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집] 오늘은, 남천이 유난히 붉다

2025-12-23


창밖에 보이는 남천이 저녁 햇살을 받아 유난히 붉다. 꽃이 없는 겨울에, 서리를 견뎌 꽃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이 대견하다. 그 옆의 배롱나무는 지난 한 철 화사하게 꽃을 피워 우리들의 눈길을 붙잡아 두더니, 이제 쓸쓸하다. 잎도 하나 남지 않고 다 떨어져 어디론가 날아가고, 덩치만 앙상하다. 그래서 더 쓸쓸해 보인다. 쓸쓸하다기보다 초췌해 보인다. 때 묻고 찢어진 비단옷은 눈물겹다.

국화는 서리를 맞을 때까지 꽃을 피우지만, 추위가 거듭되면 시들고 만다. 그러나 꽃을 그냥 그대로 매달고 있다. 시들었지만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 측은하다. 어떤 꽃은 이미 꽃이 다 시들어 향기도 없는데, 시든 꽃잎을 그냥 매달고 있어 안타깝다. 버릴 때가 되면 버려야 하는데 버리지 못하는 것은 구차해 보인다. 그렇기에 갖는 것이 매양 좋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법정 스님은 그렇게 <무소유>를 말씀하셨고, 욕심 때문에, 생각은 하지만 따라가지 못하는 불쌍한 중생들은 스님을 부러워했다. 


또 헛되이 한 해가 간다


어느덧 12월도 저물었다. 올해도 이렇게 다 지나간다. 한 해를 보내면서 내가 마음먹었던 일들을 얼마나 실천하였나를 생각해 본다. 연초에는 제법 그럴듯한 몇 가지 계획을 세워놓고 설렜었는데 실천에는 미흡했다. 

우선 가장 안타까운 것은 내 마음에 있는 얼룩을 다 지우지 못한 일이다.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과 생각들을 좀 말끔하게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나중에 임종이 임박하여 회고할 때 가슴에 못이 여러 개 박혀 있다면 얼마나 무거울 것인가. 그때는 이미 못을 뺄 힘이 없으므로 그냥 안타까워만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못을 죄 뽑아버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어떤 못은 박은 지가 오래되어 녹이 잔뜩 슬어 있다. 또 못대가리가 문드러져 있기도 하다. 

그다음으로는 내가 더 너그러운 사람으로 살려고 했으나 이 또한 낙제점이다. 나에 대해 많은 불만이 있지만, 특히 너그럽지 못한 것이 크게 불만이다.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마음이 너그럽기가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그러면 재주가 뛰어난 것 하고 마음이 넓은 것 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가지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마음을 고를 것이다. 재주가 없으면 여러모로 뒤떨어져 살아야 하므로, 세상을 사는 데는 재주가 더 소용이 많다. 그러나 나는 재주가 없이 살더라도 마음을 넓게 사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도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

또 하나는 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역시 그리 녹록지 않은 일이다. 나는 자주 ‘정성을 다해 정해진 대로’라는 말을 떠올리며 산다. 그러나 그 역시 그렇게 우수한 성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정성을 기울여야 정성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정성을 다한다는 게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마늘을 깐다거나 꽃에 물을 주는 것은 끝이 보이는 일이다. 그러나 배추를 키우거나 아이를 돌보면서 정성을 다했다고 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 일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하는 데까지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경외감을 가지고 살아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하나가 경외(敬畏)를 잃지 않는 일이다. 보통 신에 대해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모든 일에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 어떤 직책을 맡아놓고 좋아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자리에서 누리는 권한만을 생각하는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자리에는 권한만 있는 게 아니라 그에 따르는 의무가 있다. 그게 문제다. 무슨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자리라도 그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면 그 자리에 앉았던 것이 오히려 수치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을 좋아한다. 왜 그 자리에 앉혔는지를 잊고 살고, 그 자리에 앉혀 준 사람을 잊고 산다. 경외감이 없기 때문이다. 경외감은 자신에 대한 성찰과 분발로 표출된다. 지금 잘하고 있는가를 냉정하게 살펴보면 잘한다고 박수를 보낼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면 다음 단계는 분발, 더 열심히 자기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다.

오늘도 바람 불고, 눈이 내린다. 문을 닫고 어두운 방에 앉아 내 지난 날을 곰곰이 따져봐야겠다.


권선옥(시인, 논산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