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기억 속으로] 6월 28일, 한강 인도교 폭파… 국가가 국민을 버린 날

2026-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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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피난민들이 폭파된 한강 인도교 대신 놓인 부교를 통해 강을 건너는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6·25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사흘 만에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한 군사작전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적보다 먼저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을 앗아간 비극으로 기록됐다.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서울은 반드시 사수한다"며 시민들을 안심시켰다. 많은 시민들은 정부의 발표를 믿고 서울을 떠나지 못했거나 피난 시기를 놓쳤다. 하지만 정부 수뇌부와 군 지휘부는 이미 서울을 빠져나간 상태였다.

뒤늦게 피난길에 오른 시민들은 한강 인도교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군인과 경찰, 피난민, 차량과 우마차가 뒤섞인 혼란 속에서 다리는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이 폭파됐다. 다리 위에 있던 사람들과 차량은 그대로 한강으로 추락했고, 희생자는 최대 800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더 큰 문제는 다리 폭파 이후였다. 한강 이북에 남아 있던 약 50만 명의 서울 시민들은 순식간에 퇴로가 끊겼다. 결국 상당수 시민들이 북한군 점령 아래 놓였고, 가족들은 하루아침에 생이별을 겪어야 했다. 군사적 필요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민간인의 대피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작전이 강행된 점은 지금까지도 한국전쟁 초기 최대의 행정 실패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참사가 발생한 뒤에도 정부는 책임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폭파 명령을 집행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책임이 집중됐다. 그는 군법회의에 회부돼 사건 발생 두 달 만에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964년 재심에서 법원은 최창식 대령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심 과정에서는 그가 상부의 명령을 수행한 것에 불과하며, 작전 결정의 책임을 개인에게 물을 수 없다는 점이 인정됐다. 결국 전쟁 초기의 혼란과 정부 수뇌부의 판단 실패가 하급 장교 한 사람에게 전가됐다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것이다.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은 단순히 다리 하나가 무너진 사건이 아니다. 국민에게는 "서울을 지키겠다"고 말해 놓고 정작 지도부는 먼저 피난했으며, 민간인의 생명보다 군사작전을 우선했고, 참사 이후에는 책임마저 현장 지휘관에게 떠넘겼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현대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전쟁은 수많은 희생을 낳는다. 그러나 국가의 존재 이유는 위기일수록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있다.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은 국가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76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무너진 다리보다 그 다리 위에서 희생된 이름 없는 시민들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의 참혹함뿐 아니라, 국가의 책임과 지도자의 책무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것이다.


- 이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