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정애 교수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던 시대정신은 오늘을 위해 오늘을 사는 시대감정으로 변했다. 예측 불가능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산다는 건 언제든지 부정당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과 같다. 나의 오늘을, 나의 삶을 부정당하지 않으려고 우리는 오늘을 위해 오늘을 사는 삶을 선택한다. 예측 불가능한 내일과 오늘을 사는 삶은 법과 제도를 진공상태로 인식하며 사회 속 개인이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내일을 위해 사는 시대정신을 북돋우다
[먼저 온 미래_내일연구소]를 열며 일상적이고 평범한 ‘공동체’를 떠올렸다. 혼자만의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시대감정 속 ‘공동체’는 딜레마 그 자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가, 지역사회, 학교 등 공동체 속에서 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로 공동체 형성의 당위를 이야기해서가 아니라 우리 중 누구도 사회 밖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사회를 불안해하며 각자의 삶을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불안을 나만의 불안인 양 나만의 문제인 양 혼자 견디고 있다. 돌봄과 연대의 정신을 애써 묻어 둔 채 오늘을 그렇게 살아낸다.
돌봄과 연대가 필요한 우리는 시간이 만들어 준 젊음과 늙음에 대한 배타성만을 키워 서로를 돌보지도 연대하지도 않는다. 동시대의 젊음과 늙음은 물리적 시간이 만들어낸 외형적 변화를 지칭하는 말이 아닌 ‘내일의 가능성’ 여부를 평가하는 무엇이 되었다. 먹고 사는 것을 중심에 두고 서로를 배타적 존재로 인식한다. 젊음은 흐르는 시간 속에 잠시 나타나는 한때지만 그것을 깨닫기에는 그 한때가 너무 짧다. 무엇보다 우리는 늙어감의 운동성을 긴 시간 체감하며 살아야 한다.
젊음과 늙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제도화하는 것이 청년정책이며 노인정책이다. 젊은 청년들을 위한 제도에는 내일의 문을 여는 열쇠 기능을 부여하고 나이 든 노인들을 위한 제도에는 내일의 문을 닫는 기능을 부여한다. 젊음과 늙음의 배타성을 잘 드러내는 정책이며 제도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예측 불가능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공동체의 불안정함과 제도의 문제를 탓하지 않고 혼자만의 일상을 살아낸다. 젊음과 늙음에 대한 인식은 변했지만 돌보고 연대하지 않는 우리는 함께 무엇을 만들어가는 데 서툴다.
이러한 일상에서 마주한 2024년 12월 3일 계엄은 국가권력이 국가폭력이 된 ‘순간’을 수습하는 하루하루를 살게 한다. 계엄은 거대한 공동체 속 ‘나’임을 자각하고 국가폭력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내일을 위해 사는 시대정신을 깨어나게 한다. 그렇게 2025년은 먼저 온 미래를 알리고 있다. 그리고 법과 제도의 진공상태에서 벗어나 나의 내일을 위한 법과 제도를 가진 공동체의 내일을, 우리의 내일을 요구하고 있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함성은 국가폭력의 순간에 깨달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라고 외치는 소리이다. 늙음과 젊음이 서로 돌보고 연대해야 하는 이유를, 아니 돌보고 연대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 기회를 얻은 것이다. 각자의 일상에서 맞이한 계엄-국가폭력은 각자의 일상을 헤집고 들어와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내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오늘을 위한 오늘살이 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먹고 살기 위해 서로를 배타적 존재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늙음과 젊음은 서로를 공존의 주체로 받아들이며 지난 역사가 만든 교훈 아래 함께 선다.
각자의 일상 속에서 개인의 한계로 고민하던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소리를 만들어내며 ‘우리의 한계’와 ‘우리의 고통’을 나눌 기회를 만들고 있다. 계엄이라는 국가폭력은 젊음과 늙음이 돌봄의 대상이 아닌 사회 주체임을 각인시킴과 동시에 젊음과 늙음 속 다양한 목소리를 그리고 극단적인 목소리를 보고 들을 기회를 제공했다. ‘공동체’를 떠올리며 열어젖힌 [먼저 온 미래_내일연구소]의 역할을 실감하게 하는 기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원하는가?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우리는 어떤 정치를 원하는가? 우리는 어떤 우리를 원하는가?
변화를 담아 제도와 가치를 기획하다
‘내일연구소’는 이러한 시대요구와 시대정신을 담아 우리의 내일을 기획하고자 만들었다. 나의 웰빙(Well being)이 우리의 웰빙(Well being)이 되는 내일.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누군가의 필요가 되지도 않는 혼자만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오늘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내일을 만드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늙어감의 역사 속에서 젊음이 만들어낸 사실들을 아우르며 젊음 한때의 욕구가 변화시킬 우리 공동체를 그려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가까운 곳에서 실존적 삶을, 일상의 욕구를 담아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며 욕구가 반영된 제도와 법을 만드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구체적 일상의 욕구와 필요가 담긴 제도를 만들고 가치 인식의 변화를 담은 법을 만들며 지역의 변화를 담아내고 변화를 이끌 제도와 가치를 만드는 것이 내일연구소의 목적이다.
배부른 돼지가 되어 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것만은 아니다. 배고픔 자체를 알지 못하는 젊음은 배터짐을 향해가는 시대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배고픈 인간도 배부른 인간도 모두가 늙어감의 변화를 거부할 수 없듯이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추구했던 인간의 모습 혹은 나 자신을 알 기회를, 예측 가능한 내일을 만들 국가 공동체를 원하는 것이다. 배터짐의 시대감정인 맛집에서 벗어나 맛의 유희가 아닌 생존을 위해 배를 채워야 하는 우리 공동체의 사람들과 연대하는 시대정신, 젊음과 늙음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내일연구소’이고자 한다.
끝으로 [먼저 온 미래_내일연구소]의 나갈 방향과 칼럼의 방향을 독일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로 갈음한다. 우리는 누구나 필요한 존재이며 필요로 하는 존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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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베르톨트 브레히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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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AI DALL·E 생성 이미지)
강정애 교수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던 시대정신은 오늘을 위해 오늘을 사는 시대감정으로 변했다. 예측 불가능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산다는 건 언제든지 부정당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과 같다. 나의 오늘을, 나의 삶을 부정당하지 않으려고 우리는 오늘을 위해 오늘을 사는 삶을 선택한다. 예측 불가능한 내일과 오늘을 사는 삶은 법과 제도를 진공상태로 인식하며 사회 속 개인이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내일을 위해 사는 시대정신을 북돋우다
[먼저 온 미래_내일연구소]를 열며 일상적이고 평범한 ‘공동체’를 떠올렸다. 혼자만의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시대감정 속 ‘공동체’는 딜레마 그 자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가, 지역사회, 학교 등 공동체 속에서 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로 공동체 형성의 당위를 이야기해서가 아니라 우리 중 누구도 사회 밖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사회를 불안해하며 각자의 삶을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불안을 나만의 불안인 양 나만의 문제인 양 혼자 견디고 있다. 돌봄과 연대의 정신을 애써 묻어 둔 채 오늘을 그렇게 살아낸다.
돌봄과 연대가 필요한 우리는 시간이 만들어 준 젊음과 늙음에 대한 배타성만을 키워 서로를 돌보지도 연대하지도 않는다. 동시대의 젊음과 늙음은 물리적 시간이 만들어낸 외형적 변화를 지칭하는 말이 아닌 ‘내일의 가능성’ 여부를 평가하는 무엇이 되었다. 먹고 사는 것을 중심에 두고 서로를 배타적 존재로 인식한다. 젊음은 흐르는 시간 속에 잠시 나타나는 한때지만 그것을 깨닫기에는 그 한때가 너무 짧다. 무엇보다 우리는 늙어감의 운동성을 긴 시간 체감하며 살아야 한다.
젊음과 늙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제도화하는 것이 청년정책이며 노인정책이다. 젊은 청년들을 위한 제도에는 내일의 문을 여는 열쇠 기능을 부여하고 나이 든 노인들을 위한 제도에는 내일의 문을 닫는 기능을 부여한다. 젊음과 늙음의 배타성을 잘 드러내는 정책이며 제도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예측 불가능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공동체의 불안정함과 제도의 문제를 탓하지 않고 혼자만의 일상을 살아낸다. 젊음과 늙음에 대한 인식은 변했지만 돌보고 연대하지 않는 우리는 함께 무엇을 만들어가는 데 서툴다.
이러한 일상에서 마주한 2024년 12월 3일 계엄은 국가권력이 국가폭력이 된 ‘순간’을 수습하는 하루하루를 살게 한다. 계엄은 거대한 공동체 속 ‘나’임을 자각하고 국가폭력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내일을 위해 사는 시대정신을 깨어나게 한다. 그렇게 2025년은 먼저 온 미래를 알리고 있다. 그리고 법과 제도의 진공상태에서 벗어나 나의 내일을 위한 법과 제도를 가진 공동체의 내일을, 우리의 내일을 요구하고 있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함성은 국가폭력의 순간에 깨달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라고 외치는 소리이다. 늙음과 젊음이 서로 돌보고 연대해야 하는 이유를, 아니 돌보고 연대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 기회를 얻은 것이다. 각자의 일상에서 맞이한 계엄-국가폭력은 각자의 일상을 헤집고 들어와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내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오늘을 위한 오늘살이 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먹고 살기 위해 서로를 배타적 존재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늙음과 젊음은 서로를 공존의 주체로 받아들이며 지난 역사가 만든 교훈 아래 함께 선다.
각자의 일상 속에서 개인의 한계로 고민하던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소리를 만들어내며 ‘우리의 한계’와 ‘우리의 고통’을 나눌 기회를 만들고 있다. 계엄이라는 국가폭력은 젊음과 늙음이 돌봄의 대상이 아닌 사회 주체임을 각인시킴과 동시에 젊음과 늙음 속 다양한 목소리를 그리고 극단적인 목소리를 보고 들을 기회를 제공했다. ‘공동체’를 떠올리며 열어젖힌 [먼저 온 미래_내일연구소]의 역할을 실감하게 하는 기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원하는가?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우리는 어떤 정치를 원하는가? 우리는 어떤 우리를 원하는가?
변화를 담아 제도와 가치를 기획하다
‘내일연구소’는 이러한 시대요구와 시대정신을 담아 우리의 내일을 기획하고자 만들었다. 나의 웰빙(Well being)이 우리의 웰빙(Well being)이 되는 내일.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누군가의 필요가 되지도 않는 혼자만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오늘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내일을 만드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늙어감의 역사 속에서 젊음이 만들어낸 사실들을 아우르며 젊음 한때의 욕구가 변화시킬 우리 공동체를 그려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가까운 곳에서 실존적 삶을, 일상의 욕구를 담아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며 욕구가 반영된 제도와 법을 만드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구체적 일상의 욕구와 필요가 담긴 제도를 만들고 가치 인식의 변화를 담은 법을 만들며 지역의 변화를 담아내고 변화를 이끌 제도와 가치를 만드는 것이 내일연구소의 목적이다.
배부른 돼지가 되어 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것만은 아니다. 배고픔 자체를 알지 못하는 젊음은 배터짐을 향해가는 시대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배고픈 인간도 배부른 인간도 모두가 늙어감의 변화를 거부할 수 없듯이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추구했던 인간의 모습 혹은 나 자신을 알 기회를, 예측 가능한 내일을 만들 국가 공동체를 원하는 것이다. 배터짐의 시대감정인 맛집에서 벗어나 맛의 유희가 아닌 생존을 위해 배를 채워야 하는 우리 공동체의 사람들과 연대하는 시대정신, 젊음과 늙음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내일연구소’이고자 한다.
끝으로 [먼저 온 미래_내일연구소]의 나갈 방향과 칼럼의 방향을 독일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로 갈음한다. 우리는 누구나 필요한 존재이며 필요로 하는 존재고자 한다.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베르톨트 브레히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OpenAI DALL·E 생성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