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5·18 민주화운동]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 국가가 국민에게 총을 겨눴던 그날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을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 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44년 전인 1980년 5월 27일 새벽 2시 30분, 전남도청 1층 상황실 옆 방송실에서 시민군 상황을 마지막까지 알리던 박영순씨의 목소리다. 당시 그녀는 송원대학교 유아교육학과 졸업반이자 광주여고, 전남여고 가야금 교사였다.
방송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계엄군에 체포되어 상무대 보안실에서 두 달 넘게 조사를 받으며 온갖 고초를 겪었다. 박영순씨는 재판에 넘겨져 1년 실형 선고를 받고 6개월 복역하다가 형 집행 면제로 출소했다. 당시 그녀의 죄목은 ‘계엄법 위반’과 ‘내란부화수행’이었다.
출소 후 그녀는 광주를 떠났다. 가명으로 살며 철저하게 5월 광주를 지우고 살았다. 1987년 사면복권을 받았고, 2016년 재심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현장으로 기억되는 ‘전일빌딩245’
‘계엄군의 총격은 무장한 시위대를 향한 자위권 발동이 아닌, 무차별적이고 비인도적인 범죄행위’라고 5·18 당시 헬기사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전일빌딩’은 말하고 있다.
광주천 불로교에서 헬기사격으로 인한 물기둥을 목격한 배 모씨, 호남동 성당에서 헬기사격을 목격한 조비오 신부, 양림동 자택에서 헬기사격 장면을 촬영한 아놀드 피터슨 목사, 광주기독병원에서 헬기사격을 목격한 최 모 간호사 등의 많은 사람들이 1980년 5월 21일과 27일 “헬기사격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245개의 탄흔, 전일빌딩]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계엄군은 금남로에 운집한 수만 명의 광주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했다.
이로 인해, 54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계엄군의 총탄을 피해 흩어진 시민들은 곳곳에서 시위를 이어갔고, 이를 해산시키기 위해 계엄군은 무장헬기까지 출격시켜 광주천변에 위험사격을 가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개시되었다. 이에 맞서 시민군은 도청에서 마지막 항전을 대비했다.
계엄군은 도청 옆 전일빌당 옥상에 LMG가 있었다는 잘못된 첩보로 급히 무장헬기를 출동시켰다. 이런 사실들은 보다 구체적으로 군(軍) 문서에 담겨져 있다.
이렇게 무차별한 헬기사격의 가장 명확한 증거는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245개의 탄흔>이다. 탄흔을 감사한 국과수에서는 “바닥에 내리꽃힌 형태의 탄 자국은 공중에서 쏘지 않고는 생길 수 없다”고 밝혔다.
또한, 당시 주변에는 전일빌딩보다 높은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헬기에 의한 공중사격이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와같이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현장으로 기억되는 전일빌딩은 2011년 광주광역시 도시공사에서 매입해 2017년 5·18사적지 제28호로 지정하고 2020년 평화와 인권 그리고 민주의 보편적 가치를 품는 기념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 5·18민주화운동 그날의 기억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유신정권은 종말을 맞이했고, 채 2개월도 지나지 않은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위시한 군내 강경파는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1980년 5월 17일]
정부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전국 31개 대학에 계엄군을 배치했다.
[1980년 5월 18일]
전남대 교문에는 완전 무장한 7공수여단 33대대가 교문을 통제하고 학생들에 대한 귀가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300여 명의 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는 조금씩 조직적으로 변해갔고, 오후 3시경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도주하는 학생들을 쫓아 진압봉을 휘둘렀다. 그렇게 작전명 <화려한 휴가>라는 유혈극은 시작되었다.
[1980년 5월 19일]
19일 광주는 여느 때와 같았지만,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전 지역에 걸쳐 군인들이 삼엄한 경비를 섰고, 오전부터 금남로에 모인 시위자는 첫날과 달리 학생이 아닌 시민이 대다수였다.
[1980년 5월 20일]
무혈 진압을 명령했던 공식적인 계엄군 상급지휘자 정웅 소장은 소외됐고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현지부대를 지휘하면서 계엄군 내에서도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은 총 3,400명에 달했다.
금남로는 최루탄으로 자욱했고 운수노동자들은 영업을 중지하고 200여 대의 자동차로 시민들의 투쟁대열에 동참했다. 그때부터 광주항쟁은 전면적인 민중봉기의 성격을 띤 것으로 변모했다. 그날 밤, MBC, KBS 방송국과 세무서가 불에 탔다. 이렇게 시위가 격렬히 확대되자 軍은 시외로 통하는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21일]
그럼에도 시위는 끝이 날 줄 몰랐다. 21일 오후 1시 도청광장에 갑자기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에 맞춰 총성이 터졌다.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집단 발포가 시작된 것이다. 이에 시위대는 나주, 목포, 영암 등 시외로 빠져나가 무기를 탈취해 왔다. 그렇게 무장한 시민군이 탄생했고, 끝이 보이질 않던 계엄군은 퇴각했다.
[1980년 5월 22일]
시민들은 도청 앞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유지급 인사들은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했고 계엄사 측과 협상을 담당했다. 같은 날 학생 중심의 ‘학생수습대책위원회’도 만들어져 실질적인 대민업무를 맡았다.
계엄사가 요구조건을 수락하지 않고 무장해제를 요구하자, 수습위는 온건파와 강경파 둘로 갈라졌다. 이후 주도권은 무장해제를 거부한 강경파가 잡았다.
[1980년 5월 26일]
계엄군이 진출하고 있다는 연락이 오자, YMCA엔 시민군이 모였다. 그들은 주요 지점에 배치돼 다가오는 계엄군에 맞설 준비를 했다.
[1980년 5월 27일]
이날 새벽 ‘상무충정작전’이란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개시됐다. 새벽 서치라이트가 도청을 향해 비쳐지고 항복을 권유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폭도들에게 경고한다.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교전은 계속되었다. YMCA, YWCA, 계림초등학교 등은 빠르게 진압됐고, 도청을 마지막으로 최후의 항전은 끝이 났다. 작전 개시 1시간 반만이었다. 그로써 열흘간의 무장투쟁도 막을 내렸다.
한밤중의 적막을 가르며 애절한 목소리가 광주를 깨우고 있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을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이정민 기자
자료제공 5·18민주화운동기록관
[특집|5·18 민주화운동]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 국가가 국민에게 총을 겨눴던 그날
44년 전인 1980년 5월 27일 새벽 2시 30분, 전남도청 1층 상황실 옆 방송실에서 시민군 상황을 마지막까지 알리던 박영순씨의 목소리다. 당시 그녀는 송원대학교 유아교육학과 졸업반이자 광주여고, 전남여고 가야금 교사였다.
방송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계엄군에 체포되어 상무대 보안실에서 두 달 넘게 조사를 받으며 온갖 고초를 겪었다. 박영순씨는 재판에 넘겨져 1년 실형 선고를 받고 6개월 복역하다가 형 집행 면제로 출소했다. 당시 그녀의 죄목은 ‘계엄법 위반’과 ‘내란부화수행’이었다.
출소 후 그녀는 광주를 떠났다. 가명으로 살며 철저하게 5월 광주를 지우고 살았다. 1987년 사면복권을 받았고, 2016년 재심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현장으로 기억되는 ‘전일빌딩245’
‘계엄군의 총격은 무장한 시위대를 향한 자위권 발동이 아닌, 무차별적이고 비인도적인 범죄행위’라고 5·18 당시 헬기사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전일빌딩’은 말하고 있다.
광주천 불로교에서 헬기사격으로 인한 물기둥을 목격한 배 모씨, 호남동 성당에서 헬기사격을 목격한 조비오 신부, 양림동 자택에서 헬기사격 장면을 촬영한 아놀드 피터슨 목사, 광주기독병원에서 헬기사격을 목격한 최 모 간호사 등의 많은 사람들이 1980년 5월 21일과 27일 “헬기사격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245개의 탄흔, 전일빌딩]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계엄군은 금남로에 운집한 수만 명의 광주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했다.
이로 인해, 54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계엄군의 총탄을 피해 흩어진 시민들은 곳곳에서 시위를 이어갔고, 이를 해산시키기 위해 계엄군은 무장헬기까지 출격시켜 광주천변에 위험사격을 가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개시되었다. 이에 맞서 시민군은 도청에서 마지막 항전을 대비했다.
계엄군은 도청 옆 전일빌당 옥상에 LMG가 있었다는 잘못된 첩보로 급히 무장헬기를 출동시켰다. 이런 사실들은 보다 구체적으로 군(軍) 문서에 담겨져 있다.
이렇게 무차별한 헬기사격의 가장 명확한 증거는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245개의 탄흔>이다. 탄흔을 감사한 국과수에서는 “바닥에 내리꽃힌 형태의 탄 자국은 공중에서 쏘지 않고는 생길 수 없다”고 밝혔다.
또한, 당시 주변에는 전일빌딩보다 높은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헬기에 의한 공중사격이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와같이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현장으로 기억되는 전일빌딩은 2011년 광주광역시 도시공사에서 매입해 2017년 5·18사적지 제28호로 지정하고 2020년 평화와 인권 그리고 민주의 보편적 가치를 품는 기념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 5·18민주화운동 그날의 기억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유신정권은 종말을 맞이했고, 채 2개월도 지나지 않은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위시한 군내 강경파는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1980년 5월 17일]
정부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전국 31개 대학에 계엄군을 배치했다.
[1980년 5월 18일]
전남대 교문에는 완전 무장한 7공수여단 33대대가 교문을 통제하고 학생들에 대한 귀가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300여 명의 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는 조금씩 조직적으로 변해갔고, 오후 3시경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도주하는 학생들을 쫓아 진압봉을 휘둘렀다. 그렇게 작전명 <화려한 휴가>라는 유혈극은 시작되었다.
[1980년 5월 19일]
19일 광주는 여느 때와 같았지만,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전 지역에 걸쳐 군인들이 삼엄한 경비를 섰고, 오전부터 금남로에 모인 시위자는 첫날과 달리 학생이 아닌 시민이 대다수였다.
[1980년 5월 20일]
무혈 진압을 명령했던 공식적인 계엄군 상급지휘자 정웅 소장은 소외됐고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현지부대를 지휘하면서 계엄군 내에서도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은 총 3,400명에 달했다.
금남로는 최루탄으로 자욱했고 운수노동자들은 영업을 중지하고 200여 대의 자동차로 시민들의 투쟁대열에 동참했다. 그때부터 광주항쟁은 전면적인 민중봉기의 성격을 띤 것으로 변모했다. 그날 밤, MBC, KBS 방송국과 세무서가 불에 탔다. 이렇게 시위가 격렬히 확대되자 軍은 시외로 통하는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21일]
그럼에도 시위는 끝이 날 줄 몰랐다. 21일 오후 1시 도청광장에 갑자기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에 맞춰 총성이 터졌다.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집단 발포가 시작된 것이다. 이에 시위대는 나주, 목포, 영암 등 시외로 빠져나가 무기를 탈취해 왔다. 그렇게 무장한 시민군이 탄생했고, 끝이 보이질 않던 계엄군은 퇴각했다.
[1980년 5월 22일]
시민들은 도청 앞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유지급 인사들은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했고 계엄사 측과 협상을 담당했다. 같은 날 학생 중심의 ‘학생수습대책위원회’도 만들어져 실질적인 대민업무를 맡았다.
계엄사가 요구조건을 수락하지 않고 무장해제를 요구하자, 수습위는 온건파와 강경파 둘로 갈라졌다. 이후 주도권은 무장해제를 거부한 강경파가 잡았다.
[1980년 5월 26일]
계엄군이 진출하고 있다는 연락이 오자, YMCA엔 시민군이 모였다. 그들은 주요 지점에 배치돼 다가오는 계엄군에 맞설 준비를 했다.
[1980년 5월 27일]
이날 새벽 ‘상무충정작전’이란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개시됐다. 새벽 서치라이트가 도청을 향해 비쳐지고 항복을 권유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폭도들에게 경고한다.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교전은 계속되었다. YMCA, YWCA, 계림초등학교 등은 빠르게 진압됐고, 도청을 마지막으로 최후의 항전은 끝이 났다. 작전 개시 1시간 반만이었다. 그로써 열흘간의 무장투쟁도 막을 내렸다.
한밤중의 적막을 가르며 애절한 목소리가 광주를 깨우고 있었다.
이정민 기자
자료제공 5·18민주화운동기록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