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사업-스포츠 태권도의 발원지를 찾아서(1)
논산 수박희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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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산 연무는 우리 역사의 변천에 따라 주요한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곳이다. ‘무술을 닦는 곳, 연무(練武)’라는 뜻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역사적 실체가 존재해 있다.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글>, <아리랑>, <태권도>를 대한민국 3대 한류 문화브랜드로 지정했듯이 현재 태권도는 200여 개국에서 약 8천만 명 이상이 수련하는 ‘글로벌스포츠’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충청도 은진현과 전라도 여산군의 경계인 작지골(현 연무읍)에서 매년 7월 15일 양도의 백성들이 모여 수박희 승부를 겨룬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렇게 수박희 겨루기가 명맥을 이어오던 연무 작지골에서 태권도가 원조 한류의 첨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연무대 육군훈련소의 신병 태권도 교육 덕분이다. 이에 본지는 기원 전에서부터 육군훈련소 신병 태권도 교육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되짚어 봄으로써, 현 스포츠 태권도 발원지에 대한 역사적 실체를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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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박희(手搏戱)의 유래와 변천
‘수박(수박)’은 말 그대로 손으로 치는 맨손무술을 한자식으로 표현한 용어로서 수박·권박·권법·변·상박·박희·각력 등으로 불리었다.
또한 ‘수박희(手搏戱)’는 맨손무술로 힘을 겨루는 놀이를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태껸 또는 태권도의 원형이 되는 무술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우리 논산지역에서 세시풍속으로 발달했던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수박희의 유래]
우리나라 맨손무예의 흔적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유적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즉,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황해도 안악고분(4C 중엽), 현 집안시인 통구의 무용총(5C 초·중엽)과 삼실총(5C 중엽) 등에서 맨손무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벽화들은 당시 맨손무예가 크게 성행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통구 무용총의 맨손무예는 태껸과 태권도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자료이다.
고구려에서는 맨손무예를 ‘수박’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는 고구려에 앞서 한나라에서 ‘수박’이라고 불러왔고, 고려 때 처음으로 맨손무예를 ‘수박’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 고분벽화의 서역인 존재는 수박도뿐 아니라 각저총(씨름무덤)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4~5세기경 수박이 고구려와 중국은 물론이고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이미 보편적인 무술로 발전하고 있었던 점을 말해준다.
삼국시대의 수박은 백제의 금동대향로에 새겨진 부조의 모습과 신라 석굴암의 금강역사상·토용의 모습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대국가의 성장과 함께 삼국간 정복전쟁의 시기에 궁마술, 검술, 창술이 강조되면서 기초 무예로서 수박도 발달해 간 것으로 짐작된다.
통구 무용총내 수박도(5C초중엽)
고분벽화 속 수박희 장면
[고려·조선시대 수박희의 변천]
고려시대에 ‘수박’이라는 기록이 12세기 중엽 처음으로 등장한다. “경주의 천민 출신 이의민이 수박을 잘하여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이 되고, 정중부의 난에 가담하여 장군에 올랐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처럼 수박은 무신정권(1170~1270) 내내 무신들의 선발과 승진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이의민, 두경승 등 무신들을 배출하며 무신정권 100년간 최고의 무술로 평가받았다.
수박은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발달하였다. 건국 직후 군사제도의 정비와 함께 왕실 호위를 위한 군사 선발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화포, 궁마 등이 강조되면서 무과와 각종 군사 선발에서 수박이 제외되기 시작했다. 특히 ‘선진후기’라는 집단적인 진법 훈련을 중시하면서 자연스럽게 개인의 기예는 소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수박은 민간의 놀이로 크게 성행하였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따르면, “세겸이 어렸을 때 힘이 뛰어나서 그의 동생 세공과 더불어 무리를 모아 동네를 횡행하면서 날마다 닭을 훔치고 수박하는 것을 일삼았다. 광천, 광원, 청릉, 현보 등은 모두 이름난 유생으로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는 수박이 귀천을 가릴 것 없이 아이들의 놀이로 행해진 사례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수박은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시행된 사례들이 확인된다.
■ 논산 수박희의 역사적 실체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50여 년 전인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한 책이다. 작지골 ‘수박희’도 「동국여지승람」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따라서 작지골 수박희는 원래 15세기 후반 이전의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다. 특히, 작지골 수박희는 전국 330여 개 군·현 가운데 유일한 사례로 확인된다. 그만큼 작지골의 수박희가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민속놀이였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더구나 매년 7월 15일마다 수박희가 정례화된 사실은 이미 15세기 이전부터 세시풍속으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작지골 지명의 유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작지골은 현재 논산시 연무읍 안심리 작촌마을, 일명 ‘까치마을’이다. 원래 작지골은 까치마루에 위치한 마을로 후백제 때에 생긴 지명이다.
견훤묘는 은진현 남쪽 12리 풍계촌에 있다. 견훤이 작치(까치고개)에 진을 쳤는데, 까치가 큰 깃발 위에 서자 깃발이 부러져 넘어졌다. 이에 견훤은 패할 것을 예감하고 “내가 죽으면 모악산이 보이는 곳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 말대로 장사지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무덤도 모악산을 바라보고 있다. ‘작치’라는 지명도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속칭 왕묘라고도 한다. (<여지도서>, 충청도 은진현 총묘조)
이와같이 ‘작치’라는 지명이 후백제의 견훤과 관련하여 생긴 오래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견훤의 무덤 자리가 있는 풍계촌은 작지촌에서 약 4리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에 놓인 작지골은 호남으로 가는 위치로 인해 일찍부터 널리 알려진 마을이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전국을 하나로 잇는 8개의 대로 가운데 하나인 ‘해남로’에 해당하였다. 한양에서 공주를 거쳐 은진, 여산, 삼례에 이어 전주, 남원, 해남으로 가는 대로였다.
또한, 작지골은 전라도 감사가 한양에서 공주를 지나 은진을 거쳐 통과하는 길로서 작지골에서 1리 떨어진 ‘황화정’은 전라의 신·구감사가 임무를 교대하는 곳이었다. 현재 황화정 건물은 사라지고, ‘황화정비’만 연무읍 황화3리 어르신회관 앞에 옮겨 세워져 있다.
이와같이 19세기까지 작지골은 여산에 속한 마을이었다가 일제시대에는 ‘작촌’으로 불렸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안심리에 속한 작지촌은 황화정리와 함께 전북 익산군 황화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연무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논산군 연무읍으로 편입되었다.
[수박희의 대상자와 7월 15일의 성격은?]
수박희는 매년 음력 7월 15일에 하였다. 이날은 백중(百中), 중원(中元), 망혼일(亡魂日), 머슴날이라고 불렀다.
백중은 부처의 탄생·출가·성도·열반에 우란분재가 더해진 불교의 5대 명절이다. 중원은 상원(정월 15일), 하원(10월 15일)과 함께 도교의 3대 명절이다. 또한 망혼일은 돌아간 어버이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차례를 지낸 데서 비롯됐다. 머슴날은 오랜 농경문화가 이어진 우리나라에서 머슴을 쉬게 한 데서 유래된 말이다.
이처럼 논산 수박희에서의 7월 15일은 머슴날의 모습을 반영한다. 7월 15일은 머슴들에게 돈과 휴가를 주어 즐겁게 놀도록 하였다. 머슴이 이날 탄 돈을 ‘백중돈’, 이때 서는 장을 ‘백중장’, 각종 놀이를 ‘백중놀이’라고 불렀다.
백중을 전후로 해서 ‘장시’가 서는데 이때 씨름판이 벌어진다. 바로 수박희는 이때 행하던 풍속의 하나였던 것이다. 백중의 풍속이 고려 때부터 시행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혹 수박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유몽인(1559~1623)이 1621년(광해군 13) 편찬한 「어우야담」에 따르면, “정읍·용안·함열 세 고을 사이에 광장에서 매년 중원일에 호남 일도의 힘센 자들이 양식을 짊어지고 와서 ‘각저희(角抵戲)’를 하였다고 한다. 어떤 한 중이 비길 데 없이 힘이 좋아 도내의 사람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종일토록 겨룸에 대적할 자가 없어 마침내 그 광장을 휩쓸고 다녔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각저희’는 반드시 씨름만을 뜻하는 용어가 아니다. 실제로 각저희를 할 때에는 수박도 함께 하는 것이 하나의 풍습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19세기 유숙이 그린 대쾌도에서 확인된다. 즉, 한쪽에서는 씨름을 하는 장면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박을 겨루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작지골에서 수박희를 한 충청도와 전라도 인근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정읍, 용안, 함열의 사람들로 확인되고 있다. 바로 이들이 멀리서 수박을 하기 위해 식량을 짊어지고 작지골까지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수박희’를 ‘각저희’라고도 불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각저희’라는 표현 속에는 ‘수박희’라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금동대향로 토용
대쾌도-출처 공유마당(유숙)
[논산 수박희의 무술적 특징]
수박은 ‘무술을 처음 배울 때 들어가는 문(初學入藝之門)’이라 하여 칼이나 창 등 짧은 단병기를 다루는 무예의 기초였다. 그런데 조선 중기부터는 전술(戰術)보다는 전략(戰略)을 중시하고, 전술에서도 보병보다는 기병 중심의 궁마와 화기 위주의 무기체계가 발달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검, 창 등의 단병기 무예가 유명무실한 상태로 지속되면서 수박 역시 그 기능성을 상실하였다.
더구나 주자성리학이 정착되는 16세기 이래 수박이 ‘천기(賤技)’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군사시취 수단에서 완전히 제외되면서, 군사무술로서의 기능은 갈수록 감소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수박의 기술체계에서 손기술의 퇴화는 자연스럽게 발 중심의 기예만을 남겨 놓은 셈이 되었다. 발 중심의 기예는 수박이 민간놀이화되는 과정과 자연스럽게 결합해 나갔다.
임진왜란 이후 수박은 크게 분화되어 발전된다. 무엇보다도 중국의 권법이 도입되면서 종래 맨손무술은 다시 흥기되었다. 문헌 속에서 확인되는 맨손무술은 수박, 권법, 변, 타권, 대권, 탁견, 슈벽, 시박, 권척, 졸교, 태껸, 수벽치기 등으로 다양하게 분화되어 나갔다. 이렇게 다양한 맨손무술을 대표하는 명칭이 바로 ‘태껸’이다. 18세기 이만영의 ‘재물보’에서 처음 확인되는 탁견은 당시 맨손무술을 총칭하며 1920년 태껸으로 표준화되었다. 1955년 처음 제정한 태권도의 명칭도 전통무술을 대표하는 태껸을 음차한 데 따른 것이다.
놀이무예로서의 태껸은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 손기술보다 발기술 위주의 겨루기를 발달시켰다. 상대를 유인하기 위한 품밟기와 활갯짓과 같은 때껸 동작도 겨루기의 흥미를 더하기 위해 고안된 방식이었다. 민간에서 더욱 성행한 태껸은 개인 간의 놀이에 그친 것이 아니라 세시풍속의 하나로서 마을 또는 지역 간의 겨루기 대회로 발전하였다.
“조선 초기에 이미 충청도와 전라도 경계인 작지골에서 매년 7월 15일에 두 도의 백성들이 수박희를 즐겼다”는 기록은 이를 잘 말해준다.
논산 수박희는 한국의 맨손무예가 토착무술로 민간을 중심으로 발달했다는 사실을 거의 유일하게 증명하는 사례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크다.
- 전영주 편집장
이 기획기사는 2024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을 받아서 취재한 것입니다.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사업-스포츠 태권도의 발원지를 찾아서(1)
논산 수박희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
논산 연무는 우리 역사의 변천에 따라 주요한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곳이다. ‘무술을 닦는 곳, 연무(練武)’라는 뜻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역사적 실체가 존재해 있다.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글>, <아리랑>, <태권도>를 대한민국 3대 한류 문화브랜드로 지정했듯이 현재 태권도는 200여 개국에서 약 8천만 명 이상이 수련하는 ‘글로벌스포츠’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충청도 은진현과 전라도 여산군의 경계인 작지골(현 연무읍)에서 매년 7월 15일 양도의 백성들이 모여 수박희 승부를 겨룬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렇게 수박희 겨루기가 명맥을 이어오던 연무 작지골에서 태권도가 원조 한류의 첨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연무대 육군훈련소의 신병 태권도 교육 덕분이다.
이에 본지는 기원 전에서부터 육군훈련소 신병 태권도 교육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되짚어 봄으로써, 현 스포츠 태권도 발원지에 대한 역사적 실체를 밝히고자 한다.
■ 수박희(手搏戱)의 유래와 변천
‘수박(수박)’은 말 그대로 손으로 치는 맨손무술을 한자식으로 표현한 용어로서 수박·권박·권법·변·상박·박희·각력 등으로 불리었다.
또한 ‘수박희(手搏戱)’는 맨손무술로 힘을 겨루는 놀이를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태껸 또는 태권도의 원형이 되는 무술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우리 논산지역에서 세시풍속으로 발달했던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수박희의 유래]
우리나라 맨손무예의 흔적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유적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즉,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황해도 안악고분(4C 중엽), 현 집안시인 통구의 무용총(5C 초·중엽)과 삼실총(5C 중엽) 등에서 맨손무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벽화들은 당시 맨손무예가 크게 성행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통구 무용총의 맨손무예는 태껸과 태권도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자료이다.
고구려에서는 맨손무예를 ‘수박’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는 고구려에 앞서 한나라에서 ‘수박’이라고 불러왔고, 고려 때 처음으로 맨손무예를 ‘수박’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 고분벽화의 서역인 존재는 수박도뿐 아니라 각저총(씨름무덤)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4~5세기경 수박이 고구려와 중국은 물론이고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이미 보편적인 무술로 발전하고 있었던 점을 말해준다.
삼국시대의 수박은 백제의 금동대향로에 새겨진 부조의 모습과 신라 석굴암의 금강역사상·토용의 모습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대국가의 성장과 함께 삼국간 정복전쟁의 시기에 궁마술, 검술, 창술이 강조되면서 기초 무예로서 수박도 발달해 간 것으로 짐작된다.
통구 무용총내 수박도(5C초중엽)
고분벽화 속 수박희 장면
[고려·조선시대 수박희의 변천]
고려시대에 ‘수박’이라는 기록이 12세기 중엽 처음으로 등장한다. “경주의 천민 출신 이의민이 수박을 잘하여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이 되고, 정중부의 난에 가담하여 장군에 올랐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처럼 수박은 무신정권(1170~1270) 내내 무신들의 선발과 승진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이의민, 두경승 등 무신들을 배출하며 무신정권 100년간 최고의 무술로 평가받았다.
수박은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발달하였다. 건국 직후 군사제도의 정비와 함께 왕실 호위를 위한 군사 선발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화포, 궁마 등이 강조되면서 무과와 각종 군사 선발에서 수박이 제외되기 시작했다. 특히 ‘선진후기’라는 집단적인 진법 훈련을 중시하면서 자연스럽게 개인의 기예는 소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수박은 민간의 놀이로 크게 성행하였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따르면, “세겸이 어렸을 때 힘이 뛰어나서 그의 동생 세공과 더불어 무리를 모아 동네를 횡행하면서 날마다 닭을 훔치고 수박하는 것을 일삼았다. 광천, 광원, 청릉, 현보 등은 모두 이름난 유생으로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는 수박이 귀천을 가릴 것 없이 아이들의 놀이로 행해진 사례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수박은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시행된 사례들이 확인된다.
■ 논산 수박희의 역사적 실체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50여 년 전인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한 책이다. 작지골 ‘수박희’도 「동국여지승람」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따라서 작지골 수박희는 원래 15세기 후반 이전의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다. 특히, 작지골 수박희는 전국 330여 개 군·현 가운데 유일한 사례로 확인된다. 그만큼 작지골의 수박희가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민속놀이였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더구나 매년 7월 15일마다 수박희가 정례화된 사실은 이미 15세기 이전부터 세시풍속으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작지골 지명의 유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작지골은 현재 논산시 연무읍 안심리 작촌마을, 일명 ‘까치마을’이다. 원래 작지골은 까치마루에 위치한 마을로 후백제 때에 생긴 지명이다.
견훤묘는 은진현 남쪽 12리 풍계촌에 있다. 견훤이 작치(까치고개)에 진을 쳤는데, 까치가 큰 깃발 위에 서자 깃발이 부러져 넘어졌다. 이에 견훤은 패할 것을 예감하고 “내가 죽으면 모악산이 보이는 곳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 말대로 장사지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무덤도 모악산을 바라보고 있다. ‘작치’라는 지명도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속칭 왕묘라고도 한다. (<여지도서>, 충청도 은진현 총묘조)
이와같이 ‘작치’라는 지명이 후백제의 견훤과 관련하여 생긴 오래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견훤의 무덤 자리가 있는 풍계촌은 작지촌에서 약 4리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에 놓인 작지골은 호남으로 가는 위치로 인해 일찍부터 널리 알려진 마을이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전국을 하나로 잇는 8개의 대로 가운데 하나인 ‘해남로’에 해당하였다. 한양에서 공주를 거쳐 은진, 여산, 삼례에 이어 전주, 남원, 해남으로 가는 대로였다.
또한, 작지골은 전라도 감사가 한양에서 공주를 지나 은진을 거쳐 통과하는 길로서 작지골에서 1리 떨어진 ‘황화정’은 전라의 신·구감사가 임무를 교대하는 곳이었다. 현재 황화정 건물은 사라지고, ‘황화정비’만 연무읍 황화3리 어르신회관 앞에 옮겨 세워져 있다.
이와같이 19세기까지 작지골은 여산에 속한 마을이었다가 일제시대에는 ‘작촌’으로 불렸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안심리에 속한 작지촌은 황화정리와 함께 전북 익산군 황화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연무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논산군 연무읍으로 편입되었다.
[수박희의 대상자와 7월 15일의 성격은?]
수박희는 매년 음력 7월 15일에 하였다. 이날은 백중(百中), 중원(中元), 망혼일(亡魂日), 머슴날이라고 불렀다.
백중은 부처의 탄생·출가·성도·열반에 우란분재가 더해진 불교의 5대 명절이다. 중원은 상원(정월 15일), 하원(10월 15일)과 함께 도교의 3대 명절이다. 또한 망혼일은 돌아간 어버이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차례를 지낸 데서 비롯됐다. 머슴날은 오랜 농경문화가 이어진 우리나라에서 머슴을 쉬게 한 데서 유래된 말이다.
이처럼 논산 수박희에서의 7월 15일은 머슴날의 모습을 반영한다. 7월 15일은 머슴들에게 돈과 휴가를 주어 즐겁게 놀도록 하였다. 머슴이 이날 탄 돈을 ‘백중돈’, 이때 서는 장을 ‘백중장’, 각종 놀이를 ‘백중놀이’라고 불렀다.
백중을 전후로 해서 ‘장시’가 서는데 이때 씨름판이 벌어진다. 바로 수박희는 이때 행하던 풍속의 하나였던 것이다. 백중의 풍속이 고려 때부터 시행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혹 수박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유몽인(1559~1623)이 1621년(광해군 13) 편찬한 「어우야담」에 따르면, “정읍·용안·함열 세 고을 사이에 광장에서 매년 중원일에 호남 일도의 힘센 자들이 양식을 짊어지고 와서 ‘각저희(角抵戲)’를 하였다고 한다. 어떤 한 중이 비길 데 없이 힘이 좋아 도내의 사람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종일토록 겨룸에 대적할 자가 없어 마침내 그 광장을 휩쓸고 다녔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각저희’는 반드시 씨름만을 뜻하는 용어가 아니다. 실제로 각저희를 할 때에는 수박도 함께 하는 것이 하나의 풍습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19세기 유숙이 그린 대쾌도에서 확인된다. 즉, 한쪽에서는 씨름을 하는 장면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박을 겨루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작지골에서 수박희를 한 충청도와 전라도 인근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정읍, 용안, 함열의 사람들로 확인되고 있다. 바로 이들이 멀리서 수박을 하기 위해 식량을 짊어지고 작지골까지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수박희’를 ‘각저희’라고도 불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각저희’라는 표현 속에는 ‘수박희’라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금동대향로 토용
대쾌도-출처 공유마당(유숙)
[논산 수박희의 무술적 특징]
수박은 ‘무술을 처음 배울 때 들어가는 문(初學入藝之門)’이라 하여 칼이나 창 등 짧은 단병기를 다루는 무예의 기초였다. 그런데 조선 중기부터는 전술(戰術)보다는 전략(戰略)을 중시하고, 전술에서도 보병보다는 기병 중심의 궁마와 화기 위주의 무기체계가 발달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검, 창 등의 단병기 무예가 유명무실한 상태로 지속되면서 수박 역시 그 기능성을 상실하였다.
더구나 주자성리학이 정착되는 16세기 이래 수박이 ‘천기(賤技)’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군사시취 수단에서 완전히 제외되면서, 군사무술로서의 기능은 갈수록 감소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수박의 기술체계에서 손기술의 퇴화는 자연스럽게 발 중심의 기예만을 남겨 놓은 셈이 되었다. 발 중심의 기예는 수박이 민간놀이화되는 과정과 자연스럽게 결합해 나갔다.
임진왜란 이후 수박은 크게 분화되어 발전된다. 무엇보다도 중국의 권법이 도입되면서 종래 맨손무술은 다시 흥기되었다. 문헌 속에서 확인되는 맨손무술은 수박, 권법, 변, 타권, 대권, 탁견, 슈벽, 시박, 권척, 졸교, 태껸, 수벽치기 등으로 다양하게 분화되어 나갔다. 이렇게 다양한 맨손무술을 대표하는 명칭이 바로 ‘태껸’이다. 18세기 이만영의 ‘재물보’에서 처음 확인되는 탁견은 당시 맨손무술을 총칭하며 1920년 태껸으로 표준화되었다. 1955년 처음 제정한 태권도의 명칭도 전통무술을 대표하는 태껸을 음차한 데 따른 것이다.
놀이무예로서의 태껸은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 손기술보다 발기술 위주의 겨루기를 발달시켰다. 상대를 유인하기 위한 품밟기와 활갯짓과 같은 때껸 동작도 겨루기의 흥미를 더하기 위해 고안된 방식이었다. 민간에서 더욱 성행한 태껸은 개인 간의 놀이에 그친 것이 아니라 세시풍속의 하나로서 마을 또는 지역 간의 겨루기 대회로 발전하였다.
“조선 초기에 이미 충청도와 전라도 경계인 작지골에서 매년 7월 15일에 두 도의 백성들이 수박희를 즐겼다”는 기록은 이를 잘 말해준다.
논산 수박희는 한국의 맨손무예가 토착무술로 민간을 중심으로 발달했다는 사실을 거의 유일하게 증명하는 사례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크다.
- 전영주 편집장
이 기획기사는 2024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을 받아서 취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