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한 권의 책을 선물해 주신 선생님, 당신은 진정한 제 삶의 선물입니다.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스승의날 발원지인 강경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00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00고는 학생 모집 미달로 남녀공학으로 전환하였고 인근 도시학교에서 떨어진 학생들이 갈 수 있는 최후의 보루였다. 학교에서는 대비책으로 우열반을 만들었고 우수반을 제외한 나머지 7학급은 이미 학생들 사이에 열등반으로 구분되었다. 나는 1학년 7반, 열반이었다. 특히 우리 반에는 전기전형에 떨어져 마지못해 온 학생, 전학생, 복학생 등 두발도 복장도 제멋대로인 형형색색의 학생들이 많았다.
학기 초 우리 반을 보고 심난하다고 혀를 끌끌 차던 선생님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우리 반을 이끌 분은 30대 초반의 여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평소 온정적이었지만 수업시간만큼은 열성이었다. 독일어 단어는 첫 음절에 악센트가 오는 경우가 많다며 강조했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을 정도로 수업에 열정적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제2 외국어를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 노래를 만들어 외우게 하는 등 다양한 학습 방법을 구안하셨다. 안타깝게도 몇몇 자유로운 영혼들은 선생님의 그런 열정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생님이 수업할 때 침을 많이 튀긴다고 심계침이라 두런거리기도 했다. 선생님 말씀에 고분고분 순종하기보다는 왜요? 라고 토를 달며 반항심 가득했던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난 그런 학생들을 엄하게 지도하지 않는 선생님이 내심 못마땅했다. 무섭게 혼내는 선생님 앞에서는 올가미에 걸린 짐승새끼 마냥 옴짝달싹 못하면서 유독 담임선생님한테 못되게 구는 이 무리가 눈에 거슬렸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평등했고 규칙 안에서 강요하거나 윽박지르지 않았다. 선생님 나름의 교육관과 지도 방법이 있었으리라. 선생님은 반 아이들 한 명 한 명 생일을 챙기며 문구류 등 자그마한 선물을 주셨다. 몇몇 아이들은 쓸모없는 물건을 준다며 그런 선생님을 오히려 비웃기도 했다. 선생님은 삭막한 분위기를 바로 잡으려고 애쓰셨다. 화내고 혼내기보다는 참고 기다리며 다독여주셨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전학생, 복학생이 중심에 있었고 그들이 반 분위기를 주도하며 물을 흐렸다. 소심한 나는 그런 친구들이 못마땅했지만 말리기는커녕 싫어하는 티도 낼 수 없었다. 학업에 관심이 적었던 나는 학창시절 대부분 책을 읽으며 보냈다. 만화동아리를 만들어 만화책을 돌려 보기도 하고 소설책을 끼고 살았다. 반강제로 참여해야 하는 야간 자율학습 시간은 참 곤욕이었다. 난 주로 이 시간에 인생 경험을 쌓았다. 연애소설부터 시작하여 역사, 추리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읽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스렁스렁 깊어가는 가을 밤, 자습 감독 선생님께 걸리고 말았다. 평소 공부 안 하고 소설 나부랭이나 들여다본다고 더러 지적받고 있던 터라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감독 선생님은 마침 혼꾸멍을 내려고 벼르고 있다가 담임 선생님께 이른다고 엄포를 놓으셨다. 다음 날 잔뜩 움츠려든 나를 본 선생님은 혼내기보다는 “독서도 공부도 꾸준함이 중요하다”며 “학교 공부도 놓지 말라”고 다독여 주셨다. 1993년 12월 8일, 하굣길은 잊히지 않는다.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지는 시린 겨울, 버스정류장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평소보다 반가워하며 꽁꽁 언 어린 손을 잡아끌었다. 처음으로 만져 본 선생님 손은 참 따뜻했다. 그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서점에 들어갔다. “너 책 좋아하지? 책 한 권 골라. 선생님이 생일선물로 사줄게” 아침에 스프링 노트를 한 권 주실 때까지만 해도 으레 생일이면 챙겨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반 아이들 생일을 달력에 표시해 두었다가 그날그날 부르는 거라며 멋대로 생각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마음 속에 새겨 두셨나 보다. 생일뿐 아니라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난 존재감이 없었기에 내심 놀랐다. 선생님은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에게 온통 기운을 쏟느라 그늘에 가려진 나 같은 학생은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다. 어리둥절해서 한참을 망설이자 선생님께서 손수 책을 골라 주셨다. 유시민 작가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였다. 독서 편식이 심한 내게는 결코 쉽지 않은 책이었다. 하지만 내 생애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기에 고이 모셔두며 두고두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쯤은 있기 마련이다. 게는 심계영 선생님이 그런 분이었다.
“암울했던 고교 시절, 햇살 같은 추억을 남겨 주신 심계영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제 인생 한 권의 책을 선물해 주셨던 선생님, 당신은 진정한 제 삶의 선물입니다. 그때는 미처 말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어디선가 이 글을 보신다면 지금이라도 말하고 싶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저도 학생들에게 책을 선물하는 선생이 되었습니다.”
영산성지고등학교 최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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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동행] 논산 어느 스승·제자의 편지글
그 책은 제 삶의 선물이었습니다
올해도 스승의 날이 지났다. 논산에는 스승의 날 발원교 강경여고가 있지만, 대한민국도, 발원교도 그 취지를 잘 살려나가는 데는 미흡한 실정 같다.
이런 가운데 올해도 스승의 은혜를 기리는 공모전이 열렸다. 한국교직원공제회가 매년 주최하는 키크니(Keykney) 스승의날 사연 공모전.
여기 공모작 중에는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감동의 스토리들이 즐비하다. 그 중 스승과 제자 둘 다 논산사람인 작품이 있다. 편지를 보낸 제자는 현재 전남 영산 성지고 교감인 최수경 교사이고, 편지 속 주인공은 강경여중 심계영 교사이다.
나이는 13년차이지만 아직은 둘다 현직에 있다. 사제동행(師弟同行), 이 둘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려면 우선 한 세대인 30년 전, 당시 강경으로 돌아가 보자.
내 인생 한 권의 책을 선물해 주신 선생님,
당신은 진정한 제 삶의 선물입니다.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스승의날 발원지인 강경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00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00고는 학생 모집 미달로 남녀공학으로 전환하였고 인근 도시학교에서 떨어진 학생들이 갈 수 있는 최후의 보루였다. 학교에서는 대비책으로 우열반을 만들었고 우수반을 제외한 나머지 7학급은 이미 학생들 사이에 열등반으로 구분되었다. 나는 1학년 7반, 열반이었다. 특히 우리 반에는 전기전형에 떨어져 마지못해 온 학생, 전학생, 복학생 등 두발도 복장도 제멋대로인 형형색색의 학생들이 많았다.
학기 초 우리 반을 보고 심난하다고 혀를 끌끌 차던 선생님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우리 반을 이끌 분은 30대 초반의 여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평소 온정적이었지만 수업시간만큼은 열성이었다. 독일어 단어는 첫 음절에 악센트가 오는 경우가 많다며 강조했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을 정도로 수업에 열정적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제2 외국어를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 노래를 만들어 외우게 하는 등 다양한 학습 방법을 구안하셨다.
안타깝게도 몇몇 자유로운 영혼들은 선생님의 그런 열정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생님이 수업할 때 침을 많이 튀긴다고 심계침이라 두런거리기도 했다. 선생님 말씀에 고분고분 순종하기보다는 왜요? 라고 토를 달며 반항심 가득했던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난 그런 학생들을 엄하게 지도하지 않는 선생님이 내심 못마땅했다. 무섭게 혼내는 선생님 앞에서는 올가미에 걸린 짐승새끼 마냥 옴짝달싹 못하면서 유독 담임선생님한테 못되게 구는 이 무리가 눈에 거슬렸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평등했고 규칙 안에서 강요하거나 윽박지르지 않았다. 선생님 나름의 교육관과 지도 방법이 있었으리라.
선생님은 반 아이들 한 명 한 명 생일을 챙기며 문구류 등 자그마한 선물을 주셨다. 몇몇 아이들은 쓸모없는 물건을 준다며 그런 선생님을 오히려 비웃기도 했다. 선생님은 삭막한 분위기를 바로 잡으려고 애쓰셨다. 화내고 혼내기보다는 참고 기다리며 다독여주셨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전학생, 복학생이 중심에 있었고 그들이 반 분위기를 주도하며 물을 흐렸다. 소심한 나는 그런 친구들이 못마땅했지만 말리기는커녕 싫어하는 티도 낼 수 없었다.
학업에 관심이 적었던 나는 학창시절 대부분 책을 읽으며 보냈다. 만화동아리를 만들어 만화책을 돌려 보기도 하고 소설책을 끼고 살았다. 반강제로 참여해야 하는 야간 자율학습 시간은 참 곤욕이었다. 난 주로 이 시간에 인생 경험을 쌓았다. 연애소설부터 시작하여 역사, 추리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읽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스렁스렁 깊어가는 가을 밤, 자습 감독 선생님께 걸리고 말았다. 평소 공부 안 하고 소설 나부랭이나 들여다본다고 더러 지적받고 있던 터라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감독 선생님은 마침 혼꾸멍을 내려고 벼르고 있다가 담임 선생님께 이른다고 엄포를 놓으셨다. 다음 날 잔뜩 움츠려든 나를 본 선생님은 혼내기보다는 “독서도 공부도 꾸준함이 중요하다”며 “학교 공부도 놓지 말라”고 다독여 주셨다.
1993년 12월 8일, 하굣길은 잊히지 않는다.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지는 시린 겨울, 버스정류장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평소보다 반가워하며 꽁꽁 언 어린 손을 잡아끌었다. 처음으로 만져 본 선생님 손은 참 따뜻했다. 그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서점에 들어갔다.
“너 책 좋아하지? 책 한 권 골라. 선생님이 생일선물로 사줄게”
아침에 스프링 노트를 한 권 주실 때까지만 해도 으레 생일이면 챙겨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반 아이들 생일을 달력에 표시해 두었다가 그날그날 부르는 거라며 멋대로 생각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마음 속에 새겨 두셨나 보다. 생일뿐 아니라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난 존재감이 없었기에 내심 놀랐다. 선생님은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에게 온통 기운을 쏟느라 그늘에 가려진 나 같은 학생은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다. 어리둥절해서 한참을 망설이자 선생님께서 손수 책을 골라 주셨다. 유시민 작가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였다. 독서 편식이 심한 내게는 결코 쉽지 않은 책이었다. 하지만 내 생애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기에 고이 모셔두며 두고두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쯤은 있기 마련이다. 게는 심계영 선생님이 그런 분이었다.
“암울했던 고교 시절, 햇살 같은 추억을 남겨 주신 심계영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제 인생 한 권의 책을 선물해 주셨던 선생님, 당신은 진정한 제 삶의 선물입니다. 그때는 미처 말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어디선가 이 글을 보신다면 지금이라도 말하고 싶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저도 학생들에게 책을 선물하는 선생이 되었습니다.”
영산성지고등학교 최수경
이 제자의 글을 받은 스승은 간단한 답글을 썼다.
별빛처럼 곱고 아름다웠던 추억 한 조각을 꺼내 선물로 준 따뜻한 마음을 기꺼이 받습니다.
정년퇴임까지 2년 정도 남았습니다.
참교사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 강경여중 교사 심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