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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경”, 우리에게는 ‘논산아리랑’으로 그의 이름이 친숙하다. 그는 지현아 명창과 함께 ‘논산아리랑’을 부르며 재능을 기부했고, 그 음원을 위너뮤직에 출시하며 ‘논산아리랑’을 세계 무대에 올려놓았다. 이러한 정 경이 한 걸음 더 우리 곁으로 다가오니 마음이 설레인다. 돌아오는 가을, 계룡시 홍보대사에 위촉되면서 정 경의 날개짓으로 변화될 계룡시의 새로운 문화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클래식계의 BTS로 불리는 정 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술의 높은 벽을 허물고, 무대 위의 객석과 하나되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다. EBS FM <정 경의 클래식 클래식>으로 매일 오전 10~12시 청취자와의 만남을 4년째 이어가고 있으며, 미국 대기업 워너 뮤직 상임 이사를 거쳐 현재 ESG 전문 기업 (주)리브위드 전무(CMO)로 재직 중이다. 하나금융그룹 함영주 회장은 “정 경이 창출해 내는 다양한 콘텐츠들은 어떠한 형식 속에서도 관객에게 감동과 울림을 주면서 진정한 소통을 이끌어 낸다”며, “철저하게 관객 중심적인 콘텐츠를 통해 딱딱하고 어려운 클래식을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없이 편안하게 즐기는 모습은 정 경의 ‘오페라마’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삼성생명의 이주경 부사장은 “정 경의 ‘오페라마’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는 기존의 것들을 연결해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이라며, “오늘날 모든 산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작품을 상품으로 만드는 예술 상인 정 경의 이야기는 많은 감동과 울림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소개한다. 이에 이번호 [표지초대석]에서는 성악가이면서 기업의 임원, 방송인, 교수, 그리고 작가로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정 경의 메버릭적인 삶을 솔직하고 진정성있게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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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기홀 공연 사진
음악이 찾아온 고3 어느 날
정 경은 4대째 독실한 신앙을 이어 온 집안에서 태어났다. 장남이었던 정 경의 아버지는 어린 동생들의 학업을 돕기 위해 정작 본인의 학업은 포기했고, 이후 서른이 넘어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래서 정 경이 초등학생에 다닐 무렵, 아버지는 가난한 전도사였다.
정 경은 “저의 유년시절은 학업보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방황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며, “다행히 체격이 좋고 운동 신경이 뛰어났던 저는 중학교 육상부에 들어가게 되었고,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더욱 공부와 멀어졌다”고 회상한다.
그래서 그는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제출한 공고, 농고, 상고에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대전의 명문 고등학교 중 하나인 서대전고등학교가 그해 신입생 모집이 미달되어 정 경이 당당하게(?) 서대전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정 경 어머님은 “부디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무사히 고등학교만 졸업하자”면서 큰아들의 인생 목표를 고등학교 졸업으로 정해 주셨다. 그러던 고3 여름 어느날, 어머님이 “성악으로 대학 진학이 가능하다”면서, “독일 가곡과 이탈리아 가곡을 잘 외워 부르기만 하면 대학 진학의 길이 열려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결국 어머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고, 그렇게 시작된 노래 연습부터 3개월이 지난 후 서울의 유명한 교수님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당시 교수님은 “학생의 목소리가 굉장히 좋네요. 그런데 예술을 하려면 부모님의 재력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런 금전적인 여유가 없으시다면 음악이 아닌 다른 길로 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제가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음악을 하고 싶어서도’,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해서도’ 아니다. 그날 버스 차창에 비친 어머니의 눈물이 제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렇게 훌륭한 성악가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이후 광인처럼 노래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어머님을 좌절시킨 그 교수에게 ‘당신이 틀렸다’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며 ‘음악이 찾아온 고3 여름 어느날’을 회상한다.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고등학생 시절 사진
카네기홀 포스터
이탈리아의 ‘오페라’ 미국의 ‘드라마’, 대한민국은 ‘오페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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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은 장르를 만들고, 후진국은 콘텐츠를 채운다
정 경은 이른바 주류가 걷는 길을 걷지 않아도 성공 가도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산 증인이다.
대한민국 카리스마 넘치는 음악가로 활동하면서 기업의 최고 마케팅 책임자이자 혁신적인 공연기획자, 소탈한 방송인, 모교의 아카데믹한 대학교수, 작가에 이르기까지 5개 이상의 직업으로 살아가면서 클래식 음악과 대중 음악, 예술과 경영, 예술과 사회 등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에 늘 위치해 있다. 그렇게 서로 다른 두 문화가 충돌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프런티어 경계인으로서 기존에 없던 ‘혁신’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바리톤 정 경은 이탈리아의 오페라, 미국의 드라마를 융합해 대한민국의 ‘오페라마’를 탄생시키며 새로운 장르를 확립했다.
정 경은 “종교적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바로크 시대, 성악은 신을 찬미하는 가장 성스러운 악기이자 찬미 수단이었다. 이후 16세기 피렌체에서 오페라가 탄생하자 성스러운 성악이 속세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일에 활용되었다고 엄청난 지탄을 보냈다. 이와같이 주류에 저항하는 새로운 시도는 처음엔 논란을 낳지만 결국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되는 법이다”라고 역설한다.
정 경의 말처럼 처음 ‘오페라마’를 시작할 당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단순한 ‘불신과 우려’ 수준을 넘어섰다. 그때 지도교수님들 중에서도 “절대 해서는 안 되며, 실패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정 경은 타국에 문화적 조공을 바치지 않는 우리만의 새로운 장르, ‘오페라마(Operama)’로 대변되는 대한민국의 고유 브랜드를 확립하는 일이야말로 본인이 예술인으로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종착역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오페라’는 우리가 아는 이탈리아의 오페라뿐만 아니라 고전의 기초 예술인 무용, 미술, 음악, 문학 등 기초 예술 전체를 지칭한다. 또한 ‘드라마’는 미국에서 탄생하여 대중 영상 문화를 장악한 현대적 형태의 극작품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닌 록 음악, 재즈 및 블루스, 힙합 등 포스트모더니즘 음악 전체 장르를 통괄하는 개념이다.
제주 해녀 공연 사진
<바다를 담은 소녀> 앨범 커버
<바다를 담은 소녀>, 제주 해녀
오케스트라 협연 공연 일정으로 제주도를 방문했다가,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제주 해녀 문화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오랜 세월 공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 경은 예술적 노력을 통해 제주 해녀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고 세계에 알리는 일을 자처하고 나섰다.
목숨을 걸고 가계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파고 속으로 뛰어든 해녀들. 그러한 해녀는 단순히 직업이나 생업의 개념을 넘어 숭고하고 아름다운 형태의 투쟁을 통해 자립과 생존을 이룩해 낸 우리 민족의 본질과 저력을 상징하는 존재와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 경은 ‘제주 해녀와 일본 해녀(아마)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를 놓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과 ‘일본 해녀인 아마는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유네스코에 선제적으로 등재하려는 공격적인 움직임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본인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무기로 삼아 힘을 보태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해녀를 주제로 노래를 제작해 전국은 물론 세계 무대에 소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정 경이 직접 작사 작업을 맡아 ‘속곳’이나 ‘숨비소리’와 같은 해녀들의 고유어를 활용하여 해녀들의 숨결을 가사에 녹아내렸다.
또한 유능한 작곡가 Adas Aldo를 찾아가 작곡을 요청했고, 앨범 이름을 광활한 바다에 매일 몸을 던지는 해녀의 삶을 표현하고자 <바다를 담은 소녀>로 정했다. 앨범은 수중 사진작가이자 해녀 사진만을 전문으로 찍는 Y-jin 작가의 사진과 함께 발매되었다.
그렇게 그는 <해녀>라는 이름을 걸고, 대한민국 일개 예술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 그리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던 모든 일을 남김없이 실행했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했던가, 그야말로 기적보다 더욱 기적같은, 거짓말보다 더욱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2016년 11월 30일, 제주 해녀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됐다.
정 경은 “<제주 해녀>, <바다를 담은 소녀>는 장장 3년에 걸쳐 ‘제주 해녀’의 강인함과 아름다움에 감명을 받아 이를 보존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시작한 여정이었다”며, “그 여정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미국 뉴욕 카네기홀 독창회, 미국 순회 리사이틀, 텍사스주 공연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에서까지 다시 무대에 올랐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그러면서 정 경은 “아직도 저는 그 클라이맥스를 장식한, 제주 해녀를 연기한 무용수 이은선 교수님과의 미국 뉴욕 카네기홀 공연을 영원히 잊을 수는 없을 것”이라며, “해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마주했던 ‘지역’, ‘틀’, ‘성별’이라는 세 가지 거대한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정책도, 철학도, 이데올로기도 아닌 오로지 순수한 예술의 힘이었다”고 토로한다.
예술경영 PT 사진
리브위드 CMO
한경arteTV 아트룸 뉴스 앵커 사진
La danza 사진
논산아리랑 제작 발표회 현장
EBS 라디오 진행 사진
예술을 경영하다
박인건 국립중앙극장장은 “정 경은 우리나라에서 다소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유형의 예술가 형태”라며, “그는 초청받아 예술을 펼치는 아티스트 입장이 아닌 우리 사회와 상황에 필요한 예술을 직접 연결하는 ‘커넥터(connector)’ 아티스트”라고 정의했다.
자타가 인정하는 ‘커넥터 아티스트’인 정 경은 그가 만든 ‘오페라마’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한다. “고전이라 불리는 기초 예술은 인문학적 감동과 가치가 존재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사회에서 기초 예술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어렵고 지루하다는 인식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어떤 방법을 통해 대중문화와 경쟁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 것인가? 이 위대한 예술경영학적 고민은 저에게 가슴이 뛰는 현재 진행형의 연구이자 실천”이라고 이야기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2012년 4월, 대한민국 최초의 클래식 뮤직비디오 <La danza>가 발매되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모든 차트의 1위를 독식하던 시절, 아주 잠깐이지만 <La danza> 뮤직비디오가 멜론 차트 1위에 등극한 순간이 있었다.
정 경은 “특별한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상식과 생명력을 뛰어넘는 정신력과 헌신, 어쩌면 투신마저 필요한 법”이라며, “물리세계를 지배하는 방정식이 ‘F=ma’라면, 예술 세계를 지배하는 방정식은 바로 ‘예술성=정신력×헌신’일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정 경은 “예술의 본질은 고통이다”라며, “이런 고통을 극복하고 희열과 환희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까지가 예술이 지닌 본질의 전체라고 생각한다. 예술 활동을 통해 고통만을 느낀다면 다음 예술은 탄생하지 않는다. 오로지 환희와 극한의 지복이 주어지기에 우리 예술인들은 창작과 제련 단계에서 겪는 고통을 이겨내고,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키기 위한 도전에 다시 뛰어드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계룡시 홍보대사, 정 경
정 경은 “미흡한 저를 ‘계룡시 홍보대사로 위촉하겠다’는 통보를 받고, ‘설레임 반 두려움 반’ 이었다”며, “저는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저한테 ‘성공’이란 아직 스스로 정의 내리지 못한 수많은 어려운 단어들 중 하나일 뿐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여정이 남들과 조금 달라 보일 수 있는 것은 기존의 예술인에 비해 조금 더 넓게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정 경은 “물론 그와 같은 비주류적인 행보로 인해 저에게 붙은 별명들은 거의 낙인에 가까웠다”며, “<클라식계의 이단아>, <예술계의 문제아>, <쉽게 말해 사기꾼> 이러한 별명들을 오히려 전부 명찰삼아 가슴에 크게 달았고, 언론의 인터뷰나 무대에 설 때마다 그 이름을 전면에 내세웠다. 흔들릴 시간도 없었고, 악명이라는 세간의 관심마저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절이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제는 비주류가 아닌 주류로서 변방이 아닌 중앙에서 본인이 자라고 성장했던 충청도에서 “계룡시만의 교육과 공연이 융합된 <오페라마 토크 콘서트>를 만들고 싶다”고 의지를 피력한다.
정 경은 “계룡시만의 콘텐츠를 만든다는 것은 극한의 산고를 동반하는 출산, 그리고 이어지는 새생명을 맞이하는 기쁨과도 같다”며, “계룡시는 ‘오페라마’로 더욱 강렬해지고, 더욱 다채로워지며, 더욱 감동적인 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저없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계룡시와 본인을 연결해 준 “놀뫼신문에 감사하다”는 인사도 잊지 않는다.
- 전영주 편집장
“정 경”, 우리에게는 ‘논산아리랑’으로 그의 이름이 친숙하다. 그는 지현아 명창과 함께 ‘논산아리랑’을 부르며 재능을 기부했고, 그 음원을 위너뮤직에 출시하며 ‘논산아리랑’을 세계 무대에 올려놓았다.
이러한 정 경이 한 걸음 더 우리 곁으로 다가오니 마음이 설레인다. 돌아오는 가을, 계룡시 홍보대사에 위촉되면서 정 경의 날개짓으로 변화될 계룡시의 새로운 문화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클래식계의 BTS로 불리는 정 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술의 높은 벽을 허물고, 무대 위의 객석과 하나되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다.
EBS FM <정 경의 클래식 클래식>으로 매일 오전 10~12시 청취자와의 만남을 4년째 이어가고 있으며, 미국 대기업 워너 뮤직 상임 이사를 거쳐 현재 ESG 전문 기업 (주)리브위드 전무(CMO)로 재직 중이다.
하나금융그룹 함영주 회장은 “정 경이 창출해 내는 다양한 콘텐츠들은 어떠한 형식 속에서도 관객에게 감동과 울림을 주면서 진정한 소통을 이끌어 낸다”며, “철저하게 관객 중심적인 콘텐츠를 통해 딱딱하고 어려운 클래식을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없이 편안하게 즐기는 모습은 정 경의 ‘오페라마’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삼성생명의 이주경 부사장은 “정 경의 ‘오페라마’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는 기존의 것들을 연결해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이라며, “오늘날 모든 산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작품을 상품으로 만드는 예술 상인 정 경의 이야기는 많은 감동과 울림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소개한다.
이에 이번호 [표지초대석]에서는 성악가이면서 기업의 임원, 방송인, 교수, 그리고 작가로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정 경의 메버릭적인 삶을 솔직하고 진정성있게 그려본다.
카네기홀 공연 사진
음악이 찾아온 고3 어느 날
정 경은 4대째 독실한 신앙을 이어 온 집안에서 태어났다. 장남이었던 정 경의 아버지는 어린 동생들의 학업을 돕기 위해 정작 본인의 학업은 포기했고, 이후 서른이 넘어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래서 정 경이 초등학생에 다닐 무렵, 아버지는 가난한 전도사였다.
정 경은 “저의 유년시절은 학업보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방황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며, “다행히 체격이 좋고 운동 신경이 뛰어났던 저는 중학교 육상부에 들어가게 되었고,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더욱 공부와 멀어졌다”고 회상한다.
그래서 그는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제출한 공고, 농고, 상고에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대전의 명문 고등학교 중 하나인 서대전고등학교가 그해 신입생 모집이 미달되어 정 경이 당당하게(?) 서대전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정 경 어머님은 “부디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무사히 고등학교만 졸업하자”면서 큰아들의 인생 목표를 고등학교 졸업으로 정해 주셨다. 그러던 고3 여름 어느날, 어머님이 “성악으로 대학 진학이 가능하다”면서, “독일 가곡과 이탈리아 가곡을 잘 외워 부르기만 하면 대학 진학의 길이 열려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결국 어머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고, 그렇게 시작된 노래 연습부터 3개월이 지난 후 서울의 유명한 교수님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당시 교수님은 “학생의 목소리가 굉장히 좋네요. 그런데 예술을 하려면 부모님의 재력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런 금전적인 여유가 없으시다면 음악이 아닌 다른 길로 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제가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음악을 하고 싶어서도’,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해서도’ 아니다. 그날 버스 차창에 비친 어머니의 눈물이 제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렇게 훌륭한 성악가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이후 광인처럼 노래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어머님을 좌절시킨 그 교수에게 ‘당신이 틀렸다’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며 ‘음악이 찾아온 고3 여름 어느날’을 회상한다.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고등학생 시절 사진
카네기홀 포스터
선진국은 장르를 만들고, 후진국은 콘텐츠를 채운다
정 경은 이른바 주류가 걷는 길을 걷지 않아도 성공 가도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산 증인이다.
대한민국 카리스마 넘치는 음악가로 활동하면서 기업의 최고 마케팅 책임자이자 혁신적인 공연기획자, 소탈한 방송인, 모교의 아카데믹한 대학교수, 작가에 이르기까지 5개 이상의 직업으로 살아가면서 클래식 음악과 대중 음악, 예술과 경영, 예술과 사회 등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에 늘 위치해 있다. 그렇게 서로 다른 두 문화가 충돌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프런티어 경계인으로서 기존에 없던 ‘혁신’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바리톤 정 경은 이탈리아의 오페라, 미국의 드라마를 융합해 대한민국의 ‘오페라마’를 탄생시키며 새로운 장르를 확립했다.
정 경은 “종교적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바로크 시대, 성악은 신을 찬미하는 가장 성스러운 악기이자 찬미 수단이었다. 이후 16세기 피렌체에서 오페라가 탄생하자 성스러운 성악이 속세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일에 활용되었다고 엄청난 지탄을 보냈다. 이와같이 주류에 저항하는 새로운 시도는 처음엔 논란을 낳지만 결국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되는 법이다”라고 역설한다.
정 경의 말처럼 처음 ‘오페라마’를 시작할 당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단순한 ‘불신과 우려’ 수준을 넘어섰다. 그때 지도교수님들 중에서도 “절대 해서는 안 되며, 실패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정 경은 타국에 문화적 조공을 바치지 않는 우리만의 새로운 장르, ‘오페라마(Operama)’로 대변되는 대한민국의 고유 브랜드를 확립하는 일이야말로 본인이 예술인으로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종착역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오페라’는 우리가 아는 이탈리아의 오페라뿐만 아니라 고전의 기초 예술인 무용, 미술, 음악, 문학 등 기초 예술 전체를 지칭한다. 또한 ‘드라마’는 미국에서 탄생하여 대중 영상 문화를 장악한 현대적 형태의 극작품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닌 록 음악, 재즈 및 블루스, 힙합 등 포스트모더니즘 음악 전체 장르를 통괄하는 개념이다.
제주 해녀 공연 사진
<바다를 담은 소녀> 앨범 커버
<바다를 담은 소녀>, 제주 해녀
오케스트라 협연 공연 일정으로 제주도를 방문했다가,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제주 해녀 문화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오랜 세월 공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 경은 예술적 노력을 통해 제주 해녀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고 세계에 알리는 일을 자처하고 나섰다.
목숨을 걸고 가계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파고 속으로 뛰어든 해녀들. 그러한 해녀는 단순히 직업이나 생업의 개념을 넘어 숭고하고 아름다운 형태의 투쟁을 통해 자립과 생존을 이룩해 낸 우리 민족의 본질과 저력을 상징하는 존재와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 경은 ‘제주 해녀와 일본 해녀(아마)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를 놓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과 ‘일본 해녀인 아마는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유네스코에 선제적으로 등재하려는 공격적인 움직임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본인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무기로 삼아 힘을 보태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해녀를 주제로 노래를 제작해 전국은 물론 세계 무대에 소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정 경이 직접 작사 작업을 맡아 ‘속곳’이나 ‘숨비소리’와 같은 해녀들의 고유어를 활용하여 해녀들의 숨결을 가사에 녹아내렸다.
또한 유능한 작곡가 Adas Aldo를 찾아가 작곡을 요청했고, 앨범 이름을 광활한 바다에 매일 몸을 던지는 해녀의 삶을 표현하고자 <바다를 담은 소녀>로 정했다. 앨범은 수중 사진작가이자 해녀 사진만을 전문으로 찍는 Y-jin 작가의 사진과 함께 발매되었다.
그렇게 그는 <해녀>라는 이름을 걸고, 대한민국 일개 예술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 그리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던 모든 일을 남김없이 실행했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했던가, 그야말로 기적보다 더욱 기적같은, 거짓말보다 더욱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2016년 11월 30일, 제주 해녀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됐다.
정 경은 “<제주 해녀>, <바다를 담은 소녀>는 장장 3년에 걸쳐 ‘제주 해녀’의 강인함과 아름다움에 감명을 받아 이를 보존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시작한 여정이었다”며, “그 여정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미국 뉴욕 카네기홀 독창회, 미국 순회 리사이틀, 텍사스주 공연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에서까지 다시 무대에 올랐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그러면서 정 경은 “아직도 저는 그 클라이맥스를 장식한, 제주 해녀를 연기한 무용수 이은선 교수님과의 미국 뉴욕 카네기홀 공연을 영원히 잊을 수는 없을 것”이라며, “해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마주했던 ‘지역’, ‘틀’, ‘성별’이라는 세 가지 거대한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정책도, 철학도, 이데올로기도 아닌 오로지 순수한 예술의 힘이었다”고 토로한다.
예술경영 PT 사진
리브위드 CMO
한경arteTV 아트룸 뉴스 앵커 사진
La danza 사진
논산아리랑 제작 발표회 현장
EBS 라디오 진행 사진
예술을 경영하다
박인건 국립중앙극장장은 “정 경은 우리나라에서 다소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유형의 예술가 형태”라며, “그는 초청받아 예술을 펼치는 아티스트 입장이 아닌 우리 사회와 상황에 필요한 예술을 직접 연결하는 ‘커넥터(connector)’ 아티스트”라고 정의했다.
자타가 인정하는 ‘커넥터 아티스트’인 정 경은 그가 만든 ‘오페라마’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한다. “고전이라 불리는 기초 예술은 인문학적 감동과 가치가 존재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사회에서 기초 예술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어렵고 지루하다는 인식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어떤 방법을 통해 대중문화와 경쟁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 것인가? 이 위대한 예술경영학적 고민은 저에게 가슴이 뛰는 현재 진행형의 연구이자 실천”이라고 이야기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2012년 4월, 대한민국 최초의 클래식 뮤직비디오 <La danza>가 발매되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모든 차트의 1위를 독식하던 시절, 아주 잠깐이지만 <La danza> 뮤직비디오가 멜론 차트 1위에 등극한 순간이 있었다.
정 경은 “특별한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상식과 생명력을 뛰어넘는 정신력과 헌신, 어쩌면 투신마저 필요한 법”이라며, “물리세계를 지배하는 방정식이 ‘F=ma’라면, 예술 세계를 지배하는 방정식은 바로 ‘예술성=정신력×헌신’일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정 경은 “예술의 본질은 고통이다”라며, “이런 고통을 극복하고 희열과 환희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까지가 예술이 지닌 본질의 전체라고 생각한다. 예술 활동을 통해 고통만을 느낀다면 다음 예술은 탄생하지 않는다. 오로지 환희와 극한의 지복이 주어지기에 우리 예술인들은 창작과 제련 단계에서 겪는 고통을 이겨내고,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키기 위한 도전에 다시 뛰어드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계룡시 홍보대사, 정 경
정 경은 “미흡한 저를 ‘계룡시 홍보대사로 위촉하겠다’는 통보를 받고, ‘설레임 반 두려움 반’ 이었다”며, “저는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저한테 ‘성공’이란 아직 스스로 정의 내리지 못한 수많은 어려운 단어들 중 하나일 뿐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여정이 남들과 조금 달라 보일 수 있는 것은 기존의 예술인에 비해 조금 더 넓게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정 경은 “물론 그와 같은 비주류적인 행보로 인해 저에게 붙은 별명들은 거의 낙인에 가까웠다”며, “<클라식계의 이단아>, <예술계의 문제아>, <쉽게 말해 사기꾼> 이러한 별명들을 오히려 전부 명찰삼아 가슴에 크게 달았고, 언론의 인터뷰나 무대에 설 때마다 그 이름을 전면에 내세웠다. 흔들릴 시간도 없었고, 악명이라는 세간의 관심마저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절이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제는 비주류가 아닌 주류로서 변방이 아닌 중앙에서 본인이 자라고 성장했던 충청도에서 “계룡시만의 교육과 공연이 융합된 <오페라마 토크 콘서트>를 만들고 싶다”고 의지를 피력한다.
정 경은 “계룡시만의 콘텐츠를 만든다는 것은 극한의 산고를 동반하는 출산, 그리고 이어지는 새생명을 맞이하는 기쁨과도 같다”며, “계룡시는 ‘오페라마’로 더욱 강렬해지고, 더욱 다채로워지며, 더욱 감동적인 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저없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계룡시와 본인을 연결해 준 “놀뫼신문에 감사하다”는 인사도 잊지 않는다.
- 전영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