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태권도 발원지와 연무의 인과관계

놀뫼신문
2024-10-15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사업] 스포츠태권도의 발원지를 찾아서(6)

스포츠 태권도 발원지와 연무의 인과관계






본지는 지난 5월부터 기원전 마한에서 육군훈련소에 이르기까지 ‘스포츠 태권도’에 대한 역사적 실체를 조명해 보았다.

논산 특히, 연무는 우리 역사 변천에 따라 주요한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곳이다. 무술을 닦는 곳, ‘연무(鍊武)’라는 뜻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역사적 실체가 존재해 있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충청도 은진현과 전라도 여산군의 경계인 작지골(현 연무읍)에서 매년 7월 15일 양도의 백성들이 모여 수박희 승부를 겨룬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렇게 수박희 겨루기가 명맥을 이어오던 연무 작지골에서 태권도가 원조 한류의 첨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연무대 육군훈련소의 신병 태권도 교육 덕분이다. 이런 결과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글>, <아리랑>, <태권도>를 ‘대한민국 3대 한류 문화브랜드’로 지정했고, 현재 태권도는 200여 개국에서 약 8천만 명 이상이 수련하는 ‘글로벌스포츠’이다.

이에 이번호에서는 태권도의 유래를 짚어보며 국기 태권도의 발원지 검토에 대한 최종 기사를 게재한다. 



대쾌도-출처 공유마당(유숙)


■ 수박희 → 택견 → 태권도의 변천사 


[고려시대 수박희]

‘수박(手搏)’이란 용어는 기록상으로 ‘고려사’에 나오는 것이 최초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용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상고시대부터 일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말이 먼저 만들어져 통용되어지고 난 연후에 그것이 문자로 되기 때문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의종이 보현원에서 “군사를 훈련할 수 있는 곳이구나” 하면서 “오병수박희를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수벽치기’와 ‘수박’이 동일한 표기임을 볼 때 ‘수벽치기’는 그 기원을 고려시대 ‘수박’으로부터 찾을 수 있겠다.


[조선 초기 수박희]

수박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는데,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태종 10년 기록으로 병조와 의흥부에서 수박희로 사람을 시험하여 세 사람을 연속 이긴 자를 ‘방패군’으로 보충하였다는 것이다. 태종 11년에도 갑사 선발에 기사와 보사에 능하지 못한 자 중 수박희를 시험하여 3명 이상 이긴 자를 취했다는 기록 또한 있다.

이와같이 수박의 전통은 조선에 들어서 그대로 계승된다. 「태종실록」「세종실록」「세조실록」에는 수박희로 시험하여 군사를 뽑았다거나, 왕이 수박 잘하는 사람을 별도로 뽑아서 “연회 때 하게 했다”는 수박과 관련된 기록들이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수박희는 고려에 이어 조선 전기를 통해 민간뿐 아니라 무인으로 출세하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수박 능력이 뛰어나다면, 그가 양반이든 천민이든 상관없이 뽑았다는 것은 수박이 무인의 출세 도구로써 뿐만 아니라, 신분을 뛰어넘기 위한 도구로써 중요한 기예였음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중기 수박희]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개량된 무기를 갖춘 북의 오랑캐와 남의 왜구의 잦은 침략에 대비한 화포, 궁마 등이 크게 강조되면서 15세기 말부터 무과와 각종 군사선발에서 수박이 제외되었다. 특히 ‘선진후기’라 하여 집단의 전술적 진법훈련을 중시하자 자연히 개인의 기예는 소홀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개인 병기인 창검과 함께 수박의 전투기술로서의 기능은 점차 약해졌다. 수박이 15세기 말 조선 군사 선발과 승진시험에서 제외된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박은 민간에 널리 퍼져 15세기에 이미 민간의 세시풍속으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충청도 은진현과 전라도 여산군의 경계 지역인 작지(현 연무)에서 매년 7월 15일 두 도의 사람들이 모여서 수박희로 승부를 겨루었다고 할 정도이다. 


[수박 무예의 쇠퇴와 놀이화]

수박이 무과시험에서 점차 사라지면서, 수박은 씨름과 함께 민간의 놀이문화로 정착해 갔다.

그 과정에서 수박은 손기술 위주의 무예에서 보기가 화려한 발기술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손은 발보다 정확도가 높기때문에 상대방 급소를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어 훨씬 위협적이다. 반면 발은 손보다 강한 타격력은 갖고 있지만 정확하지 못하고 손으로 대부분 막을 수 있다.

따라서 수박이 놀이화되는 과정에서 자연히 덜 위험한 발차기 위주의 무예로 된 것이다. 이와같이 조선 후기 들어서면서 수박은 무술로서의 기능보다는 민간의 흥을 돋고 볼거리를 제공하는 놀이의 기능이 더 강조되는 개인 무예로 자리잡게 되었다.


[태권도의 전신 택견(태껸)]

택견이 문헌상 처음 나타난 시기는 18세기 초반이다. 택견과 유사 용어인 ‘탁견’이 등장하는데 영조 4년(1728년)에 김민순의 「청구영언」에서 처음 선보이게 된다. 이후 정조 22년(1798년) 이만영이 편찬한 「재물보」와 1921년 최영년이 저술한 「해동죽지」 등에도 ‘탁견’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택견은 태권도의 직선적 발차기와 달리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동작으로 힘을 내는 발차기와 씨름과 유사한 독특한 넘기기 기술을 동시에 구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에 가장 한국적 움직임으로 역사성과 고유성을 인정받아 우리 무예로는 처음으로 1983년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유산 제76호로 등록되었고, 이후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와같이 우리나라의 고유 전통무예는 고대의 수박에서부터 씨름, 수벽, 택견에 이르기까지 계승되며 발전해왔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고유무술은 철저히 억압받고 배제되었다.


[해방 후 <5대 기간도장>]

해방 후 우리나라는 다양한 무예 수련장들이 우후죽순 개관했다. 그중에는 일본에서 가라테를 배워 온 사람들도 있었고 전통무예인 수박을 계승하여 발전시켜온 이도 있었다. 또한 중국의 쿵후도 일부 들어와 당수도, 공수도, 화수도, 권법 등과 같은 다양한 명칭의 무예 수련장이 난립했다.

그러던 중 다수의 의식 있는 사범들이 단일화하자는 의견이 생겼고, 그런 와중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대한공수도협회’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 중심이 되는 수련장 다섯 곳이 있었으니, 이를 <5대 기간도장>이라 했다. 즉 노병직의 ‘송무관’, 이원국의 ‘청도관’, 윤병인의 ‘YMCA권법부’, 전상섭의 ‘조선연무관’, 황기의 ‘무덕관’이 바로 그것이다.

이 다섯 개의 도장과 나중에 ‘국제태권도연맹’으로 분화된 최홍희의 ‘오도관’이 통합함으로써 태권도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태권도의 탄생]

‘태권도’라는 명칭은 해방 후 수많은 수련장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것을 당시 육군 29사단장이었던 최홍희 장군이 고안해 낸 것이라고 한다.

1954년 9월, 속초에서 제1군단 창립기념식이 개최되었는데, 이 기념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오도관 수련생 50여 명이 30분 동안 태권도 시범을 보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줄곧 시범을 서서 관람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화랑 무도관 출신의 남태희 중위가 기왓장 13장을 겹쳐 놓고 일격에 격파하는 것을 보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손뼉을 쳤고, 시범이 끝나자 최홍희 장군을 돌아보면서 “저게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우리 태껸이야!, 앞으로 전군에 보급시켜야겠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 한마디로 말미암아 최홍희는 ‘태권도’라는 이름을 고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태권도라는 무술의 명칭은 여러 갈래로 나눠져 있던 무술수련장들이 통합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렇듯 태권도는 누구 한 사람이 고안해 낸 무술이 아니라 본래 우리 무술이 발전해 오는 과정에서 새로운 명칭이 붙여진 것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올림픽 정식 종목인 국기 태권도]

태권도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최홍희를 빼놓을 수 없다. 최홍희는 어린 시절 가라테를 배웠고, 해방 후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수련하던 무예를 통일해 태권도를 창시한 인물이다.

그는 1953년 남제주군 모슬포에 창설된 제29보병사단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이곳에서 태권도를 군인들에게 보급하며, 경례 구호도 ‘태권’으로 하였다. 특히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신병훈련 시 태권도를 연마하게 되면서 모든 군인이 연마하는 무예로 급속히 성장하게 된다.

1966년 3월, 최홍희는 국제태권도연맹(ITF) 총재로 취임한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정권과 반목하던 최홍희는 1972년 3월 독재정권의 탄압을 이유로 들며 캐나다로 망명한다. 이에 그가 총재로 있던 국제태권도연맹도 캐나다 토론토로 본부를 옮겼다. 국기인 태권도의 세계본부가 국내에 있지 못하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이후 대한민국은 국내 태권도 단체를 중심으로 ‘국제태권도연맹’에 대항할 ‘세계태권도연맹’을 1973년 5월에 창설하고 김운용 씨가 초대 총재를 맡게 된다.

이와같이 ‘세계태권도연맹’ 발족 및 ‘국기원’ 창설과 더불어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함으로써 태권도의 세계화 기틀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각 관별로 난립하던 10대관(청도관, 무덕관, 지도관, 송무관, 창무관, 강덕원, 정도관, 오도관, 한무관, 관리관)을 1978년 태권도로 통합을 이뤄냈다.

또한 국기원은 태권도 세계화의 일환으로 1974년 시범단을 창단해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불모지에서 태권도의 싹을 틔웠다. 아울러 국기원은 올바른 지도자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83년 태권도 지도자 연수원을 개원해 국내외 약 200,000여 명의 태권도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태권도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됨으로서 국제적으로 공인된 스포츠가 되었다. 뿐만아니라, 2018년 “대한민국 국기는 태권도로 한다”라는 법적 근거를 확립함으로써 ‘국기’로 법제화되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육군훈련소 정문

작지(작리)가 나오는 옛지도

국보 제141호 정문경(다뉴세문경)는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있다

국보 제146호 청동방울 일괄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스포츠태권도의 역사적 실체를 찾아서


‘태권도의 역사적 실체’를 찾다 보니 몇 개의 키워드(key word)가 나타난다. 바로 <국보 제141호와 제146호>, <신증동국여지승람>, <수박희>, <작지마을>, <육군훈련소> 등 이다. 그런데 이 키워드들은 ‘연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충청도와 전라도 백성들이 매년 백중날 양도의 경계인 ‘작지마을’에 모여 ‘수박희’로 승부를 겨뤘다”고 소개한다.

이런 수박희의 고유무술은 일제강점기 억압받고 배제되다가 해방이 되면서 여러형태로 진화하여 난립되었다. 그 후 군(軍)을 중심으로 ‘대한태권도협회’가 탄생하였고, 1963년 제44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태권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60만 대한민국 국군의 강병책으로 전 군에 보급되기 시작한 태권도는 ‘육군훈련소’를 기점으로 군(軍)에서부터, 민간인과 학생, 그리고 외국까지 보급되었다. 

이와같이 태권도가 보급되며 국민생활체육으로 정착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곳이 바로 군(軍)이다. 특히, 신병 훈련의 요람이었던 ‘육군훈련소’는 국기 태권도 확산의 일등공신이었다.


[연무(鍊武)의 역사적 실체]

1960년대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참호를 파던 병사들이 의문의 물체들을 발견했다. 흙과 녹이 잔뜩 묻은 고색창연한 청동기 세트였다.

동심원과 삼각형 문양이 새겨진 청동거울(정문경, 국보 제141호)과 방울 8개가 달린 팔주령 2점, 포탄 모양의 간두령 2점, ×자가 교차된 조합식 1점 및 아령 모양의 쌍두령 2점 등 청동방울(국보 제146호)이었다. 

이 보물들은 중간상인을 거쳐 청동거울(정문경)은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나머지 청동방울 일괄은 호암(리움)미술관으로 넘어갔다. 

‘마한의 고고학개론’에 의하면 “국보 제141호와 제146호는 2,500여 년 전, 당시 마한사람들이 생활과 관련된 의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의례가 치러지는 장소는 취락과 그 주변일 것”이라고 설명한다. 

당시 하늘과 땅과 인간의 소통을 독점하던 제정일치 시대의 지도자가 은백색 정문경을 가슴에 달고 햇빛을 환하게 반사하면서 청동방울을 마구 흔들며 신과의 소통을 바라보던 백성들은 경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 후 제사장의 죽음과 함께 그의 유물을 매납한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정문경은 국보 중 국보로 통하고 있다. 지름 212~218㎜, 무게 1,590g의 정문경은 1만3천 개가 넘은 선이 0.3㎜의 간격으로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현대기술로도 새기기 힘든 청동기시대 판 ‘나노 기술’의 정문경이 논산 연무에서 잠들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가지 더 놀라운 것은 국보 제141호 정문경은 구리와 주석의 비율이 65.7대 34.3으로 고대 청동거울의 황금비(67대33)와 단 1% 정도의 오차만 보일 뿐이다.

2008년 당시 성분분석을 담당한 유혜선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장은 “국보 제141호 정문경은 고대 청동거울 제작을 위한 황금비율을 그대로 반영했다”면서, “청동기 기술이 최고 정점에 달할 때 제작된 유일무이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기원전 6,000년 전 시작된 선사인들의 생각이 담긴 ‘덧띠무늬’는 기원전 4,500~3,000년 사이 더욱 정교하게 ‘빗살무늬’로 발전했고, 기원전 300~200년에 되어 ‘청동기시대판 나노 기술’이라 할 수 있는 극초정밀 예술품인 ‘정문경’으로 정점을 찍고 있다.

이와같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수박희’, ‘작지마을’, ‘육군훈련소의 태권도’에 대한 역사적 실체가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필연적이다.

논산의 연무(鍊武)는 “태권도의 발원이라 할 수 있는 수박희의 겨루기 대회를 매년 같은 날(음력 7월 보름, 백중), 같은 장소(작지)에서 했다”는 고증이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그것도 관제행사가 아닌 경계를 달리하는 전라도와 충청도 일반 백성들이 모여 축제의 한마당을 펼쳤다는 것에 큰 의미를 갖는다.

또한 그 장소의 이름이 다름 아닌 논산의 ‘연무(鍊武)’라는 것. 곧 ‘무술을 닦는 곳’이라는 뜻이니 우연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우리나라 최고의 육군신병훈련소인 연무대까지 위치하고 있다. 정예 육군을 양성하는 훈련소는 과거로 얘기하면 수박희 겨루기로 군병을 선발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 전영주 편집장

이 기획기사는 2024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을 받아서 취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