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딸기의 대부 남산리 손창식(孫昌植)옹] 논산에서 딸기 처음 하던 그때 그시절

놀뫼신문
2020-02-04

[논산딸기의 대부 남산리 손창식(孫昌植)옹] 

논산에서 딸기 처음 하던 그때 그시절

논산딸기의 대부 남산리 손창식(孫昌植) 최숙례 부부



손창식 옹은 1935년생으로 1945년 나이 10살에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그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간 일본인 농장 이시다와 강청(角田)에서 딸기묘목을 갖고 와서 자신의 초가집 뒤 담 밑에 심어 철마다 딸기를 맛보곤 하였다.

1950년 15살 논산중 3학년 때쯤 됐을 때 윗밭으로 옮겨 딸기 재배를 시작하였다. 재배한 딸기는 읍내의 야채가게(화영상회)를 하던 둘째누님에게 내다 팔기 시작했다. 그 당시 딸기 가격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딸기수확철인 5월만 되면 찾는 손님이 많아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처음 시작할 때 재배한 딸기 품종은 ‘복우’였는데, 한 가지 흠은 금세 물러지는 것이었다. “웅천 딸기(육보)가 좋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 아산 신창에서 부임해오신 ‘남산교회’ 목사님과 함께 아산에 가서 ‘육보’ 묘목을 구해와 재배하였다.  

초창기는 노지 재배를 하여 5월 초순부터 딱 한 달만 수확을 했다. 수확 직전까지 서리를 막아주기 위해서는 짚을 덮어주어 관리하는 게 아주 중요하였다. 이후 짚에서 비닐로 딸기를 덮어주는 덮개가 바뀌었다. 처음에는 소형으로 한 두렁만 하다가 나중에는 대형으로 네 두렁까지 하고, 장수비닐로 두껍지만 햇볕도 잘 들어서 더 좋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비닐을 덮을 때는 비닐에 대나무를 꽂아서 하다가 나중에 철재를 사용하게 되었다. 


'오복'이라는 상호가 적혀있고 구멍 뚫린 철물다라

논산딸기를 최초로 채배했던 남산리 밭



이웃동네 박상규 씨와 의기투합


1967년 32세 때가 딸기농사의 분수령이었다. 서울로 판로를 개척하게 된 것이다. 서울 염천교의 청과상회에 위탁거래를 시작하였다. 그 이전부터 인연을 맺었던 채운면 박상규 선생과 함께 하였다. 서로 손해를 방지하기 위해 각자 다른 청과상회와 거래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박상규 선생은 ‘삼육상회’,  손창식 옹은 ‘미화상회’와 거래를 텄다. 

청과상회로부터 묘종에서 수확까지 필요한 선도금을 받을 정도로 딸기는 귀한 청과였다. 매일 수확되는 딸기를 그날로 가져다 주면, 즉시 장끼(영수증)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 저녁밤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에 가서 현금으로 대금을 받았다. 

딸기 출하는 1969년까지 2년 정도는 열차편을 이용했다. 나무상자에 담은 딸기를 리어카에 실고 비포장 논두렁길을 끌고 논산역으로 가서 탁송열차편으로 보냈다. 시간 못 맞출 때는 강경역으로 가기도 했고, 나중에는 인근 채운역에서도 탁송열차편이 있어 조금 쉽게 보낼 수 있었다. 

그 후 남산리와 용화리의 딸기 수확량이 많아지자, 서울 상회에서 트럭을 주선을 해주었다. 트럭이 오면서 나무 상자에서 은색 철물 다라를 보내주면서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는다. 다라 하나는 ‘오복’(상호)이라는 빨간색 페인트로 글씨가 적혀져 있고. 철물다라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다라에 딸기를 담고, 그 위에 등급을 매긴 종이를 얹어놓고, 다시 다라 하나를 덮어 트럭에다 실어서 보냈다.(상세한 이야기는 본지 2019-03-13일자 [논산딸기의 대부를 찾아] 남산리 손창식(孫昌植)/ 최숙례 노부부 이야기 “파란딸기가 밤새이슬 먹고 새색시볼 되다니....” https://nmn.ff.or.kr/17/?idx=1676043&bmode=view 참조)


- 성수용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