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노트] 광석면 항월리 이영순(李榮順)님 "여태껏 나를 지탱시켜 준 힘, 남편과 신앙"

놀뫼신문
2019-09-04

[광석면 항월리 이영순(李榮順)님의 인생노트] 

여태껏 나를 지탱시켜 준 힘, 남편과 신앙


                            

  이영순(李榮順)  

  • 1950년 경기도 가평에서 출생(70세)
  • 1973년 결혼(24세)후 1남 2녀
  • 2018년 남편 박흥순 사별(당시 73세)


논산 시내에서 차를 몰고 십여 분 가면 나오는 곳, 광석면 항월2리! 기자의 고향이 광석이어서 넓은 들판과 푸르름이 익숙하고 편안했다. 동고동락 한글 선생님이 설명해준 이영순 님은 “즐겁게 한글공부 하시고, 도전을 마다하지 않으시며, 성가대 찬양활동을 낙으로 삼고 계시는 분”이었다. 그런 분의 얼굴을 그려보며 도착했을 때 이영순 님은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기다리고 계셨다. 동글동글하고 미소 담은 얼굴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아들만 끼고 살았던 시어머니 질투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이영순 님은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나 강원도로, 다시 경기도 포천으로 이사를 다녔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행복한 큰 딸이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친구들과 놀러다니고 극장 구경하기를 좋아하고 원두막에서 과일 먹으러 다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나 보다. 

때가 차서, 24살때 논산으로 시집을 오게 된다. 작년에 고인이 되신 남편분의 누나가, 이영순 처녀의 고향에 시집와 지내면서 자기 동생을 중신했기 때문이다. 남편의 이름은 박흥순, 네 살 위였다. 논산으로 시집 와보니, 시댁은 가난한 살림에 여덟 형제, 그리고 시어머니가 세 분이나 됐던 곳이었다. 위의 시어머님들은 돌아가시거나 안 계시고 남편을 낳아준 시어머니만 계셨는데, 이 어머니가 또한 32살에 과부가 되신 분이었다. 

이영순 님은 ‘시어머니’라는 단어에서 잠시 멈추셨다. 한숨!

“시어머님도 참 대단하신 분이었지요. 세 번째 부인으로 시집와서 위에 네 명 자녀들 모두 건사하고 시집장가 보내고, 당신이 낳은 네 명까지 새우젓 팔아가며 알뜰살뜰하게 잘 키워 내셨으니까요. 그런데 나의 시어머니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과부가 되어, 큰아들인 나의 남편을 남편 삼아 의지하고 사랑한 분이었어요. 얼마나 아들을 사랑하는지 나와 남편 사이 질투가 말도 못했죠.” 

“같이 앉아 이야기 하는 꼴을 못 보시고, 밤에 잠을 잘 때도 대화를 할 때도 감시가 끝이 없었어요. 남편과 이야기를 나눌라치면 ‘내일 일할 사람들이 잠 안 자고 이야기나 한다’ 야단치고, 일찍 자려고 하면 ‘일찍 잔다’ 야단치고..... 어디에 마음을 놓을 수 없이 불안하게 그렇게 말이에요.  남편 앞에서 다리 좀 펴려고 하면 유리창으로 언제 보시고 호통을 치셨어요. ‘감히 남편 앞에서 다리를 편다’고.... 시어머니는 남편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너무 달랐어요.”

 “그러니 내내 기 죽어서 아픈 사람처럼 그렇게 살았죠. 중간에 중신한 사람을 얼마나 원망하고 살았겠어요. 나를 구박한 거 다 말하자면 하루가 모자라. 남편은 중간에서 누구 편을 들을 수 없어 곤란해하다가 효자니까, 조용히 살려니까 어머니 편을 들었어요. 나중에서야 어머니 말이 억지이고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는 ‘아, 그 말이 다 사실이 아니구나’ 하고 아는 정도였으니까요~’


시어머니 시집살이보다 무서운 시누이 등살


그 당시 시어머니의 무서운 시집살이에 지쳐 며느리 이영순은 말라만 갔다. 보는 사람마다 “어디 병이 있느냐?”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시집살이가 고추보다 매웠어도 길지는 않았다. 시어머니가 환갑에 풍이 왔기 때문이다. 4년을 몸져 누워 계신 동안 그 병수발을 다하게 하고 결국 세상을 뜨셨다. 

“시어머니가 마지막 4년은 젊으신데, 환갑밖에 안 되셨는데 풍이 와서 몸져 누워 구들장 신세만 지셨어요. 못 움직이시니까. 대소변은 내가 다 받아냈죠. 밖에 나가서 벼농사 짓다가 돌아와 보면 한바탕 일을 치러놓곤 했어요. 아무리 닦아내도 그 냄새가 가시지 않는 거에요. 오죽하면 시누이가 엄마 보러 와서는 ‘냄새 난다’고, 방에 들어와 보지도 않고 마루에 걸터앉아서 이야기 나누다가 돌아가겠어요? 그런 생활 4년여~ 참고 참다 보니 마음마저 억눌려 지내게 되었지요.”

시어머니가 떠나가신 시집살이 빈자리는 시누이가 톡톡히 메꿔주었다. 출가한 본인에게 시집살이 시키는 건 다 참고 이겨낼 수 있었지만, 친정엄마를 괴롭히는 것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경기도 친정집 고향은 시누이가 시집 가서 살고 있는 한 동네였기 때문이다. 

“친정에 한번 왔다 가면 마음이 편해져야 할텐데, 그러기는커녕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딸을 그렇게 키워서 보냈다’면서 사람들 많은 데서 우리 어머니에게 퍼붓고 힘들게 했대요. 그러니 우리 어머니가 시누만 보면 심장이 떨려서 심장앓이를 다 하셨다니까요.” 


박흥순, 이영순 부부 뒤쪽이 큰아들 박영석 내외



일하다가 돌아오면 밤11시


이영순 님은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논산으로 시집와 시어머니에게 눌려지내는 동안 시어머니가 무서워 교회에 나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예배당을 다니지는 못했지만 이영순 님을 마음 속 든든히 붙잡아 준 것은 믿음이었다. 자식들 낳아 키우고, 남편과 열심히 일을 하여 논을 4마지기에서 30마지기로 불리는 동안, 신앙이 아니었다면 그 고된 삶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내가 경기도 포천에 살 때는 쌀밥만 먹었지요. 보리밥 구경도 못해봤어요. 그런데 여기로 시집을 와서 보니, 겨울이었는데 웃방에 쌀은커녕 고구마만 몇 개 있는 살림이었어요. 매일 보리밥을 해서 먹는데 시어머니가 그마저 트집을 잡아대서 참 힘들었어요. 안 그래도 퍽퍽한 살림에 시어머니까지 부드럽지 않으니.....”

10년 시집살이가 30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시집을 와보니 집 재산은 논 3마지기가 다였다. 일단 패물을 팔고 빚을 얻어 논을 4마지기 사고 그 빚을 갚아 나가고, 그렇게 30마지기로 늘리고 딸기 농사를 짓는 동안 손발이 닳도록 고생을 해야 하셨다고 한다.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아이들 꼬물꼬물할 때였어요. 우리 부부가 일하러 나갈 때는 집에 밥을 해놓고 나갔죠. 밤 11시나 돼야 일 마치고 돌아왔으니까요. 그렇게 농사 짓고 돈 벌고 아이들 키웠어요. 우리가 딸기 농사를 지은 지 30년이네요.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3년 전 우리집 양반이 느닷없이 아프다고 하더라구요. 큰딸, 작은 사위가 수소문해서 서울 삼성 병원에 한 달 만에 입원이 되어 정밀검사를 해보니 폐암 초기~2기라는 거예요. 담배 끊은 지 20년이나 됐는데도 폐암 선고를 받았어요.”


남편이 물려준 딸기밭과 천만원 십일조


남편은 초기에 발견된 폐암을 잘 치료하여 1년간 등산도 다니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작년 5월 어느 날 오후 4시쯤 갑자기 열이 올라 해열제와 얼음주머니로 내려도 계속 열이 났고.... 그렇게 입원하고 이틀밤 자고 사흘 만에 돌아가셨다. 젊었을 때 당신도 모르게 앓고 지나간 결핵이 있었는데, 그것이 폐암 치료하면서 약해졌다가 패혈증이 와서 숨도 못 쉬고 가래도 못 밭고,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둘이서 딸기농사를 지으며 신앙생활도 함께 하고 참 열심히 살았다. 그 덕인지 노후에는 딸기농사가 참 잘 되었다. 딸기농사를 하우스 7동 짓다가 힘들어서 수경재배 3동으로 줄이고, 이 하우스 고랑이 총 16고랑, 둘이서 열심히 지으니 농촌에서 벌기 힘든 충분한 수익이 나왔다.

부부가 함께 벌어서 신나게 쓰고, 축제하면 축제 가서 구경하고, 이렇게 두 분은 노후에 더없이 행복해졌다. 특히 남편은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게 되어 1년 52주 중 새벽기도와 주일기도를 빠지지 않았고, 십일조를 잘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농사를 다 짓고 나면 집식구에게 계산기 가져오라고 해서 그간 번 돈의 십일조를 정확히 계산한다. 그렇게 일 년에 천만원이라는 십일조를 내기에 이르렀다. 바깥어른은 딸기 따러 고랑 돌아다니면서도 “ 아버지 천만원, 아버지 천만원이요” 하며 십일조를 염두에 두고 일을 해나갔다.

남편이 병석에 눕자 이영순 님은 삶이 허무하고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했다. “나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지요? 당신 없으면 농사도 어렵고, 이제 무얼 하고 살지요?” 남편은 떠나가기 전 유언 비슷하게 당부하였다. “봉사하며, 성가대 찬양하며 그렇게 살으라”고. 남편이 홀연히 떠나간 후 1년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만큼 큰 상실감에 휩쓸렸다. 와중에 믿음과 기도의 힘으로 모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겨내었다.


두 딸의 외손자 (첫째 1남1녀, 둘째 2녀)

막내딸 가족

외손녀(막내딸의 딸)


아들 손자 며느리 함께 사는 복


“우리에게 아들 하나 딸 둘이 있어요. 큰아들이 참 성격도 좋아요. 어릴 때 집이 여의치 않아서 튀밥을 못해줬는데 그걸 너무 먹고 싶어 해도 못 사줬거든요. 그러면 이 아들은 ‘에이 그럼 다른 집에 가서 좀 먹고 와야겠다’ 하고 다녀오는 아이였어요. 그런 아들이 가정을 꾸리고 천안에 살면서 참 열심히 살아도 사업이 잘 안 되었어요. 실패를 몇 번 겪는 동안 우리 부부는 아들을 위해 딸기 하우스를 물려주고 싶었지요. 아들 내외에게 우리 생각을 말하고 몇 달 지나자, 아들 내외가 내려오겠다고 해주어서 우린 정말 기뻤어요.”

“우리가 평생 모은 모든 재산을 아들을 위한 딸기 하우스에 투자했어요. 훗개강(노성천) 건너 부적면에 사두었던 우리 논 12마지기에다 우리 하우스를 지었어요. 수소문을 해서 가장 좋은 딸기 하우스를 일류로 자동으로, 수경재배로, 딸기모까지 다 사서 아들 내외를 불렀지요. 우리 며느리가 도시에서 살다가 이렇게 시골에 와서 농사를 지으려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며느리가 아이를 학교 보내고 오면 9시가 넘으니까, 내가 그 전에 가서 두 시간씩 딸기도 따주고 그래요. 며느리가 어떻게 하든지 나는 간섭하지 않아요. 내가 시어머니와 함께 산 시간이 있었기에, 며느리한테만큼은 간섭 안하려고 해요. 우리 살던 시대와 다른 시대를 사니까, 당연히 다르지요.”

며느리에서 이제 시어머니가 된 이영순 님은,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술회한다. 

“나는 원래 활발한 성격이었어요. 그런데 시집오고 나서 시집살이하면서 말 한 마디 어디 가서 제대로 못하고 대화하는 법도 잊어버리고.... 그렇게 일만 하고 살다가, 이제 살림이 피고 남편과 농사짓고 교회 다니고 하면서 ‘진짜 나’를 찾은 거예요!”


이영순 두사감리교회 권사

남편 박흥순과 즐거운 여행


덤인생, 건강과 행복 날마다 일구며 


“15년 전에 심장 수술을 한번 받았어요. 그 때 다 죽는다고 했는데 이렇게 살아서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어요. 일주일에 두 번 수영장 가고, 회관에서 일주일 두 번 운동해요. 한글 공부도 하고, 등산도 다니면서 활발하게 지내요. 내 몸이 건강해야 하거든요. 나 아픈 건 괜찮은데, 내가 아프면 온 집안이 뒤집히니까요. 그래서 더더욱 건강관리를 하고 있어요.”

“교회에서도 여성부 회장을 7년째 맡고 있어요. 봉사하는 삶, 기도하는 삶의 기쁨을 아니까요. 마을회관에서도 1년째 일주일에 두 번씩 사람들 밥을 해주고 있어요. ‘강옥인’이라는 분과 함께 밥을 짓고 반찬을 해서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일이 저에게 큰 보람이고 기쁨이에요^^ 우리 아들 딸들 다 자식을 둘씩 낳아서 잘 살고 있어요. 하나뿐인 아들은 고향 내려와 제 자식들 자라는 것을 내가 볼 수 있게 해주고, 자식들이 주는 용돈에다 노령연금까지 합하면 정말 룰루랄라~예요. 부족함이 없이 행복한 생활이죠.”

“앞으로 건강관리 잘 하고, 믿음생활 열심히 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고, 성가대 찬양을 하며 기쁨을 누리고 그렇게 살 거예요. 제 삶이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내가 힘들었던 젊은 시절을 이겨낼 수 있었던, 나에게 힘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믿음과 신앙이랍니다. 기도의 힘이었어요.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침에 일어나면 온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온가족을 위해 기도해요.”

긴 얘기를 마무리하는 이영순 님의 모습은 정말 편안해 보였다. 힘든 시절을 긍정적인 믿음으로 이겨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끌어당겨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이렇게 행복한 현재를 만든다는 것을 느끼고 확인할 수 있었다. 

이영순 님은 스스로 행복을 만드시는 분이다. 괴로움이나 고통스런 기억에 파묻히거나 그것을 계속 현재에도 있는 것처럼 만들지 않고, 아픔은 다 잊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소중한 일들에 집중하는 태도야말로 그 분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가장 큰 힘이었다. 집에 돌아와 이야기를 정리하는 내내, 그분의 미소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 최해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