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노트] 청동리 이화자(李花子)님 "셋째딸 이·화·자 일생, 지화자 좋을시고~♪"

놀뫼신문
2019-04-23

[청동리 멋쟁이 이화자(李花子)님의 인생노트]

셋째딸 이·화·자 일생, 지화자 좋을시고~♪


꽃을 좋아한다며 가족들을 꽃에 비유하신 이화자(李花子) 님의 이름에도 꽃을 뜻하는 ‘花’자가 들어간다. ‘花’자는 풀초 아래에 변화를 의미하는 ‘化’자가 놓여있는데 봉우리에서 활짝 피어 향기를 전하다가 갑자기 지는 꽃과 가장 잘 어울리는 글자가 아닌가 싶다. 어디 꽃만 그러한가. 우리들의 삶도 그러하다. 누구의 삶이든 한 번은 활짝 피고 또 숙명처럼 지게 마련이다. 세상에 아름답지 않고 쓸모없는 꽃이 없듯이 모든 이의 삶은 아름답고 의미가 있다. 아프다고 말씀하시는 이화자(李花子) 님의 삶도 아름답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큰 사랑으로 인해 겪은 아픔이 또 다른 큰 사랑으로 치유되길 바라본다. 


이화자(李花子)

  • 1943년 연산면 청동리 출생
  • 1950년 연산국민학교 입학(42회 졸업생으로 졸업)
  • 1965년 중매로 결혼(23세)
  • 1966년 – 1974년 3녀 1남 출산


결혼식


나는 1943년 8월 21일 논산시 연산면 청동리 163번지에서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딸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은 가난하지도 부자도 아니었지만, 제 위로 언니가 둘 아래로 여동생이 둘, 저까지 딸이 5명이라 동네 사람들에게 ‘딸부잣집’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모님도 가끔 “다섯 중에 하나라도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은 우리 모두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9살짜리가 본 6·25 


9살이 되던 해에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동네의 다른 집들은 모두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집에서 기르던 소와 농사를 내팽개치고 갈 수 없다”고 “동네에 그냥 남겠다”고 하셨습니다. 작은아버지가 아버지를 설득하러 집에 들르셨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우리 자매들만 작은아버지 편에 피난을 보내셨습니다. 작은아버지와 간 곳은 양촌 어디쯤이었습니다. 딸들이 피난을 떠난다고 아버지는 우마차에 쌀이며 필요한 것들을 잔뜩 챙겨주셨습니다. 잠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조금 옮겨 다니며 나무 밑같이 밖에서 자기도 했지만, 어려서 그랬는지 그게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보름쯤 지났을까 작은아버지가 그냥 마을로 돌아가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작은아버지를 따라 다시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큰 난리가 났다고 했지만, 동네는 어디 하나 부서진 곳 없이 멀쩡했고 집에 있던 쌀 한 톨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다시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동네에 조용히 인민군들이 들어왔습니다. 아랫집에 할머니 혼자 살고 계셨는데 인민군들은 할머니에게 집을 달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인민군에게 집을 내주고 셋방살이를 하셨습니다. 할머니의 집을 차지한 인민군들은 집 뒤에 큰 굴을 팠습니다. 그리고는 밧줄에 묶어 사람들을 데리고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밧줄에 묶인 사람들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동네의 큰 나무 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면 비명 같은 소리가 동네에 다 들릴 정도로 크게 났습니다. 어려서 무서운 것을 몰라 그랬는지 그 소리가 싫어서 친구들과 쫓아가서 “그러지 말라”고 인민군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인민군들은 우리가 어린애여서 그랬는지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이가 어릴 때여서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인민군들은 동네 사람들에게는 일절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있다가 동네에 들어올 때처럼 조용히 다 떠났습니다.


친구와 함께

동네에서 친구와 함께


연산초등학교 42회 졸업생


학교에 들어간 것은 8살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우리 자매들을 모두 학교에 보내주셨습니다. 8살에 연산국민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2학년 때 6·25가 나는 바람에 두 해 정도를 쉬었습니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학생을 모집한다고 해서 학교에 갔습니다. 공민반이라고 야간반을 운영했는데 그 동안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사람들이 전부 학교로 모였습니다.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부터 나처럼 어린애까지 전부 모였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나이로 나눌 수 없으니 시험 같은 것을 봐서 학년을 정해줬습니다. 나는 내 이름도 쓰고 간단한 것들을 쓸 줄 알아서 그랬는지 4학년으로 보냈습니다. 4학년은 여자는 1개 반 남자는 2개 반해서 3개 반이 있었는데, 내가 다닌 여자 반은 56명이 한 교실에서 공부했습니다. 42회 졸업생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 말씀드렸다면 보내주셨겠지만, 특별히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때는 없었습니다. 


예쁜 게 좋아서


사실 그때는 공부보다 예쁜 것들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부모님은 “여자는 바느질과 음식을 잘해서 시집가면 시부모님을 잘 모시고 남편에게 잘하고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쳐주셨지만, 저는 그것보다는 예쁘게 꾸미는 것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기성복을 파는 가게가 없어서 옷을 맞춰 입던 시절이었는데, 값도 비쌌습니다. 다행히 집에 아주 큰 쌀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그 항아리에는 쌀이 세 가마니나 들어갔는데 쌀이 가득 찼을 때는 표시가 나서 건드릴 수가 없었지만, 중간 정도 먹을 즈음에는 쌀을 아무리 퍼내도 표시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때가 되면 어머니가 외출하기만 기다렸다가 쌀을 퍼서 몰래 내다 팔았습니다. 그렇게 만든 돈으로 예쁜 옷을 맞춰 입었습니다. 또 가을 추수가 끝나고 나면 아버지께서 용돈을 조금 주셨는데 그 돈으로도 화장품과 옷, 구두를 샀습니다. 그래서 예쁘게 화장도 하고 하얀 하이힐을 신고서 친구들과 놀러 다녔습니다. 

그러다 한번은 어머니께 걸려 크게 혼이 났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부모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다시 예쁜 옷을 입고 예쁜 신발을 신고 싶은 마음이 다시 커졌습니다. 때마침 어머니께서 친척 집을 방문할 일이 생기셔서 5일 동안 집을 비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집을 비우자마자 양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서 동네 친구들과 꽃구경도 하고 산으로 바다로 돌아다녔습니다. 놀러 다니는 것이 재미가 있어서 제 생각보다 집에 일찍 도착한 어머니가 저를 찾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집에 없는 저를 찾았고 언니들은 어머니께 사실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셨습니다. 저는 너무 무서워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작은아버지 댁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작은어머니는 말없이 저를 집에 들이시고 저녁을 차려주셨다가 밤이 되자 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 제 편이 되어 얘기를 잘 해주셨습니다. 그때 작은어머니가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평생 아들노릇도 하려 했으나 


시간이 흘러 제 위의 두 언니가 모두 결혼을 했습니다. 부모님은 다음이 제 차례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언니들이 평소에 제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 참 좋겠다고 자주 말하기도 했었지만, 저 역시 아들이 없는 부모님과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루는 부모님이 “괜찮은 사람이 있으니 선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절대로 선을 볼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리고 제 방으로 돌아와서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그 정도로 결혼해서 부모님을 떠난다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봄날 부모님께서 서울에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당숙모께서 동대문 시장에 가게를 열었는데 너무 바빠서 도와줄 일손이 필요하다고 연락이 왔으니 저에게 잠깐 도와주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며칠만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드리고 연산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지금은 서울까지 2시간 정도면 가지만 그때는 아침에 출발해서 서울에 도착했을 때가 오후 7시였습니다. 계속된 연착에 오랫동안 기차역에서 기다리신 당숙모를 따라 당숙모의 집으로 갔습니다.

당연히 당숙모의 가게 일손을 돕기 위해서 서울에 온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룻밤 자고 났더니 다음 날 아주머니 두 분과 남자 한 분이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저는 무슨 일인지 잘 몰라 어리둥절해 있었는데 얼마 후에 사촌 언니 내외분과 사촌 오빠 내외분도 집으로 오셨습니다. 알고 보니 가게 일을 도와달라는 것은 저를 서울로 오게 할 핑계에 불과했습니다. 당숙모께서는 “부모님과 다 상의 된 일이니 신랑감 얼굴이나 잘 봐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제 앞에 한복을 내놓으셨습니다. 

아들 대신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살겠다 마음먹고 결혼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저는 눈물만 흘렸습니다. 어른들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고 한복으로 갈아입고 남자가 있는 방으로 건너갔는데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눈물이 계속 흘러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당숙모께서 그런 저를 보고 “남편 될 사람인데 고개 좀 들라”고 하시는 통에 저는 살짝 눈만 들어 남자를 슬쩍 보았습니다. 낯선 사람이라서 그런지 방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마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이 되니 당숙모께서 저에게 약혼 사진을 찍으러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딱 한 번, 잠깐 본 남자와 약혼 사진을 찍으라니 저는 너무 싫어서 “가지 않겠다”고 솔직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당숙모는 노발대발하시며 “잔소리 말고 어른들이 정한 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더는 어쩌지 못하고 그렇게 저보다 7살이나 많은 남자와 한 번 만나고 약혼 사진을 찍었습니다. 


약혼식 사진

자식들이 어렸을 때


혼자 월남한 남자 받아들이다


약혼 사진을 찍고서야 저는 연산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제 방에 틀어박혀 울기만 했습니다. 제가 방에서 계속 울기만 하자 아버지는 “딸 하나 생병으로 죽겠다. 시집을 다시 못 보내도 할 수 없으니 약혼을 깨자”고 하셨습니다. 지금이야 마음이 안 맞으면 이혼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시대지만, 당시에는 파혼만 해도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고 평생 다시 시집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는 저 때문에 부모님이 동네에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모님께 “결혼을 받아들이겠다”고 말씀을 드리고는 수돗가에 가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였습니다. 방에 들어와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어차피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 여자의 운명인데 부모님을 상심하게 하는 불효자식이 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렇게 결혼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날을 잡으러 다니시는 것 같더니 저에게 1965년 3월 30일 이틀 전에 서울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서울의 아현동, 어느 작은 결혼식장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하던 날은 아침부터 비가 왔습니다. 내리는 비가 제 마음을 대신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얀 너울을 쓰고 장사를 하던 사촌이 가져온 진주 목걸이를 하고 꽃다발을 들고 하객들의 축하 속에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신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첫날 저녁 저에게 “먼 충청도에서 서울까지 결혼식을 하러 올라오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고향은 이북 개성인데 어느 날 어머니가 친정에 제사를 지내러 다녀오겠다고 집을 비우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틀 뒤에 6·25 전쟁이 일어났고 다른 집들은 모두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집에서 돌아오지 않은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기다리던 어머니 대신 기별이 왔는데 “길이 막혀서 집으로 가지 못하고 있으니 큰아버지를 따라서 먼저 피난을 가라”고 하셨답니다. 그길로 혼자서 큰아버지를 따라 서울 용산으로 피난을 왔는데 당시 16살이었던 남편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입고 있던 교복과 체육복 한 벌뿐이었고 가족들과는 다시 만나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이야기를 마치고 “결혼해 주어서 고맙다며 언짢은 일이 있어도 서로 이해하며 살자”고 했습니다. 솔직한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니 남편이 한없이 가엾게 생각되면서 원치 않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생각은 없어지고 남편에게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희동에 마련한 집 떠나 연산으로 


남편은 열심히 직장을 다녔고, 저는 집에서 살림을 맡아 했습니다. 결혼한 이듬해 첫 딸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친정의 도움을 조금 받아 첫째 딸이 두 돌 되던 해에 마포구 연희동에 작은 집도 마련했습니다. 처음 집을 장만하고 나니 세상에서 나만 집이 있는 것 같이 너무 기뻤습니다. 그 집에서 둘째 딸과 셋째 딸을 낳았고 네 번째로 아들을 얻었습니다. 딸들도 예뻤지만 어릴 때부터 여자 형제만 있었고 딸을 세 명 낳고 난 뒤에 얻은 아들이라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부모님이 연로해지시면서 저에게 “연산에 내려와서 같이 살자”는 뜻을 전해오셨습니다. 서울까지 찾아오셔서 “아이들이 시골에서 공부해도 장관도 되고 국회의원도 될 수 있다”며 저희 부부를 설득하셨습니다. 남편과 저는 상의 끝에 연희동 집을 세주고 연산으로 내려와 부모님을 모시고 살기로 했습니다. 살림을 대강 정리해서 내려와 연산에서 살기 시작한 지 10년 정도가 지나서 아버님은 79세에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83세에 돌아가셨습니다. 


대못 되어 가슴에 박힌 아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두 딸은 결혼했고 아들은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걱정 없이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들이 그저 조금 다쳤다”고 했습니다. 떨리는 가슴을 안고 병원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더니 조금 다쳤다는 아들이 침대에 싸늘한 시체로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아들이 27살이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는 링거를 꽂고 있었고 옆에서 큰딸과 언니들이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일이 충격이 되어 저는 우울증이라는 병을 얻었고, 점점 심해져서 밤과 낮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병이 깊어져만 갔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아들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에 세상을 등지려는 시도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10년 동안을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살다가 망가진 내 몸과 남은 가족들을 보고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세 딸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게 되었지만, 아직도 아들을 생각하면 마음에 대못이 박힌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남편과 캄보디아 여행가서


할미꽃되었지만, 여전 멋쟁이 아가씨


술을 너무 좋아해서 내 속을 썩이기도 했던 남편은 2015년부터 2년을 투병하다 81세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 내 곁에 남은 것은 목련 같은 첫째 딸, 난 같은 둘째 딸, 장미꽃 같은 셋째 딸뿐입니다. 저는 이제 할미꽃이 되었습니다. 되돌아보면 파란만장한 세월을 산 것 같습니다. 내 삶을 되돌아보면 아가씨 적이 참 그립습니다. 하지만 되돌아갈 수 없으니 앞으로 사는 동안 큰 죄 짓지 않고 예쁘고 곱게 나이 들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지금은 동네 사람들과 재미있게 지냅니다.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공부하는 것이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하셔서 한글대학에서 같이 공부도 합니다. 모두 오래 알고 지내서, 옛날에 있던 이야기도 재미있게 합니다. 아직도 예쁘게 화장하고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장난삼아 나를 ‘청동리 멋쟁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 말이 싫지 않습니다. 끝으로 언제나 위로가 되어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세 딸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 홍미경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