 것〉 장지에 먹, 분채, 식물성 안료 125×193cm 


이 그림은, 우리의 통념과 배치된다. 식물이 가득한 산은 흐르고 있고, 동물은 오히려 박제가 되어서 고정되어 있다. 이해를 위하여, 월간미술 2017년 4월호 106쪽에 나온 자작 해설부터 들어본다. 


“내 문제의식은 시스템과 집단 질서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출발하여 지금은 시간과 움직이는 것에 주목하여 작업하고 있다. 작업을 이루는 가장 큰 특징은 ‘투쟁도, 섭취도, 생식도, 관음도’이다. 이는 삶의 가치를 조명하고자 펼치는 어둠으로서, 빛의 바탕으로서, 삶 자체를 상징한다. 터부시되는 무한한 투쟁과 먹이활동, 생식활동과 관음(觀淫)이 이루어지는 근대적 풍경을 통해 시간과 삶에 대하 고찰한다. 아버지의 투병 생활을 지켜보며, 몸을 움직일 수 있음에 대한 감사함과 삶 자체의 숭고함, 시간의 유한함을 자각하게 되었다.


현장에서의 모필 사생을 통해 시간성과 감정을 필선에 담아, 작업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여기에 박제된 듯 고정된 동물의 그림자 따위를 분채로 칠해 올린다. 움직이는 식물과 멈춰진 동물. 개체의 속성에 반하여 연출하고 작업의 의도에 따라 숲에서 채집한 식물성 안료로 염색하기도 한다. 유한한 삶의 가치를 움직이는 것과 멈춰진 것의 대비로서 드러내고자 한다. 우리는 시간에 속박된 유한한 존재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까닭이다.” 


한마디로 이 작품의 화두는, 시간의 유한함의 자각, 인간의 유한한 삶에 대한 자각입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가운데에 부처가 좌정해 있고, 새들은 부처의 제자들을 상징한 겁니다. 부처님을 가만 보세요. 한 눈을 뜨고서 다 엿보고 있어요. 우리가 아무리 도덕적인 얘기를 가르치고 들어도, 할 것은 다 해요. 새들도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각자의 시선이 다 보고 있어요. 내 그림의 특징은 투쟁도, 섭취도, 생식도, 관음도 등인데 다시 자세히 보세요. 교미도 하고, 그걸 엿보는 관음증 새도 있고.... 이런 군상들을 통하여 시간의 유한함의 자각, 인간의 유한한 삶에 대한 자각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그런 거 자체가 한 순간입니다. 


올 겨울, 수덕사에서 옮겨온 작업장이 가야곡 여기 선산이에요. 할아버지 말씀이 “이 산에 어떤 것도 건드리지 마라! 나무도 베거나 가지치기도 하지 말고, 나무가 죽으면 그대로 둬라!”이었다고, 아버지가 넌지시 일러주시더라고요. 숲에는 넘어진 나무도 있고 어린나무도 있고, 자연 상태인 이곳을 그려야겠다 싶더라고요. 당시 공모전 1차 포트폴리오 심사를 합격한 상태였어요. 경쟁률이 엄청났는데 2차에서는 20명만 뽑은 다음에 신작으로 본 작품 심사를 해요. 수덕사에서 또 선산에서 연속된 작업으로 몰입할 준비가 되어있었죠.


동물은 석사 때부터 본격 그리기 시작했어요. 할아버지는 식물을 좋아하셨어요. 작게 텃밭 일구면서 하시는 말씀, “재밌지? 씨 심은 게 커가는 모습이 신기하지 않냐?” 속으로 그랬죠, “일하는 게 지루한데 재미는 무슨 재미람ㅜ” 아버지가 동물을 너무 좋아해서 키우니까, 어릴 때부터 돼지 밥 주는 데 따라가고, 그때 냄새가 참 싫었는데, 아버지는 동물들 밥 주고 하는 게 너무 좋다는 거예요. 얘들이 내가 오면 ‘밥 주세요’라고 인사말을 건네 온대요. 지금도 퇴직하면, 동물 본격 키우는 게 꿈이래요. 

산에서의 작업은 내 몸을 산과 일체화 하는 행위입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산을 들어가면, 토지지신 비석에게 절을 했어요. 그 기억이 나서 이번 작품에 토지지신을 넣었습니다. 토지지신 제단 위에 사과도 올려놨어요. 산짐승과 산에 있는 것들 모두 산신령이라 생각하여 절하고 나를 받아달라는 염원도 담아서요. 겨울 산에서 그림 그리고 있는데 멧돼지가 먹이 찾아다니면서 지나갈 때,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그런 두려움과 함께 안도감도 들었어요. 할아버지들이 대대로 묻혀 있는 산이기도 하고, 그간 내가 동물들에게 해코지도 안 해왔으니까.... 로드킬 당한 동물들을 보면 지금도 운전대 잡은 채 염불 외우면서 가요. 생명의 외경심이 저절로 일어나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