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아리랑] ‘논산아리랑’의 뿌리를 찾아서

놀뫼신문
2024-07-20

(2024년6월10일 발표한 '논산아리랑' _작사 김홍신 작곡 박세환 노래 정경·지현아)

무릎 장단을 치면서 고종이 즐겼던 ‘아리랑’,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아리랑’을 채보(採譜)한 사람은 한국의 은인 ‘호머 헐버트’ 선교사다.

1886년, 그가 조선에 영어교사로 처음 와서 정동에 살 무렵, 옆집 뜰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아리랑 가락을 듣고, 가감없이 원형대로 서양식 음계를 이용해서 채록했다. 

그 결과 2012년 ‘한국의 서정민요 아리랑’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한국 음악사의 새 지평을 열게 되며 세계적으로 문화적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호머 헐버트는 아리랑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영문 월간지에 ‘한국의 소리음악(Korean Vocal Music)’라는 논문을 실었다. 아리랑뿐만 아니라 시조, 민요들을 악보와 함께 다수 소개했다. 아리랑 최초로 대략 782연의 소곡으로 이루어진 아리랑이 ‘재현 가능한 기록’이 되면서 대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1896년 선교사 헐버트가 서양악보로 처음 채보한 아리랑 악보 ⓒ문경 옛길박물관)


“아리랑은 조선인들에게 쌀과 같은 존재”


호머 헐버트는 “아리랑은 조선인들에게 쌀과 같은 존재”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인은 즉흥곡의 명수, 워즈워드, 바이든 못지않은 시인들”이라고도 했다.

호머 헐버트 박사는 1886년 7월 왕립 육영공원의 영어교사가 되기 위해 조선행 배를 탔다. 당시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육영공원은 고종이 고급 관리들에게 영어와 서구 문물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학교다. 그는 5년간 그곳에서 근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후 1893년,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조선에 입국했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 조선의 국모가 시해되자 그는 고종 곁에서 음식을 직접 만들어 주었다. 또한 침전에서 언더우드, 에비슨 선교사들과 교대로 불침번을 섰다. 그리고 ‘왕비의 시해 사건은 일본 정부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호머 헐버트 박사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인 한성사범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1903년 YMCA를 발족해 창립총회 의장과 초대 회장을 맡았다. 또한 덕성학원 설립자인 ‘차미리사’가 헐버트 박사의 도움을 받아 유학하며 공부를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한글의 우수성을 학술적으로 파헤치고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지리총서’를 저술했다. 헐버트 박사는 주시경과 함께 맞춤법과 한글을 연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도입했다. 

1907년, 헐버트 박사는 쫓겨나듯 강제 퇴국 당했다. 미국에 돌아간 그는 강연과 기고를 통해 조선인의 권리와 자유, 조선의 독립운동을 적극 도왔다. 대한독립을 외치며 한국인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낸 우리나라 ‘34번째 민족대표’였다.


“한국인에 대한 사랑이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


1949년, 호머 헐버트 박사는 대한민국 광복절 행사에 국빈으로 초청을 받아 40년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된다. 한국으로 향하는 배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에 대한 사랑이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라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한국에 도착한 지 일주일만인 8월 5일, 그의 나이 86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국내 최초 외국인 사회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고, 그의 아들 ‘셸던 헐버트’도 서울 마포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같이 잠들어 있다.

그는 명예 한국인, 외국인 독립유공자, 조선의 젊은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교육자, 한글학자, 역사학자, 언론인이며 한국 문명화의 선구자, 의사, 체육인, 문화재 지킴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전으로 내려오던 아리랑을 채보(採譜)한 한국학의 개척자이다.







  • 1950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태극장 추서
  • 2013년, 대한민국 외국인 최초로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 2014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추서
  • 2015년, (사)서울아리랑페스티벌 제1회 ‘서울아리랑상’ 추서




- 전영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