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서원 UNESCO등재 재도전기

놀뫼신문
2018-08-20


돈암서원 UNESCO등재 재도전기

지역민이 치수하며 지켜낸 돈암서원



돈암서원은 예학의 종장이신 사계 김장생 선생이 논산에 설립한 기호유학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논산시 연산면 숲마을의 사계천에 ‘아한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김장생 선생은 1602년(선조 35)에 중앙 정계에서 물러나 고향인 연산에 내려와서 이 자리에 양성당을 지어서 강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깝게도 정유재란때 이 건물은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곳에서 김장생 선생은 아들인 신독재김집, 우암송시열, 동춘당송준길, 초려이유태 등을 가르쳤다. 선생께서는 예학에도 밝으셨지만, 나라에 대한 사랑도 깊으셔서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때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군량미를 모으고 의병을 모아서 적과 싸우시는 애국심도 발휘하셨다(양호호소사).



돈암서원 사액현판과 ‘응도당’


1631년 (인조 9) 김장생 선생이 84세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김집과 김장생의 제자들은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 서원 건립을 추진하였다. 전국의 유림들의 뜻이 모여서 2년 후인 1634년에 강당이 완성되어 응도당이라는 편액을 붙이게 되고 바로 사액을 요청하였다. 혼란스러운 병자호란 같은 국내외 사정으로 지연되다가 1659년(효종 10년), 돈암이라는 사액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효종이 급작스럽게 붕어하자, 1660년(현종 1년)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돈암서원이라고 사액현판이 내려졌다.

현재 돈암서원 입덕문에 들어서면 왼편으로 가장 먼저 보이는 웅장한 강당 건물이 응도당(凝道堂)이다. 응도당은 김장생 선생의 저서 <가례집람(家禮輯覽)>에서 언급한 서원건축의 예를 실제로 적용하여 만든 건물이다.

응도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돈암서원 건물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다. 송시열이 작성한 묘정비에 ‘사당 앞에 강당 다섯 칸이 있는데, 옛 하옥의 제도로 지었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응도당은 다른 서원 건물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방법과 구조로 만들어져 그 가치가 높다. 주자가 주장한 예제건축을 따라서 지었다. 때문에 많은 서원과 향교 등의 모범적인 건물이 되어 한국서원의 강당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보물 제1569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돈암서원은 조선 예학 연구의 거점이자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의 여론을 주도하는 영향력 있는 서원으로서 전국에서 모범이 되는 서원의 위상을 차지하였다. 사림의 중앙 정계 진출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학맥을 이어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춘길, 우암 송시열이 돈암서원에 배향되었다 (문묘배향 18인 중 4명). 효종 때에는 북벌을 주장하며 외세에 꿋꿋이 저항하는 충청 5현을 배출하였다.

김장생 선생은 중국의 예서인 <가례>가 조선의 현실에 맞지 않은 사례가 있을 뿐 아니라 해석 또한 여러 갈래로 논의되어 일관성이 없음에 주목하고, 조선의 현실에 맞는 기본 예서 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김장생 선생의 노력으로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가례집람> 이 간행되었다. 이후 조선후기의 예학 및 사상연구에 있어서 <가례집람>은 예학의 기본서로 자리매김하였다. <상례비요>, <의례문해속>, <전례문답>  및 문집 등이 속속 간행되었다. 돈암서원은 예학에 관한 다양한 저서를 출간하면서 명실상부 조선 예학의 산실로 거듭났다.



침수 피해로 원형 그대로 이건


19세기에 이르러, 사계천의 잦은 범람으로 임리 일대가 상습 홍수지역이 되었다. 돈암서원의 담장과 건물들까지 피해를 볼 수 있는 상황에 이르자, 서원관계자들은 돈을 모아 방천사등 수해에 대비하였으나 역부족으로 서원을 안전한 공간으로 이건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71년) 속에서도 기호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인정받고 유지되었으나, 그 시대의 여건상 이건비용을 요청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다. 이에 그 당시 유사인 송구희 등이 노력하여 서원 이건 계획을 수립하였고 1879년가을부터 1880년가을까지 1년 여에 걸쳐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돈암서원 이건비에 따르면 ‘사우를 지은 제도는 한결같이 옛날의 규모 그대로 하여 당과 도와 문과 숙을 조금도 차이 나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첫 번째 이건에는 양성당과 사우, 외사, 내사만 옮겼다. 응도당 건물과 원정비는 옛 자리에 그대로 둔 채 응도당 현판만 떼어 같이 옮겨졌다. 이후 돈암서원은 새로운 자리에서 서원의 공간을 갖추기 위한 여러 건립이 진행되었다. 담장과 문을 세웠으며 1903년 돈암서원 이건비가 건립되었다. 1926년 장판각을 1927년 양성당을 중수했다. 1950년 정회당 건물이 돈암서원으로 옮겨졌다.

1971년에 이르러 응도당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응도당 현판이 제자리를 찾게 된다. 1997년 양성당 앞에 동재와 서재가 건립되고, 2000년대 산앙루가 건립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유네스코의 기준, 진정성과 완전성


돈암서원은 현대에 이르러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인 ‘한국의 서원’의 아홉 개 서원에 포함되는 등, 서원의 건립 이래 한국을 대표하는 서원의 위상을 오늘날까지 공고히 유지하며 끊임없이 서원의 진정성인 강학활동을 이어왔다. 이에 이코모스(ICOMOS : 유네스코 세계유산 자문 기관)에서는 수차례에 걸친 서원실사에서 돈암서원의 활용사업을 높게 평가하며 다른 서원도 따르라고 권유하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해당 유산이 지닌 가치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증명해야하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유산이라고 할지라도 진정성과 완전성이라는 평가항목에서 유산의 보존에 미치는 악영향은 없는지, 유산의 보호관리 체계가 잘 구축되어 있는지 등도 중요하게 평가받는다.

돈암서원의 경우, 한 차례 건물이 옮겨온 연혁으로 인해 진정성에서 의문이 제시되었다. 건축학적인 측면으로만 고려한다면 건물의 배치가 달라진 점과 서원의 공간 구획과는 어울리지 않는 정회당의 존재가 진정성에서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연구된 많은 서적에서는 응도당이 첫 번째 이건작업 당시, 거대한 건물 규모로 인해 기술적으로 옮기지 못하고 1971년에 이르러서야 할 수 있었다고 기술되었다. 이에 의문을 품고 정회당과 응도당의 이건에 대하여 그 까닭을 추론해보았다.


돈암서원 이전의 대장정과 진정성


정회당은 김장생의 아버지(김계휘)가 세운 학교로 1557년에 대둔산의 고운사에서 건물을 빌려서 설립하였었다. 김집의 「봉안문」 『신독재전서 부록』에서는 “황령 아래, 청계 위에, 양현이 함께 계시는 곳, 백대를 두고 받드오리다”라는 문장이 있다. 여기서 황령 아래는 김장생 선생의 아버지인 황강 김계휘의 수학 공간인 정회당과 청계위에는 사계선생의 수학 공간인 양성당을 의미한다.

옛 선비들은 이 두 학교를 공간을 떠나서 크게 하나의 공간으로 보았다. 그러한 맥락으로 현 돈암서원 안에 정회당과 양성당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황강과 사계 두 분의 뜻과 사상을 함께 기린다는 철학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또한 응도당은 1880년 이건 당시에는 1669년 완공된 돈암서원원정비와 함께 구 돈암서원에 머물러 있었다.

필자는 여기에서 의구심을 품었다. 응도당이 건물이 크기 때문에 옮기지 못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왜 원정비도 그대로 두었을까? 양성당은 원래 아한정 자리, 즉 물가에 위치하여서 물이 차오르자 양성당과 사당, 입덕문, 전사청 등 서원의 기본적인 구성건물은 이전하고 응도당과 원정비를 두고 훗날 다시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후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고 1911년에 호남선철도가 서원자리를 관통하고 지나가며 서원을 훼손하였다. 조선이 망한 것은 서원이나 향교 등 유림들이 사색당파를 만들어서 당파싸움에 치중하였기 때문이라는 식민지사관에 입각한 교육을 시키며 형편없이 우리나라 교육을 폄하하였다.

그러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와중에도 1923년 1924년에 황강전서, 사계전서, 신독재전서 등을 제작하며 1926년에는 그 목판들을 보관할 장판각을 건립하였다.  1925년에는 구서원 자리에 있던 원정비를 이전해오고 1950년 고운사에 있던 정회당을 옮겨오며 서원의 기틀을 유지했다. 해방후, 한국전쟁의 회오리 속에 혼란하여 여유를 갖지 못하다가 1971년도에 가서야 응도당을 현 위치로 옮겨옴으로서 돈암서원 이전의 대장정이 끝나게 된다.


지역민 합심의 ‘완전성’으로 강학 강화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돈암서원의 건축적 배치는 변화되었으나, 예학을 이어가는 정신적 가치는 이건을 통하여 더욱 공고하게 유지되었다.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선현의 뜻을 이어나가고자 충청도 지역민과 유림, 문중에서 자금을 마련하였다. 서원의 건물들이 물리적으로 홍수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안전한 현재의 자리로 서원을 옮겼다.

치수는 나라에서도 어려운 일인데도, 지역민이 합심하여 서원을 지켜낸 노력이야말로 진정한 완전성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돈암서원은 산세가 험한 곳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평지에 위치하여 개발 압력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이러한 여건 하에서도 서원의 원래의 뜻을 이어나가기 위한 지역 유림과, 문중의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김장생 선생은 임진왜란, 정묘호란이라는 양란을 겪으면서 가치관과 윤리의식이 혼란에 빠져 조선사회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음을 경험하였다. 이 해결방안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덕목을 재정립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예학 연구와 실천 가능한 예학규범을 수립하여 조선의 재건에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하였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또 다시 가치관과 사회의 혼란스러움이 엿보이자 예와 정신적 가치가 부각되었고, 옛 선조들의 지혜를 배우고자 하는 노력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돈암서원은 한국을 대표하는 예학의 산실로서 정신적 가치의 전승에 중심에 있다. 앞으로도 현대에 맞는 강학활동이라는 선진적 역할을 수행하여 김장생 선생과 충청도 지역의 뜻 있는 조상들의 가치를 대대로 이어갈 것이다.

이에 돈암서원은 유치원과 초등생 중고등학생들에게 인성교육을 통한 가정과 학교 국가에 충성하는 효 교육을 수행하고 있다. 400년 전에 우리선조들이 하셨던 고민을 계속해서 현대에도 고민하고 있다. 내년을 목표로 유네스코 등재를 준비하면서 돈암서원은 앞으로 대한민국의 인성교육을 책임져나갈 선두서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


김선의(기호문화유산활용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