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왜 소통이 갈수록 어려워질까?

2026-09-06


두 시간 동안 회의를 했는데 정해진 것이 없다. 목소리를 높인 사람도 없고 무례한 사람도 없다. 다들 옳은 말만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이 개운치 않다. 공무원이 아니라도 이런 자리를 한 번쯤 겪어보셨을 것이다. 집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괜찮다고 말한다. 괜찮지 않은데 그렇게 말한다.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한다. 사실은 신경 써주기를 바라면서.

우리가 말을 못 하게 된 것은 아니다. SNS를 비롯한 다양한 미디어로 말, 글, 사진은 인간의 인지능력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많아졌다. 다만 하고 싶은 말과 실제로 하는 말이 달라졌다. 나는 오해의 대부분이 여기서 생긴다고 생각한다. 말이 어려워진 것이 아니라, 말과 실제 사이의 거리가 멀어진 것이다.


왜 우리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할까


부끄럽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부끄럽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힘들다는 말, 억울하다는 말, 도와달라는 말은 그 자체로는 발언권을 얻지 못한다. 존경받는 언어로 번역되어야 비로소 탁자에 오른다.

행정 주변의 언어가 특히 그렇다. 무언가를 요구할 때는 ‘상생 협력’과 ‘지역사회 공헌’이 되고, 무언가를 미룰 때는 ‘신중한 검토’와 ‘공감대 형성’이 된다.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이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체면을 차린 말이고 명분 뒤에 숨은 말이다.

명분 뒤에 숨은 말은 결국 원본(실체)을 잃는다. 상대는 명분을 반박하고, 나는 원본을 지키려 하고, 대화는 처음부터 어긋난 채로 길어진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고 대화는 끝이 난다.


사실만 쓴다는 규칙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내용보다 문체가 먼저 충격을 준다. 짧다. 건조하다. 수식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읽고 나면 오래 남는다. 이 소설이 특이한 것은 자기 문체를 작품 안에서 직접 설명한다는 점이다. 전쟁 중에 시골로 보내진 쌍둥이가 스스로 작문을 연습하는데, 규칙이 하나 있다. 쓴 내용은 사실이어야 한다.

그래서 금지되는 문장이 생긴다. 할머니는 마녀 같다, 라고 쓸 수 없다. 대신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 라고 쓴다. 이 마을은 아름답다, 도 쓸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번병은 친절하다, 역시 안 된다. 우리가 보지 못한 곳에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으니까. 그럴 때는 이렇게 쓴다. 당번병이 우리에게 담요를 주었다.

감정을 가리키는 말은 부정확하다. 검증할 수 없다. 그러니 지운다. 남는 것은 일어난 일뿐이다. 앙상하다. 그런데 그 앙상한 문장이 쉽고 강렬하게 읽힌다.


짧아진 문장, 멀어진 이해


요즘 문장도 짧다. 미국의 뉴스 회사 액시오스는 2017년에 출발했다. 기사마다 '왜 중요한가'를 달고, 항목으로 끊고, 길게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난해 백악관 브리핑에서 관례상 AP통신에 돌아가던 첫 질문이 이 회사에 돌아갔다. 창간 십 년이 안 된 매체가 백칠십 년이 넘은 통신사 앞에 선 것이다. 짧음이 이겼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같은 짧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크리스토프의 단문은 진실에 닿으려고 군더더기를 버렸다. 오늘의 단문은 소비되려고 군더더기를 버린다. 하나는 검증할 수 없는 말을 지웠고, 하나는 검증할 시간을 지웠다. 형태는 같은데 방향이 반대다. 우리는 짧게 쓰는 법은 배웠다. 솔직하게 말하는 법은 잊고 있다.


문을 잡고 서 있는 사람


오래 마음에 품고 있는 문장이 있다. 성동혁 시인의 산문집 『뉘앙스』에 나온다. 시인은 소아 난치병 환자로 어린시절 다섯 번의 대수술을 받았다. 시인은 느리게 걷는 사람이다.

“느린 나를 위해 먼저 걸음을 옮겨 내가 지나갈 때까지 문을 잡고 있는 네 모습은 비유가 아니잖아. 네가 문을 잡고 있던 덕분에 많은 풍경 속으로 들어갔어.”

성동혁 시인의 산문집 『뉘앙스』에 나온다. 느리게 걷는 사람이 있고, 그보다 먼저 걸어가 문을 잡고 서 있는 사람이 있다. 뒷사람이 다 지나갈 때까지. 그 장면을 두고 시인은 이렇게 적었다. 비유가 아니잖아. 그리고 그 문 덕분에 자신이 들어설 수 있었던 풍경들을 이어서 말한다.

이 문장이 오래 남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여기에는 해석할 것이 없다. 무엇을 상징하지도 않는다. 팔이 실제로 문의 무게를 받쳤고, 그 몇 초 동안 한 사람의 하루가 실제로 멈춰 있었다. 그게 전부다. 비유를 업으로 삼은 사람이 어떤 장면 앞에서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는 순간이다.

그리고 문을 잡아주는 일에는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친절로 끝나지 않는다. 상대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바꾼다. 듣는 쪽이 문을 잡아주면, 말하는 쪽은 자기도 미처 몰랐던 말까지 꺼내게 된다.

솔직함은 혼자 낼 수 있는 용기가 아니다. 그 말을 하찮게 만들지 않겠다고 듣는 쪽이 약속할 때에만 가능하다. 언제부터 서로 말하기가 이렇게 어려워졌을까. 나는 말이 어려워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과 실제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을 뿐이다. 그 거리를 좁히는 규칙은 하나면 충분하다. 솔직해질 것. 쉬운 말을 쓸 것. 멋진 명분과 비유에 기대지 말 것. 그리고 상대가 솔직해질 수 있도록 문을 잡고 서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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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시청 김수연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