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고 부르니 소년이 쓰는 글인 줄 착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엄마’라고 불렀다. 엄마도 좋아하셨다. 그게 친근감이 더 갔기 때문이다. 낼모레면 엄마가 돌아가신 지 27주기가 된다. 작년부터는 기고 일에 큰댁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산소로 찾아가서 인사를 드린다. 종교 식으로 하다 보니 나에게도 낯설고, 더구나 엄마가 자손들이 갑자기 만든 환경변화에 쉽게 적응하실지도 모르겠기에 내가 안(案)을 내서 그렇게 정했다.
평소에 즐겨 잡수시던 음식 몇 가지 준비해 묘소 앞에 펼치고 절을 올린다.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말씀드리다 보면 생전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음력 섣달 초 열흘이니 한겨울에 돌아가셨다. 그날은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문상 오가던 사람들이 시골길에 차가 미끄러져 고생도 많이 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엄마를 불렀다. 아픈 허리 추스를 새도 없이 내 목소리를 듣는 순간 버선발로 마루를 내려오시던 엄마 몸에서는 목욕을 자주 하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엄마 특유의 체취가 나를 반겼다. 젊은 시절 깨밭에서 일을 하시다 들어오셨을 때의 그 체취가 그대로 남아 나를 편안하게 했다.
그 날은 엄마와 같이 잠자리에 들어 시간 흐르는 줄 모르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고, 엄마는 아들이 차버리는 이불을 덮어주시느라 잠을 꼬박 새우곤 했다. 남편을 여의고 13년을 외롭게 사셨다. 물론 아들 며느리가 잘 모셨지만, 남편만이야 했을까. 한쪽 날개를 잃고 얼마나 적적한 삶을 사셨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래도 법 없이도 살 분이라는 얘기처럼 평생 남에게 욕 한 번 아니하고, 지나가는 손에게도 물 한 그릇 정성으로 베푸시며 사셨기에 88세의 일기로 돌아가실 때에도 큰 고생 아니하고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 고종명을 잘하는 것이 오복 중 하나라는데 자식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저녁을 먹고 나면 밀짚 방석을 펴고 찐 옥수수를 먹으며 바라보는 하늘은 어찌 그리도 푸르렀던지. 별 총총, 추억 총총, 엄마의 사랑 총총. 그때도 엄마는 자식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공격하는 모기떼를 쫓아내느라 팔운동을 계속하셨다. 당신의 고통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식들을 위한 희생 자체로 사는 재미를 만끽하셨다. 딸 없이 개구쟁이 사내자식만 다섯을 키우셨다. 얼마나 어려우셨을까. 내가 넷째로서 그나마 딸 노릇을 해드린 것이 위안으로 남는다.
엄마는 가슴에 달을 키우셨다. 둥근 달 띄워 놓고 자식을 기다렸다. 전화를 드리면 ‘언제 올 건데? 바쁘면 그만두고. 오면 꼭 자고 가거라.’라는 말씀을 빼놓지 않았다. 출장길에 고향에 잠깐 들러 인사드릴 때는 좋았지만 내일 출근 때문에 지금 떠나야 한다고 말씀드리면 어찌나 가슴 아파하셨던지. 무릎 관절이 아파 합덕장에 가시는 도중에도 서너 번씩 쉬셔야 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으랴. 늘그막에는 눈도 잘 보이지 않고, 이도 없이 잇몸으로 잘게 썬 깍두기를 잡수시게 했던 이 불효자의 눈에서는 촉촉한 느낌뿐 안구건조증으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그저 안타깝고 죄송스러울 뿐이다.
이부자리 펴주시면서 웃으셨고, 먹는 것만 바라보아도 배가 부르다 하시던 엄마, ‘노들강변’, ‘달타령’ 등을 아들한테 배워 즐겨 부르시고, 자식의 발을 쓰다듬으며 기뻐하셨던 엄마, 비록 일방적 대화지만 엄마 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세상이 다 무너져도 엄마가 계시기에 나는 그저 행복할 뿐이다.

文 熙 鳳 (시인·전 강경상고 교장)
‘엄마’라고 부르니 소년이 쓰는 글인 줄 착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엄마’라고 불렀다. 엄마도 좋아하셨다. 그게 친근감이 더 갔기 때문이다. 낼모레면 엄마가 돌아가신 지 27주기가 된다. 작년부터는 기고 일에 큰댁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산소로 찾아가서 인사를 드린다. 종교 식으로 하다 보니 나에게도 낯설고, 더구나 엄마가 자손들이 갑자기 만든 환경변화에 쉽게 적응하실지도 모르겠기에 내가 안(案)을 내서 그렇게 정했다.
평소에 즐겨 잡수시던 음식 몇 가지 준비해 묘소 앞에 펼치고 절을 올린다.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말씀드리다 보면 생전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음력 섣달 초 열흘이니 한겨울에 돌아가셨다. 그날은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문상 오가던 사람들이 시골길에 차가 미끄러져 고생도 많이 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엄마를 불렀다. 아픈 허리 추스를 새도 없이 내 목소리를 듣는 순간 버선발로 마루를 내려오시던 엄마 몸에서는 목욕을 자주 하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엄마 특유의 체취가 나를 반겼다. 젊은 시절 깨밭에서 일을 하시다 들어오셨을 때의 그 체취가 그대로 남아 나를 편안하게 했다.
그 날은 엄마와 같이 잠자리에 들어 시간 흐르는 줄 모르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고, 엄마는 아들이 차버리는 이불을 덮어주시느라 잠을 꼬박 새우곤 했다. 남편을 여의고 13년을 외롭게 사셨다. 물론 아들 며느리가 잘 모셨지만, 남편만이야 했을까. 한쪽 날개를 잃고 얼마나 적적한 삶을 사셨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래도 법 없이도 살 분이라는 얘기처럼 평생 남에게 욕 한 번 아니하고, 지나가는 손에게도 물 한 그릇 정성으로 베푸시며 사셨기에 88세의 일기로 돌아가실 때에도 큰 고생 아니하고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 고종명을 잘하는 것이 오복 중 하나라는데 자식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저녁을 먹고 나면 밀짚 방석을 펴고 찐 옥수수를 먹으며 바라보는 하늘은 어찌 그리도 푸르렀던지. 별 총총, 추억 총총, 엄마의 사랑 총총. 그때도 엄마는 자식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공격하는 모기떼를 쫓아내느라 팔운동을 계속하셨다. 당신의 고통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식들을 위한 희생 자체로 사는 재미를 만끽하셨다. 딸 없이 개구쟁이 사내자식만 다섯을 키우셨다. 얼마나 어려우셨을까. 내가 넷째로서 그나마 딸 노릇을 해드린 것이 위안으로 남는다.
엄마는 가슴에 달을 키우셨다. 둥근 달 띄워 놓고 자식을 기다렸다. 전화를 드리면 ‘언제 올 건데? 바쁘면 그만두고. 오면 꼭 자고 가거라.’라는 말씀을 빼놓지 않았다. 출장길에 고향에 잠깐 들러 인사드릴 때는 좋았지만 내일 출근 때문에 지금 떠나야 한다고 말씀드리면 어찌나 가슴 아파하셨던지. 무릎 관절이 아파 합덕장에 가시는 도중에도 서너 번씩 쉬셔야 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으랴. 늘그막에는 눈도 잘 보이지 않고, 이도 없이 잇몸으로 잘게 썬 깍두기를 잡수시게 했던 이 불효자의 눈에서는 촉촉한 느낌뿐 안구건조증으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그저 안타깝고 죄송스러울 뿐이다.
이부자리 펴주시면서 웃으셨고, 먹는 것만 바라보아도 배가 부르다 하시던 엄마, ‘노들강변’, ‘달타령’ 등을 아들한테 배워 즐겨 부르시고, 자식의 발을 쓰다듬으며 기뻐하셨던 엄마, 비록 일방적 대화지만 엄마 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세상이 다 무너져도 엄마가 계시기에 나는 그저 행복할 뿐이다.
文 熙 鳳 (시인·전 강경상고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