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노트] 광석 당디노인회장 손동남 (孫東男)님 "내 한몸 으스러져 가족들 편해진다면야~"

놀뫼신문
2019-05-07

[광석 당디노인회장 손동남 (孫東男)님의 인생노트]

내 한몸 으스러져 가족들 편해진다면야~


장염으로 며칠 입원했을 때 그리셨다는 복사꽃은 활짝 피어 있다. 연분홍빛이 가득한 화폭에 나비들이 날아올 것 같다. 평생 동안 식구들에게 등 내주며 살아오신 손동남 어르신! 그 표정과 그림을 보노라니 향 가득한 봄볕 찾아와 꽃망울을 터뜨리는 듯하다. 8순에도 노인회장직을 척척! 만년 청춘이시다. 

한글 대학 2019년 졸업사진


손동남(孫東男) 

  •  1940년 : 부여 남면 송암리 출생(2남 2녀 막내)
  •  1961년 : 안병흥(24살) 님과 결혼
  •  1962~67년  : 2남 2녀 출산
  •  2014년~ 현재: 광석 당디 노인 회장
  •  거주지:  광석면 신동1리 


“변소 깐에 빠져 죽은 줄 알았다, 대체 똥 싸러 가면 나올 줄을 모르는구나.” 외숙모 잔소리가 쏟아졌다. 그때가 열한두 살 때였다. 아는 글자를 찾아 읽어 볼 수 있는 곳이 냄새나는 그곳밖에 없었다. 글자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있던 때였다.


엄마 따라간 동생


엄마는 내가 4살 때 동생을 낳고 산후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돌아가신 엄마에게 마지막 얼굴을 보인다고 날 엄마 누워 계신 방으로 데려갔는데, 그 모습이 무서워 울며 도망 나왔던 것 같다. 그리고 뒷산으로 올라가던 들것상여가 기억이 난다. 엄마는 그렇게 일찍 세상을 뜨셨다. 

갓난이 동생은 큰오빠가 업어 키웠다. 아버지는 일하러 다니시고 동생은 오빠 차지였다. 오빠는 우는 갓난아기를 업고 달래다가 답답하면 밤중에도 엄마 산소에 갔다고 했다. 사는 마을도 산골인데 엄마 산소는 높은 산 위에 있었다. 쌀 암죽까지 끓여 먹인 오빠 정성에도 동생은 엄마를 따라갔다. 

외할머니는 딸만 둘이었다. 외가에서 함께 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행랑채를 얻어 나왔다. 목수인 아버지는 늘 일을 나가셨고, 위로 언니와 오빠 둘이 있었지만 자주 혼자 있어 무서워 울었다. 울고 있으면 옆집 아주머니가 업어주고 밥도 주면서 달래주었다.

오빠가 결혼해 식구가 늘자 아랫동네 공회당에 붙은 집으로 이사했다. 올케 구박이 심했다. 작은오빠까지 동생인 언니랑 나를 힘들게 했다. 언니는 11살쯤 견디다 못해 가출했고, 지금까지 소식을 모르고 산다. 그때 언니를 찾지 않은 오빠나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언니가 가출하기 전에 같이 먼 곳에 있는 논으로 새 보러 다녔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은 학교에 갔던 것 같다. 한번은 아이들이 버린 노랫말이 적힌 종이를 주웠는데 글자도 모르면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글씨를 한 자씩 짚어보기도 했다. 동네 언니들이 소년단이라고 자랑하며 부르던 노래였다.


아버지 재혼과 서모 구박


공회당으로 이사 와 살면서 아버지는 아랫집 과부와 정이 맞아 살림을 시작했다. 같이 살던 큰오빠 내외는 옆 마을로 살림을 나고 나도 따라갔다. 전 남편과 사별한 서모에게 딸 둘에 아들이 하나 있었다. 한집에 살기가 그랬던지 나를 오빠 집으로 보냈다. 조카를 봤는데 툭하면 올케는 조카를 업혀 아버지 집으로 보냈다. 그러면 서모는 다시 나를 오빠 집으로 가게 해 아이를 업고 중간에 오도 가도 못했던 일이 많았다. 

올케가 줄에 널린 태모시를 걷어오라고 해서 몰래 들고 나오다 아버지한테 들킨 일이 있다. “올케가 시켰어요” 말하고는 도망쳐 나왔다. 그 뒷일을 모르지만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시아버지가 삼아 논 태모시를 팔아 쓰려 했으니 말이다. 

서모 구박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나가시면 얼굴빛과 말투가 달라졌다. 아버지는 내가 힘든 걸 전혀 알지 못했다. 애를 업고 있다 넘어져 다리를 다쳤는데 등에 업은 아이를 데려가면서 애 업고 넘어졌다고 나를 혼냈다. 애들도 눈치가 있어 손위인 나를 쉽게 대했다. 설거지하고 솥을 씻으려고 솥뚜껑 여는 소리가 나면 귀신처럼 부엌으로 들어와 누룽지를 다 퍼먹고는 갔다. 난 그 누룽지가 무척 먹고 싶었다. 서모가 동생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는데, 옆에 있는 내가 먼저 알아들으면 화를 냈다. 난 학교 문 앞에도 못 갔는데 그 동생들은 다 학교에 다녔다. 아들은 대학까지 보냈다. 그래서 서모가 더 미웠다.

목수 일을 하다가 지붕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친 아버지가 태모시를 삼아 그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쳤다. 아버지가 나이 들고 도움이 필요할 때 서모는 자리 잡은 자식들을 따라가 연락도 끊었다. 

혼자 된 아버지가 집에 오신 적이 있다.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때인데 나흘이나 주무시고는 가실 생각을 안 하셨다. 등 떠밀듯 가시게 했다. “느 올케가 해주는 밥은 데서 먹을 수가 없는디 느네 밥은 찰밥 같다.” 하시는 아버지를 보내면서 가슴 아파서 엄청 울었다. 어쩌다 친정에 가면 아버지 방에서 역한 냄새가 났다. 다리가 불편해 요강을 방안에 놓고 있었는데 자주 비워드리지 않아 지저분했다. 그 방에 놓인 물기 없는 반찬, 식은 밥상을 보고 목이 메여 울던 생각이나 더 눈물이 났다. 


화장실에서 한글 떼다


 9살이 되던 해 이종 올케 집에 애보기로 갔다. 아이를 예뻐해서 잘 봤던 모양이다. 일을 잘한다고 일 년 후에는 외갓집으로 불려가 심부름도 하고 외사촌 동생들도 보살폈다. 농사가 많아 늘 일꾼들이 북적이는 탓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한 이 년쯤 지나고 떼를 써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이 없던 외할아버지가 양아들을 들였으니 양외삼촌이다. 양외삼촌이 나를 데리러 와서 선 품삯으로 아버지한테 논 두 마지기를 주었다. 

 다시 외가살이를 하게 되었다. 외가는 논이 150마지가 넘고 산이며 밭농사까지 있는 부농이었다. 큰살림에 아이 키우기가 힘든 외숙모는 내가 잠시 보이지 않으면 난리였다. 노름 뒷돈을 대주던 삼촌도 나를 찾기는 마찬가지였다. 노름 돈이 오갈 때 그 돈을 숙모 몰래 내게 맡겨야 했으니 말이다. 삼촌이 내게 연필하고 공책이라도 사줘 읽고 쓰게 하라고 말해도 숙모는 들은 체도 안했다. 학교 다닐 그 시기에 외갓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사촌 동생들 치다꺼리로 시간을 보냈다. 글을 배우고 싶었지만 혼자 편히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변소에 있는 시간뿐이었다. 그래서 변소에 가면 글을 찾아 읽다가 늦어 늘 혼이 났었다. 그렇게 한글을 떼 글을 읽고 받침 없는 글자는 쓸 수 있다. 

그때는 배고픈 사람들이 많았다. 일꾼들 밥을 할 때 많이 해서 남는 밥을 일꾼들에게 들려 보내고 누룽지를 만들어 담 너머 이웃을 챙겼다. 그 버릇이 있어선지 지금까지 인색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고 산다.


약혼사진

군인가기 전 기념사진


자장면 한그릇 안 사주던 총각....


 스무 살이 되던 해 사촌 올케가 중매를 넣어 오빠가 다녀오고 시어머니 자리가 다녀가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사주가 왔다. 신랑 얼굴도 못 보고 일 년이 지났다. 친구들은 ‘신랑 얼굴도 못 보고 소박맞았다’고 놀렸다. 

그러다 연락이 왔다. 추석에 만나자고 했는데 다시 연락이 없어 약속 장소에 가지 않았다. 혼자 기다리다 늦은 저녁에 그 산골로 신랑이 찾아왔다. 다음 날 20리 밖에 있는 규암까지 걸어가 약혼 사진을 찍었다. 참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자장면 한 그릇도 안 사주고 뒤도 안 보고 갔다. 둘이 갔던 20리 강둑길을 혼자 걸어 돌아왔다.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속상해 한마디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어?”하고.

딸 셋에 아들 하나 둔 홀시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애착이 컸다. 시집와 삼 일째 되던 날 어머니는 아이고 땜을 놓고 우셨다. 그 뒤로 아래 윗방에서 샛문을 열어 놓고 살았다. 

큰아들을 낳고 사흘 만에 남편이 군대에 갔다. 일 년 만에 남편이 휴가를 나왔는데 밤 한 시에 온 신랑은 안방으로 가서는 건너오지 않아 밤을 꼬박 새웠다. 참 야속했다.

시누 셋 중 큰 시누는 시집을 갔고 둘째는 직장에 나가 막내만 같이 살았는데, 막내 시누가 문제였다. 집안에 둔 돈이 없어지는 거였다. 나를 의심하는 시어머니는 시집살이를 맵게 시켰다. 돈이 없어진 일 때문에 시누랑 머리채를 잡고 다툰 적이 있다. 내 머리가 한 움큼이 빠졌다. 남편에게 보여주려고 책갈피에 넣어두었는데 보여 줄 수가 없었다.

시누 도벽은 같이 자취하던 이종사촌 돈에 손을 대 탄로가 났다. 고등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시어머니도 시누 손버릇이 나쁜 것은 아셨을 텐데, 돌아가실 때까지 한 말씀도 없으셨다. 지금도 그 일이 서운하다.

창피한 이야기 하나 해야겠다. 스무 살 먹도록 아는 게 없었다. 외갓집에 살면서 주는 밥에 주는 옷으로 살다 보니 돈을 써 본 일이 없었다. 혼수로 옷이랑 이불은 외숙모가 준비해 줬지만 돈 한 푼을 주지 않아 빈손이었다. 시집와 이튿날 몸이 이상했다. 손님이 온 것이다. 그런데 서답을 준비하지 못했다. 돈도 없어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때 엄마 없는 설움에 많이 울었다.

 

남편이 약혼 전 보내온 사진  

처녀때 찍은 사진

결혼40주년에 꽃선물 받고

고희연


손금 보는 할머니 말대로~


남편이 제대하고 온 후, 둘째인 딸이 태어나고 바로 셋째 딸이 연년생으로 태어났다. 집안 살림도 식구가 느는 만큼 성실하고 부지런한 남편 손끝에서 불어났다. 그래도 논을 사는 동안 먹을 거 입을 거 아끼고 텃밭에서 나는 채소로 돈을 만들어 살림살이하는 일은 내 일이었다. 고구마, 열무 같은 채소를 이고 논산까지 걸어가 팔았는데 잘 못해 돈이 적어도 장사꾼에게 넘기고 오는 일이 많았다. 논농사는 늘어도 쌀 구경은 어려웠다. 빚으로 논을 사는 일이 반복 되다보니 이자며 원금을 갚느라 아이를 낳고도 고구마 밥을 먹었다. 제대로 젖이 나오지 않았다. 젖이 모자라도 울지도 않고 순해 네 아이를 키우면서 농사일을 할 수 있었다. 막내는 일하다 들어와 젖을 물릴 때까지 주먹을 빨며 놀았다. 

큰아들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아침마다 따라갔다. 남편이 바쁜 일 팽개치고 학교만 간다고 잔소리해도 선생님 이야기 듣는 재미에 한동안 같이 다녔다. 성질 급하고 무심한 신랑에 시어머니 시집살이는 식지 않았지만 참고 살았다. 엄마 없는 고된 삶을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이 날 붙잡았다. 그래도 힘들어 둘째 딸을 업고 강경에 있는 손금을 보는 집에 갔었다. 할머니가 “마흔 살이 넘어야 혀. 그때까지 참고 살아, 그러려면 덕을 쌓아야 해.”라고 했다. 신기하게 큰시누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더니 시누들이 다 따라갔다. 그 뒤 시어머니도 가셨다. 나이 마흔한 살 때다. 손금 보는 할머니가 제대로 맞춘 것이다. 

그 뒤 서너 번 집에 오셨던 어머니는 내가 쉰다섯 되던 해에 나오셔서 앓으셨다. 평소 드시던 혈압약을 끊으신 걸 나중에 알았다. 주무시다 뇌졸중이 와 돌아가셨다. 일흔 다섯에 돌아가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른 나이다. 미국 생활이 힘들어 집에 오고 싶어 하셨는데 연금 때문에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지 못하게 했다. 벼룩이 서 말도 더 될 막내시누 짓이었다.

 

예수님을 믿게 되다


막내 밑으로 아이가 생겼다. 하혈이 심해 낙태 수술을 받았는데 자궁에 혹이 있어 재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농사일이 바빠 수술을 미루고 있었다. 교회 목사님이 “논산에도 좋은 의료장비를 갖춘 병원이 있으니 그곳에 가보자”며 추수하는 논까지 쫓아오셨다. 추수하다 말고 쌀 한 말을 이고 나왔다. 쌀을 팔아 병원에 갔다. 마침 의사 선생님이 병원 옥상에 나와 계셨는데 의사 가운이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이 예수님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해졌다. 오후 7시에 수술을 받고는 열두 시가 넘어 마취에서 깨어났다. 지금처럼 무통제가 없어 까무러질 만큼 아플 때 마취제를 놔줬다. 주사를 맞고 비몽사몽 중에 예수님 옆모습을 보았다. 그때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그런 체험을 한 후 믿음 생활을 열심히 했다. 

교회에 가지 않는 남편은 일요일이면 일을 잡았지만, 신기하게 일을 잡은 일요일이면 비가 와 주일을 지킬 수 있었다. 남편이 교회를 못 가는 이유가 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일찍부터 일을 해야 했다. 학교에 갈 수도 없었고 따로 공부할 기회도 없었다. 장성해서는 그냥 글을 피하거나 필요한 장소에 가지 않아 글 모른다는 것을 남들이 모르게 하고 살아왔다. 평생소원이 있는데, 남편한테 편지 한 통 받아보고 나도 보내보는 것이다.


입원해서 그린 그림


할일 웬간히 한 거같은 80인생


애들을 많이 업어 키웠다. 이종 올케 아이부터 외사촌 동생들, 오빠네 아이들, 서모가 데려온 동생까지 업어 키웠다. 사정이 어떻든 아이들이 참 예쁘고 좋았다. 시집와서 큰시누 아이를 맡아 키었는데 작은시누까지 애를 데려왔다. 거기에 작은집 살림을 하신 시아버지가 둔 보지도 못한 시동생이 찾아와 애 둘을 맡기고 갔다. 우리 애들 말고 넷을 더 키웠다. 씻고 먹이고 품어 재웠는데 학교 갈 나이에 다들 엄마 따라 간 후로는 소식도 없다. 

나를 힘들게 하던 올케도 돌아가시기 전 15년 동안 조카들 대신 옆에 모시고 살았고 미워했던 오빠들 묘도 내 손으로 이장해 가꿔줬다. 잘 살던 외갓집도 몇 년 전에 가보니 집터에 잡초뿐이고 외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도 봉분까지 무너진 채 있었다. 물어물어 찾은 묘에 비석이 남아 있어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내년 윤달에는 산 임자가 허락하면 산소를 손봐 드리고 싶다.  

내 할 일을 어지간히 해 놓은 것 같다. 아이 넷은 잘 자라 아들들은 공무원이고 딸들은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다들 효자·효녀다. 무뚝뚝하던 신랑도 이젠 잘한다. 결혼 40주년이라고 한복 입고 나오라고 하더니만 꽃을 한 다발 안겨 주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고맙다”며 사진까지 크게 찍었다. 이런 날이 올 줄 어찌 알았겠냐.

이젠 몸만 안 아프면 좋겠다. 한글 대학에 나와 어려운 글자를 배워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고 생전 처음 내 화첩에 그림을 그려보는 것도 좋다. 예쁜 꽃을 꺾어다 놓고 보고 그리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늦게까지 앉아 있을 때가 많다. 걱정 없이 숙제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


- 유환숙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