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초대석] 우리 시대 ‘작은거인 도기정’의 ‘인생노트’

놀뫼신문
2023-06-10

[표지초대석] 도기정 논산시주민자치협의회장

우리 시대 ‘작은거인 도기정’의 ‘인생노트’






유학 오경의 하나인 ‘예기’에서는 “60세 기(耆)는 ‘남에게 일을 시켜도 되는 나이’이고, 70세 노(老)는 ‘자기 일을 넘겨주고 은퇴하는 나이’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기로(耆老)’가 되어도 물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임금으로부터 ‘궤장(의자와 지팡이)’을 하사받는 것이다. “존경받는 의미와 함께 은퇴하지 말고 지팡이를 짚고 출근해서 의자에 앉아서 근무하라”는 뜻이다.

4차산업혁명의 새로운 문물들이 미끄러져 오는 지금, 사회는 갈수록 양극화되며 가파러지고 있다. ‘궤장’의 철학과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에 본지는 고향 연산면에서 젊은 시절부터 신뢰로 점철되었던 ‘작은거인 도기정’의 삶을 되짚어본다. 그의 삶 속에는 온몸으로 살아온 작지만 위대한 철학이 용해되어 있다. 그가 살았던 삶의 철학과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해 본다.




 


[어렸을 때부터의 호칭, ‘회장’]

도기정 회장의 고향은 연산이다. 해방 후인 1948년에 일본에서 살던 할아버지가 귀국하여 연산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모두 그랬듯이 그의 가족도 가난한 하늘바라기 농사꾼이었다. 비가 안 와도, 또 너무 많이 와도 하늘만 바라보며 배를 곯아야만 했었다. 그 어려운 가정에서 도기정 회장은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6년이었다.

6.25 한국전쟁 직후이다 보니 그의 어린 시절 역시 가난이란 딱지를 떼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는 초등학교와 마을 서당을 다녔고 조금 커서는 야학당을 다니며 어렵게 공부를 했다. 그에게 늘 따라붙어 다니는 평생 호칭인 ‘회장’이란 소리도 17살 때인 야학당의 학생 대표를 맡으면서, 그리고 마을청년회인 4H클럽의 회장을 맡으면서였다.

그는 어느 모임에 있어서든 스스로 나서지 않아도 리더로써 인정을 받았다. 항상 등 떠밀려 회장직을 맡았다. 남들보다 체격도 작고, 목소리도 작고, 학력, 재력이 부족했지만 그에겐 믿음직함이란 것이 있었다. 그는 그 믿음직함을 포인트처럼 평생 차곡차곡 쌓아 주위에 신뢰(信賴)라는 것으로 보답하였다.

그는 20대 중반에 대전으로 나가 건축현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도 짧은 경력임에도 그리고 나이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등 떠밀려 ‘반장’으로 일했다. 그때 같은 고향 출신의 여인(하난희)과 결혼하였다. 담배 농사를 짓던 부모님이 대전에 작은 집도 마련해주셨다.

그러나 그 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친구에게 차를 빌려주었는데 그만 그 친구가 운전하다가 인사사고를 낸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차주로서 그 책임을 다하다가 집을 처분해야만 했다.

“제 인생에 있어서 그 집을 지키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립니다. 아마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귀한 줄 모르고 쉽게 잃어버린 것 같아요. 사람에게는 귀한 것을 갖고 지킬 때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그 사건 이후 그는 월세생활을 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아내에게, 그리고 부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는 더욱 열심히 일을 했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생활하였다. 그동안 그가 대전 여기저기 지은 빌라만 40여 채 정도 되니 정말 열심히 뛰어다니며 일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손익을 따져보니 빚만 안지고 산 정도였다고 한다.


[연산으로의 회군(回軍)하며 귀향]

하루는 친구와 함께 문상을 가기 위해 멀리 장거리운전을 하며 차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끝에, 그 친구가 양돈 사업을 권하는 것이었다. ‘돼지를 키운다?’ 그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철석같이 믿는 친구의 말이었기에 “어떻게 하면 시작할 수 있느냐” 그가 물었더니, “빚만 없으면 시작할 수 있다”고 그의 친구가 말했다.

그는 모아놓은 돈도 없었지만, 빚도 없었다. 그때가 46세 때이니 새로 무엇을 시작하기에는 애매한 나이이기도 했다. 만약 잘못되면 재기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늦은 나이었으나, 한 번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마구 솟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전적으로 친구 믿고 시작한 ‘양돈 사업’이었다.

“저는 그 당시를 표현할 때 회군(回軍)하는 심정이었다고 말합니다. 남들은 귀향이니, 귀농이니 말하지만 제게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는 대전에서 꽤 큰 공사 수주를 받아놓은 상태였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양돈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가족에게 말했을 때 너무 위험한 결정 아니겠느냐고 모두 반대하고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결심을 굽히지 않고 친구의 권유대로 대전생활을 접고 ‘연산으로 회군’하였다.


[그의 가장 큰 자본은 친구]

그의 생각처럼 새로 시작하는 사업이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 시작하는 것이니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도 각오한 바였다. 무엇보다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 돈 들어갈 곳은 계속 나오는데 수익은 창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친구에게 돈 부탁을 했다. 그는 며칠 후 그 돈을 마련하여 두말없이 건네주었다.

그는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 하더라도 다달이 이자 계산만큼은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아 그리하려고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할 수 없이 이자를 미루며, 친구에게 “이자를 못주어 미안하다”고 그가 말했다. 그 친구는 “개의치 말라”고 하며 기다려주었다. 그뿐 만이 아니었다. 음으로 양으로 사업 전반에 대해 그를 챙겨주었다.

나중에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고 여유가 생기자마자 친구에게 원금은 물론 이자까지 모두 갚았을 때, 그는 비로소 그 돈이 대전에서 사채를 끌어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그의 친구가 그를 믿고 묵묵히 기다리며 이자를 대신 갚아주었던 것이다. 그는 눈물이 나도록 고맙고 그 친구가 든든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축산과장으로 있던 공무원 친구와 도드람조합장 친구는 그에게 필요한 정보와 행정적 지원 등을 아끼지 않았다. 만일 그들의 전폭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양돈업을 하겠다는 엄두도 못 냈을 것이며, 또 시작했었던들 큰 어려움에 봉착하여 자칫 좌초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돌이켜보건대 그 친구들이 현재의 나를 있게 한 전부였고, 평생 은인이며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며, “내가 나름 정착하게 양돈업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전적으로 그 친구들 덕분입니다.”라고 말한다.





[‘사포농장’의 경영철학]

도기정 회장의 양돈 사업장 상호는 ‘사포농장’이다. 연산면 사포리에 위치한 까닭에 누구도 알아보기 쉽게 농장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심플한 상호명이 말해주듯 그의 경영철학 또한 너무도 상식적이고 단순하다.

그는 양돈업을 시작하기 위한 어려웠던 행정적 절차와 허가를 회상하며, “내가 이 지역에서의 양돈업을 시작한 마지막 사람이지 싶습니다. 그 이후로는 아무도 허가를 못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양돈업 진입 자체가 너무 힘들지요.” 이는 민원 때문이기도 한데, 요즘처럼 환경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다보니 더욱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도 회장은 꾸준히 생산성을 높여왔고, 인력관리도 잘 되어 20여 년의 양돈 사업을 하는 동안 큰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의 이런 경영 능력은 대전 건축 현장에서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아마 양돈업을 초년부터 바로 시작했다면 실패했을 겁니다. 젊은 시절 건축 현장에서의 거친 사회 경험이 제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고 경영의 노하우를 터득시켜 주었지요. 인력을 관리하는 것도 생산성을 높이는 것도 모두 숫자로 나타납니다. 경영은 결국 이런 숫자를 읽는 능력인데, 저는 그것을 건축현장에서 배웠습니다.”

‘무엇이 잘 된다더라.’ ‘무엇을 하면 남는다더라.’ 하는 식의 남들의 이야기나 시류를 그는 결코 좇지 않고 숫자로 나타나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그것을 믿었다고 한다. ‘데이터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믿음이 곧 그의 ‘경영철학’이었던 것이다. 그의 이런 경영방침이 시종일관 유지되고 있는 것이 사업성공의 비결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런 그에게도 어려운 시기가 없던 것은 아니다. 한 번은 그가 총무로 있던 사찰인 광제사의 스님에게 현재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한탄하며 “모든 것을 정리하고 스님이나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그 스님 말씀이 “‘주인이 되느냐, 머슴이 되느냐’는 모두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한 말씀에 그는 크게 깨우쳤다고 한다.

‘맞아.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머슴으로 살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야겠구나.’ 해서 그는 이후 모든 직원이 주인으로 농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농장에는 문이 두 개다. 농장으로 들어가는 밖의 문은 사장인 자신이 거기까지만 들어가고, 돈사로 들어가는 안의 문은 농장장만 들어간다.

“나는 밖의 일만 보고 안에는 내가 안 들어갈 터이니 농장장 당신이 주인으로 알아서 하시오.” 그 농장장은 기능올림픽에 나가 시계 부문 금메달을 획득한 친구인데, 초창기에 들어와 18년째 함께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돼지들에게 사료 한 번 준 적도 없고, 주사 한 번 놓은 적도 없다. 그것은 사장인 자신이 몰라야 직원들이 더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가, 농장 직원들은 모두 오래 근속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농장에서는 누구도 제 눈치 안 보고 일합니다. 사장이 농장에 들어오면 앉아서 쉬고 있다가도 일어나 일하는 척하는데, 우리 농장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습니다. 모든 직원이 제집에서 주인처럼 편하게 일하지요. 일도 주고 그에 따른 권한도 그들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전문 축산 경영인으로 변신]

2004년 그는 ‘축산인으로 논산에 와서 일 좀 해보라’는 주위의 권유를 받았다. 그가 양돈을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양돈협회 논산지부장> 직을 수락하였고 그때부터 축산 경영인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도 역시 영락없이 등 떠밀려 하게 된 일이었지만, 그에게 경영의 시야를 넓혀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논산에는 과거 약 100여 곳의 양돈 농장이 있었는데, 그 수가 점점 줄어 이제는 60여 곳의 농장만 남아있다. 그만큼 그 사업을 지속하기 힘들다는 것이고, 또 진입하기도 수월치않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가 지부장으로서 할 일은 더욱 많다는 얘기가 된다.

앞서도 지적하였듯이 양돈업은 주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업이다. 민원도 많고 그에 따른 인근 주민들과의 협조나 조율, 그리고 행정적 협의도 어렵다. 그만큼 행정기관의 허가도 힘들고 제약도 많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나서서 현장과 관을 발로 뛰어다니며 앞장서 해결하고 다녔다.

“양돈업을 보면 모든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는데, 유독 환경문제만큼은 변화가 별로 없습니다. 수익 일부분을 환경을 개선하는데 꾸준히 투자하면 민원도 줄고 그것이 나중에는 수익성과 직결되는데 말입니다.”

그는 주위의 불만을 해소하고 잘 지내야 사업도 잘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돈사 청소의 횟수를 늘리고, 방제방충작업을 더 철저히 하고, 돈사 주변의 풀 깎기 등 환경정비를 더 철저히 함으로써 농장의 가치를 스스로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노력은 이익 창출로 나타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지론이다.

이러던 중에 그는 논산계룡축협의 이사직을 권유받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4년 임기제의 이사를 그는 2회 연임하였는데, 이는 대의원을 거치지 않고 이사회에 진입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한다.




[주민자치의 일선에서]

2015년, 그는 연산면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주민자치회로 바뀌면서, 2019년 논산 주민자치협의회 회장에 권유를 받고 출마해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논산시 15개 읍면동을 대표하는 주민자치협의회 회장의 임기는 2년인데, 현재 그는 연임하여 2회째 회장직을 맡고 있다.

주민자치협의회 회장과 축협 이사의 일 중 어느 것이 더 힘드냐는 필자의 질문에 그는 아무래도 주민자치협의회 일이 아니겠냐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왜냐면 축산은 하나의 전문분야이고 또 부딪히는 문제도 한정적이고 예상 가능한 것에 반해, 주민자치협의회의 일은 각계각층의 다양한 문제를 협의하고 조정하는 일이니 더 힘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관치(官治)가 작동 안 되면 혼란이 오고, 그것이 과(過)하면 민의(民意)가 훼손되지요. 그래서 주민자치협의회 회장으로서 관을 대할 때는 항상 상호 균형을 잡으려고 나름 노력하고 있습니다.” 

항상 조율과 협의를 통해 계층 간 소통을 중요시 여기는 그는 회장으로서 민(民)의 의견과 생각을 듣고 행정기관에 반영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한다.

더구나 그 어느 때보다 계층 간, 세대 간 대립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요즘에는 더욱 조심스럽다고 말하는 그는 이럴 때일수록 통합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화합하는데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강변한다.

“화합을 이끌고 통합으로 나가야 마땅한 정치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내 편, 네 편 하며 갈라치기하는 모습들을 심심찮게 보게 됩니다. ‘너는 누구 편이냐?’ ‘나 좀 도와달라.’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주민자치의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참 난감하고 그런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물론이요,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상대편을 비판하고, 비방하는 그런 말들을 삼가고 아껴야 하며, 더 나아가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봉사로 내 삶터를 아름답게]

그는 연산면과 함께 2018년 ‘환난상휼(患亂相恤)’이란 표어를 내걸고 지역에서 푸드뱅크 형식으로 식자재를 기부받아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판매하여 발생한 수익금을 지역의 복지사업에 쓰는 봉사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이 사업으로 그는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복지의 사각지대라 할 수 있는 차상위계층을 대상으로 수익금의 일부를 현금으로 나눠주기도 하고 그들이 사는 낡은 주택을 보수, 수리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내 삶터인 지역을 위한 봉사와 주민자치의 일선에서 뛴 노력으로 2022년도 ‘논산시민대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던 그가 지난해 년말 조합장 선거 2달 남짓 남겨놓고 출마선언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반신반의(半信半疑)했다. 당시 그는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제가 출마한 것은 조합장에 당선이 되면 더욱 좋겠지만, 그보다도 20여 년 축산업에 종사하면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서서 입니다. 그 이야기를 이번 기회를 통해서 꼭 조합원들께 전달하고 싶습니다”

선거 후 만난 도기정 회장에게 낙선의 위로는 거치장스러운 사치품이었다. 그는 “2달 준비해서 어떻게 조합장이 될 수 있겠습니까?”고 반문하며, “이번 기회를 통해서 또 하나의 좋은 경험도 쌓았고, 그동안 생각해 왔던 조합의 새로운 가치를 충분히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다.”고 이야기한다.  

진정 이 시대의 ‘작은 거인’이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서울로, 큰 도시로 나가려고만 하는 모습들을 보며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오히려 지방에 꿈이 있고 또 계획이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기회가 더 많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큰 도시에 비해 지방의 일자리가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꿈이 있고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지방에는 그것을 지원해주는 많은 사업이 있습니다. 예산은 적지만 사람이 적으니 그것의 혜택을 받을 확률도 높은 것이지요. 막연하게 대도시로 나가는 것보다는 지방이 젊은이들에게 훨씬 기회의 땅입니다.”

“빠른 결과를 얻으려 하지 말고 5년, 10년 꾸준하게 꿈을 향해 나아가면 반드시 그 꿈은 이루어질 것이며, 그 꿈을 지방에서 펼쳐보라”는 젊은 인생 후배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 전영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