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사업] 인‧의‧예‧지 ‘선비의 혼’을 찾아서(2)
서원의 역사 및 제반 현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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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 시설의 한 유형으로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향촌 지식인인 사림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 유산은 교육을 기초로 형성된 성리학에 기반한 한국 사회 문화 전통의 특출한 증거이다. 한국의 서원이 중국의 서원을 벤치마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서원은 중국과 현저한 차별성을 지닌다. 단적인 예로 중국의 서원은 기본적으로 관료양성을 위한 준비기구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한국의 서원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절차탁마하는 곳인 동시에 선현의 위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일도 겸했다. 이것을 ‘존현양사(尊賢養士)’라 하는데, 학업과 과거 합격이 주목적이었던 성균관이나 학당, 향교와 달리 서원은 그곳에 배향된 선현의 정신과 뜻을 되새겨 학문을 닦고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장소였다. 논산에는 이러한 서원이 10곳이나 된다. 그중 돈암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이에 ‘선비의 혼’이 살아 있는 서원의 역사와 문화를 유교문화콘텐츠로 새롭게 생성하여 수려한 논산의 관광자원과 연계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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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곡서원 | 忠谷書院
충청남도 기념물 제12호
논산시 부적면 충곡로269번길 60-7 (충곡리 115-2)
충곡서원은 1692년(숙종 18)에 세워진 서원이다. 처음에는 사육신인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박팽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출발하여 육신서원(六臣書院)이라고 불렸다. 이후 백제의 계백 장군과 이 고장의 선비 김익겸을 모시면서부터 팔현서원(八賢書院)이라 불렸다. 지금은 모두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대부분 이 고장의 이름난 유학자의 제자이거나 후손들로서 충절이나 효행이 뛰어난 인물들이다. 위패는 계백을 중심으로 사육신을 나란히 봉안한 다음 좌우에 김익겸을 비롯해 11인을 배치하였다.
충곡서원은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어졌지만 1935년에 다시 세웠고, 사우(祠宇: 선현의 위패와 초상화를 모셔 두고 제사를 지내는 장소)만 남은 것을 1977년에 대대적으로 복원하였다. 서원의 구조는 서향으로 입구에 홍살문(경건한 마음으로 출입하라는 의미에서 붉은 칠을 한 문)을 세우고 바깥 대문인 외삼문,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 안쪽 대문인 내삼문, 사우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경내에는 송시열이 지은 성삼문의 유허비(역사적 사실이 기록으로만 남아 있고 유물이나 문화재가 없는 곳)가 있고, 근처에 계백의 묘가 있다.
조정서원 | 釣亭書院
논산시 향토유적 제7호
논산시 가야곡면 등길 129 (등리 216-2)
조정서원은 익안대군 방의(芳毅)의 증손자 옥계(玉溪) 도정공(都正公) 이현동(李賢童)을 추모하기 위해 1978년 후손인 이성구씨가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노성‧은진‧연산향교 유림들의 발의(發議)로 건립 운영되어 왔다. 이현동은 1455년 단종(端宗)이 왕위를 물려주려하자 수차에 걸쳐 울며 간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산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농맹아(聾盲啞)’라 칭하고 일생을 통곡 속에서 생활했다한다. 노후에는 낙향(落鄕)하여 일생을 마쳤다.
효암서원 | 孝巖書院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7호
논산시 가야곡면 덕은로470번길 18-6 (산노리 22-5)
효암서원은 원래 은진현 갈마동(현 가야곡면 두월리)에 있던 갈산사(葛山洞)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진 후 1713년(숙종 39)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은 서원이다.
처음 사당을 세울 때는 강응정의 위패만을 모셨으나 이후 서익, 김문기, 김성휘, 양응춘, 남준, 김필태 등을 추가로 모셨다. 이 과정에서 서익과 김성휘의 위패 중 어느 것의 배분이 더 높으냐를 두고 갈등이 생겨 1867년(고종 4)에 서익을 행림서원으로 옮기고 나머지 6인만 모시게 되었다.
효암서원은 본받을 만한 유생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한편 지방민을 교육하는 일을 해오다가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1868년(고종 5)에 헐어졌다가 1925년에 복원되었다. 효암서원은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당은 없고, 외삼문(바깥 대문)인 효의문(孝義門), 유생들이 생활하는 동재(東齋)와 모현재(慕賢齋)란 현판을 달고 있는 서재(西齋), 내삼문(안쪽 대문)인 삼창문(三昌門), 사우(선현의 위패와 초상화를 모셔 두고 제사를 지내는 장소)인 갈산사(葛山祠)로 구성되어 있다. 외삼문 앞 오른쪽에 성종이 친필로 쓴 '효자성균생원강웅정지려(孝子成均生員姜應貞之閭)'라는 현판이 걸린 정려각이 있다.
효자 강응정 정려(孝子 姜應貞 旌閭)
강응정은 본관이 진주(晉州), 자는 공직(公直)이며, 호는 중화재(中和齋)로서 첨화중추부사(僉和中樞府事) 의(毅)의 아들이다. 성종 1년(1470)에 효행으로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사퇴한 이후 1483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김용석(金用石), 신종호(申從護), 박연(朴演) 등과 함께 향약을 만들고 소학을 강론하였다. 또한 천성이 지효하여 모친이 병으로 눕게 되었을 때에는 3년여 동안 시탕(侍湯), 간호(看護)하며 천수를 다하도록 하였고 돌아가신 후에는 5년여 동안 시묘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성종이 친필로 현판을 써서 하사하여 정려를 세웠고, 후에 효암서원의 주벽으로 배향되었다. 정려는 정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형의 기단위에 8각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4면은 홍살로 시설하였다. 정려의 안에는 1985년에 건립되 정려비가 있고, 명정기 및 중수기가 있으며, 중앙에는 명정현판이 걸려 있다.
금곡서원 | 金谷書院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8호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286번지
금곡서원은 김수남(金秀南)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림들이 세운 서원이다. 만치당(萬癡堂) 김수남(1576-1637)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가 강화도 남루(南樓)에서 김상용 등과 함께 분사(焚死 불에 타서 죽음)하였다. 김수남의 위패는 1687년(숙종 13)에 은진현 가야곡 조정리에 있는 금곡사(金谷洞)에 모셔졌으나 1690년 숙종 16에 그의 유풍이 남아 있는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고 1781년(정조 5)에는 성삼문과 조계명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철거되었지만 1901년에 제단을 다시 세웠고, 1974년에 서원을 복원하였다.
서원은 낮은 산의 남쪽 경사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2단의 대지를 만들고 홍살문(경건한 마음으로 출입하라는 의미에서 붉은 칠을 한 문)과 현판을 걸어 놓은 외삼문, 경모재라는 현판을 걸어 놓은 유생들의 기숙사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내삼문(內三門), 위패를 모신 사당 순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다. 서원 입구에는 김수남의 충심을 기리는 정려와 함께 김수남을 충심으로 따른 종 무작금(無作金)의 불망비(不忘碑 후세가 잊지 않도록 어떤 사실을 적어 세우는 비석)가 세워져 있다.
금곡서원은 처음부터 서원은 아니었고, 원래는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세워진 것을 훗날 다시 세우면서 서원으로 바꾼 듯하다.
죽림서원 | 竹林書院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5호
논산시 강경읍 금백로 20-3 (황산리 100-11)
강경읍 황산리에 위치한 죽림서원(원장 김선의)은 양호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1626년(인조 4)에 김장생을 중심으로 양호지역 양반들이 주축이 되어 이이와 성혼을 배향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죽림서원은 창건 당시 지명에 따라 ‘황산서원(黃山書院)’이라 하였으나 현종 5년(1665)에 죽림서원으로 사액(賜額: 임금이 사당·서원(書院) 등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적은 현판을 내리는 것) 받았다.
그 후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 훼철시 철폐되었으나 1946년에 다시 제단(祭壇)을 설치하였고 1965년에는 사우(祠宇)를 복원하였다. 송시열이 쓴 「죽림서원묘정비(竹林書院廟庭碑)」를 보면, 서원이 세워지게 된 유래를 설명하면서 황산(黃山)의 위치가 호서와 호남의 중간에 위치한 관계로 서원이 들어섰다고 하였다. 서원의 건물 배치는 외삼문과 유생들이 공부하는 곳이었던 강당인 헌장당 유생들의 기숙처였던 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신문을 거쳐 죽림사(竹林祠)라 현판이 걸려 있는 사우(祠宇)가 있다. 사당 앞 좌우측에는 공적비, 중건비 등어 있으나 좌대(座臺)만 남아있는 것도 있다. 제향 인물은 조광조 이황·이이성훈 김장생·송시열 등 6인을 제향(祭享)하였는데, 이들 모두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유현(儒賢)이어서 '육현서원(六賢書院)'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 전영주 편집장
이 기획기사는 2024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을 받아서 취재한 것입니다.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사업] 인‧의‧예‧지 ‘선비의 혼’을 찾아서(2)
서원의 역사 및 제반 현황 2
한국의 서원이 중국의 서원을 벤치마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서원은 중국과 현저한 차별성을 지닌다. 단적인 예로 중국의 서원은 기본적으로 관료양성을 위한 준비기구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한국의 서원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절차탁마하는 곳인 동시에 선현의 위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일도 겸했다.
이것을 ‘존현양사(尊賢養士)’라 하는데, 학업과 과거 합격이 주목적이었던 성균관이나 학당, 향교와 달리 서원은 그곳에 배향된 선현의 정신과 뜻을 되새겨 학문을 닦고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장소였다.
논산에는 이러한 서원이 10곳이나 된다. 그중 돈암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이에 ‘선비의 혼’이 살아 있는 서원의 역사와 문화를 유교문화콘텐츠로 새롭게 생성하여 수려한 논산의 관광자원과 연계하고자 한다.
충곡서원 | 忠谷書院
충곡서원은 1692년(숙종 18)에 세워진 서원이다. 처음에는 사육신인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박팽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출발하여 육신서원(六臣書院)이라고 불렸다. 이후 백제의 계백 장군과 이 고장의 선비 김익겸을 모시면서부터 팔현서원(八賢書院)이라 불렸다. 지금은 모두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대부분 이 고장의 이름난 유학자의 제자이거나 후손들로서 충절이나 효행이 뛰어난 인물들이다. 위패는 계백을 중심으로 사육신을 나란히 봉안한 다음 좌우에 김익겸을 비롯해 11인을 배치하였다.
충곡서원은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어졌지만 1935년에 다시 세웠고, 사우(祠宇: 선현의 위패와 초상화를 모셔 두고 제사를 지내는 장소)만 남은 것을 1977년에 대대적으로 복원하였다. 서원의 구조는 서향으로 입구에 홍살문(경건한 마음으로 출입하라는 의미에서 붉은 칠을 한 문)을 세우고 바깥 대문인 외삼문,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 안쪽 대문인 내삼문, 사우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경내에는 송시열이 지은 성삼문의 유허비(역사적 사실이 기록으로만 남아 있고 유물이나 문화재가 없는 곳)가 있고, 근처에 계백의 묘가 있다.
조정서원 | 釣亭書院
조정서원은 익안대군 방의(芳毅)의 증손자 옥계(玉溪) 도정공(都正公) 이현동(李賢童)을 추모하기 위해 1978년 후손인 이성구씨가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노성‧은진‧연산향교 유림들의 발의(發議)로 건립 운영되어 왔다. 이현동은 1455년 단종(端宗)이 왕위를 물려주려하자 수차에 걸쳐 울며 간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산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농맹아(聾盲啞)’라 칭하고 일생을 통곡 속에서 생활했다한다. 노후에는 낙향(落鄕)하여 일생을 마쳤다.
효암서원 | 孝巖書院
효암서원은 원래 은진현 갈마동(현 가야곡면 두월리)에 있던 갈산사(葛山洞)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진 후 1713년(숙종 39)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은 서원이다.
처음 사당을 세울 때는 강응정의 위패만을 모셨으나 이후 서익, 김문기, 김성휘, 양응춘, 남준, 김필태 등을 추가로 모셨다. 이 과정에서 서익과 김성휘의 위패 중 어느 것의 배분이 더 높으냐를 두고 갈등이 생겨 1867년(고종 4)에 서익을 행림서원으로 옮기고 나머지 6인만 모시게 되었다.
효암서원은 본받을 만한 유생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한편 지방민을 교육하는 일을 해오다가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1868년(고종 5)에 헐어졌다가 1925년에 복원되었다. 효암서원은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당은 없고, 외삼문(바깥 대문)인 효의문(孝義門), 유생들이 생활하는 동재(東齋)와 모현재(慕賢齋)란 현판을 달고 있는 서재(西齋), 내삼문(안쪽 대문)인 삼창문(三昌門), 사우(선현의 위패와 초상화를 모셔 두고 제사를 지내는 장소)인 갈산사(葛山祠)로 구성되어 있다. 외삼문 앞 오른쪽에 성종이 친필로 쓴 '효자성균생원강웅정지려(孝子成均生員姜應貞之閭)'라는 현판이 걸린 정려각이 있다.
효자 강응정 정려(孝子 姜應貞 旌閭)
강응정은 본관이 진주(晉州), 자는 공직(公直)이며, 호는 중화재(中和齋)로서 첨화중추부사(僉和中樞府事) 의(毅)의 아들이다. 성종 1년(1470)에 효행으로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사퇴한 이후 1483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김용석(金用石), 신종호(申從護), 박연(朴演) 등과 함께 향약을 만들고 소학을 강론하였다. 또한 천성이 지효하여 모친이 병으로 눕게 되었을 때에는 3년여 동안 시탕(侍湯), 간호(看護)하며 천수를 다하도록 하였고 돌아가신 후에는 5년여 동안 시묘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성종이 친필로 현판을 써서 하사하여 정려를 세웠고, 후에 효암서원의 주벽으로 배향되었다. 정려는 정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형의 기단위에 8각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4면은 홍살로 시설하였다. 정려의 안에는 1985년에 건립되 정려비가 있고, 명정기 및 중수기가 있으며, 중앙에는 명정현판이 걸려 있다.
금곡서원 | 金谷書院
금곡서원은 김수남(金秀南)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림들이 세운 서원이다. 만치당(萬癡堂) 김수남(1576-1637)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가 강화도 남루(南樓)에서 김상용 등과 함께 분사(焚死 불에 타서 죽음)하였다. 김수남의 위패는 1687년(숙종 13)에 은진현 가야곡 조정리에 있는 금곡사(金谷洞)에 모셔졌으나 1690년 숙종 16에 그의 유풍이 남아 있는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고 1781년(정조 5)에는 성삼문과 조계명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철거되었지만 1901년에 제단을 다시 세웠고, 1974년에 서원을 복원하였다.
서원은 낮은 산의 남쪽 경사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2단의 대지를 만들고 홍살문(경건한 마음으로 출입하라는 의미에서 붉은 칠을 한 문)과 현판을 걸어 놓은 외삼문, 경모재라는 현판을 걸어 놓은 유생들의 기숙사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내삼문(內三門), 위패를 모신 사당 순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다. 서원 입구에는 김수남의 충심을 기리는 정려와 함께 김수남을 충심으로 따른 종 무작금(無作金)의 불망비(不忘碑 후세가 잊지 않도록 어떤 사실을 적어 세우는 비석)가 세워져 있다.
금곡서원은 처음부터 서원은 아니었고, 원래는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세워진 것을 훗날 다시 세우면서 서원으로 바꾼 듯하다.
죽림서원 | 竹林書院
강경읍 황산리에 위치한 죽림서원(원장 김선의)은 양호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1626년(인조 4)에 김장생을 중심으로 양호지역 양반들이 주축이 되어 이이와 성혼을 배향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죽림서원은 창건 당시 지명에 따라 ‘황산서원(黃山書院)’이라 하였으나 현종 5년(1665)에 죽림서원으로 사액(賜額: 임금이 사당·서원(書院) 등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적은 현판을 내리는 것) 받았다.
그 후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 훼철시 철폐되었으나 1946년에 다시 제단(祭壇)을 설치하였고 1965년에는 사우(祠宇)를 복원하였다. 송시열이 쓴 「죽림서원묘정비(竹林書院廟庭碑)」를 보면, 서원이 세워지게 된 유래를 설명하면서 황산(黃山)의 위치가 호서와 호남의 중간에 위치한 관계로 서원이 들어섰다고 하였다. 서원의 건물 배치는 외삼문과 유생들이 공부하는 곳이었던 강당인 헌장당 유생들의 기숙처였던 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신문을 거쳐 죽림사(竹林祠)라 현판이 걸려 있는 사우(祠宇)가 있다. 사당 앞 좌우측에는 공적비, 중건비 등어 있으나 좌대(座臺)만 남아있는 것도 있다. 제향 인물은 조광조 이황·이이성훈 김장생·송시열 등 6인을 제향(祭享)하였는데, 이들 모두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유현(儒賢)이어서 '육현서원(六賢書院)'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 전영주 편집장
이 기획기사는 2024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을 받아서 취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