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노트] 벌곡면 신양3리 최하선 어르신 “젊어서는 고생했지만 지금은 베풀며 살아요.”

놀뫼신문
2020-07-02

[인생노트] 벌곡면 신양3리 최하선 어르신

“젊어서는 고생했지만 지금은 베풀며 살아요.”


호남고속도로 하행선 벌곡휴게소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내려다보면 유유히 흐르는 천이 보이는데 그 천이 대전에서 강경포구로 흐르는 갑천이다. 그 갑천을 끼고 휴게소와 사이에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그 산이 공수산(해발 150미터)이며, 그 산 아래 터를 잡은 평화롭기 그지없는 조그만 농촌동네가 벌곡면 신양3리다. 그 마을에서 대대로 살고 있는 최하선(崔夏善, 88세)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최하선 어르신과 둘째아들


다하는 고생이라고? 고생도 고생 나름!


최하선 할머니는 17세 때 현재 계룡시 도곡리에서 이곳 벌곡면 신양3리로 시집을 왔다. 17세면 고등학교 1,2학년의 어린 소녀일 때이니, 아무리 옛날에는 일찍 시집장가를 갔다고 하더라도 어린 나이임에는 틀림없다.

할머니의 친정도 시집도 넉넉한 집은 아니었다. 특히 시집은 넉넉한 것은 고사하고 끼니 걱정을 해야만 할 정도로 없이 사는 가난한 집이었다. 농사지을 땅 한 뙈기 없는 집이었으니 그 궁핍함은 말할 수 없었다. 농촌에서 농사지을 땅이 없다는 것은 비빌 언덕 하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남의 농사를 지어주고 먹고 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은 젊어서부터 해소 병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밖에서 하는 힘든 농사일을 전혀 할 수 없었다. 특히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방 밖으로 나오지도 못할 정도로 심한 기침을 했다.

그러니 농사일은 자연히 할머니의 몫이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겨울철 땔감 마련을 위해 산으로 등짐을 지고 오르내려야만 했다. 또 가을에는 벌곡에서 많이 나오는 감을 떼어다 대전 시내에 나가 행상으로 팔기도 하였다. 할머니는 정말 억척스럽게 일했다. 그렇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고 한다.

최하선 할머니에게 그때 고생한 이야기를 부탁하자 웃으시며 ‘뭘 그런 걸 묻느냐’고 하시며 딱 한마디로 정리해주신다.

“옛날 지내온 이야기를 하면 모두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하지요. 다들 나름 고생한 이야기들도 하고요. 그런데 그 고생도 고생 나름이여. 말 멀어.”


엄한 시아버지의 며느리 사랑


할머니의 시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시고 특히 엄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가끔 술주정을 하실 때는 무서웠다고 한다. 깐깐한 성격에 무엇 하나 그냥 넘어가는 것이 없어서 시어머니나 시누이들 시집살이는 없었는데 시아버지 시집살이는 있었다고 할머니는 회고한다.

“장말 꼬장꼬장 깐깐한 양반이었어요. 술 한 잔 드시고 소리를 지르며 야단을 치시면 정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그런데 내겐 유독 잘해주셨어요. 어린 나이에 없는 집으로 시집와서 병든 남편 수발하며 남의 농사지으러 다니는 내가 불쌍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나 봐요.”

그때 시누이가 여섯이었는데, 시아버지가 밥을 남겨서 딸들을 준 게 아니라 ‘며늘아기 너 먹어라’ 하면서 며느리인 할머니를 꼭 챙겨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할머니는 ‘네, 감사합니다.’ 하고 남겨주시는 밥을 냉큼 먹었다고 한다. 지금도 고모들이 ‘아니, 다 배고픈데 그걸 나눠먹어야지 눈치 없이 아버지가 먹으란다고 다 먹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한단다. 모두 배고픈 시절의 이야기란다.

시아버지는 아픈 아들(남편) 대신 정말 일을 많이 하셨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시며, 지금도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많이 그립다고 말씀하신다.

건강이 나빴던 남편은 결국 40년 전에 일찍 돌아가셨고, 홀로 된 할머니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시어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몸이 불편했을 뿐더러 눈까지 멀어서 도움 없이는 지내기 힘드셨는데, 시아버지가 옆에서 많이 도와주셨다고 한다.


아들이시켜준제주도여행_동네어르신들과함께

둘째아들, 며느리와 함께


둘째, 무작정 상경하여 사업성공


할머니에게는 3남2녀의 자식이 있다. 없는 집에서 남편은 일찍 죽고 시부모님 모시며 살았으니 자식들은 어렸을 때부터 공부는커녕 각자도생해야만 했다. 그 중의 둘째 아들인 박현규(朴現圭,64세)씨는 중학교 1학년 때 무작정 상경하였다.

“우리 둘째는 일찌감치 집을 나갔지요. 여기서 어렵게 공부를 하느니 서울 가서 돈을 벌겠다며 무작정 나갔답니다. 어린 나이에 객지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내 가슴이 미어져요.”

둘째는 서울에서 재건대에 들어갔다. 재건대는 넝마주의를 말한다. 그는 고향의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밥을 먹으며 일했다. 그는 그 방면에서 평생 일하며 잔뼈가 굵었다. 지금 그는 파주 출판단지에서 나오는 폐지를 수집하여 제지공장에 납품하는 사업체를 일구어냈다. 한 달에 2천 톤의 물량을 소화하는 그 업계에서는 최고의 업체다.

“우리 둘째가 사업에 성공해서 이 집을 지어준 거에요. 낡고 좁은 옛집을 허물고 이렇게 궁궐 같은 집을 지어주었답니다. 가구와 가전제품을 다 새로 넣어주고 동네잔치를 했지요. 동네는 물론이고 면에 있는 아는 사람들은 죄다 불렀어요. 그날 백 명도 훨씬 넘게 다녀갔지요. 모두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며 새 집을 축하해주었어요.”

둘째 아들 박현규씨는 매년 마을주민들 30여 명을 해외여행과 국내여행을 각각 시켜드리고 있다고 한다. 중국과 백두산여행을 그동안 세 번 시켜드렸고, 제주도여행도 서너 차례 시켜드렸단다. 이는 모두 어려웠던 시절에 그 가정을 도왔던 어머니 친구 분들과 이웃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한다.

또 그는 벌곡면에서 주관하는 크고작은 행사에 적극적으로 찬조와 후원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 예로 지역축제인 철쭉제와 별빛축제 그리고 면민 체육대회를 매년 후원하고 있으며, 연말에는 지역 송년회를 개최하여 모든 지역민들과 함께 한다고 한다. 고향을 일찍 떠나 객지생활을 하다 보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커서 그렇다고 그는 말한다.



성공한 아들 덕분에 이제는 안락하고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다고 최하선 할머니는 말한다. 88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무척 건강하시다. 그래서 아직 16마지기의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올 봄에는 밭에 고추 1천3백 포기를 심었다고 한다.

“젊어서 땅 한 뙈기 가지는 게 꿈이었어요. 이젠 내 땅에다 농사를 지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표정이 너무도 밝다.

둘째 아들이 트랙터 콤바인 건조기 등 농기계를 구입해서 마을의 젊은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단다. 그 젊은이들이 할머니의 농사를 알게모르게 도아주고 있다고 아들이 귀뜸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