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사업]인‧의‧예‧지 ‘선비의 혼’을 찾아서(5)
탑정호, 명재고택, 한국유교문화진흥원과 서원을 이용한 ‘선비의 길’
|
|
|
| 오랜 기간 유교는 개인의 인격수양과 도덕성 함양을 중시하며 사회의 안녕과 평화로운 번영에 기여해 왔다. 개인보다는 국가와 공동체를 우선시하고 노부모를 돌보며 배움과 근면 성실을 강조하는 충효예와 인의예지의 정신은 세계 최빈국이었던 우리나라가 다른 국가들에 비해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한 핵심 원동력이 되어 왔다. 가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배움과 교육을 중시하는 유교의 강한 정신문화는 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가 인적자원을 육성하고 빠른 기술혁신으로 수출주도형 선진 공업국가로 발돋움하는 토대가 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는 유교문화에 대해 일부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는 편이다. 이에 이러한 시각을 해소하고 4차산업혁명시대의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인간중심의 성숙한 사회를 만드는 새로운 유교문화를 정립하고자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은 돈암서원을 비롯한 10개의 서원과 명재고택, 종학당 등의 풍부한 유교문화유산을 배경으로 특색있고 차별화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이에 이번호 <인‧의‧예‧지 ‘선비의 혼’을 찾아서>에서는 ‘길을 걸으며 인생의 도리를 깨닫는 선비의 길’을 찾아본다.
|
|
논산만의 킬러 콘텐츠 ‘충‧효‧예의 길’
논산은 논산만이 보유한 다양한 유교문화유산자원이 있다.
그 중에서도 계백장군과 사육신을 배향한 ‘충곡서원’(忠), 효자마을과 효자 강응정을 배향한 ‘효암서원’(孝), 예학의 종장 김장생 등을 배향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돈암서원’(禮)을 잇는 ‘충‧효‧예의 길’이 대표적인 유교문화유산인 것이다.
‘충‧효‧예의 길’은 논산의 지역 특성을 바탕으로 선비정신으로 대표되는 ‘충‧효‧예’ 콘텐츠가 집약된 것으로 유교문화의 정신적 가치를 일상에서 실현하고, 지역소멸의 위기에서 기호 유학의 중심지인 논산의 유교문화유산과 기존의 논산길을 연계하여 맞춤형 문화관광자산 개발과 홍보 확대를 위해 개발한 것이다.
무엇보다 ‘충‧효‧예의 길’은 전통문화유산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현대화 및 대중화와 K-유교 장르 개척을 위한 융복합, 세대공감, 현대화 등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의 미래 비전 실천이다.
이러한 문화유산 활용 사업이 일회성 체험 위주의 양적 관광사업이 아닌 지속가능한 전통문화의 교육적 요소에 초점을 맞추고자 ‘지속 가능한 걷기 여행길’이라는 목표로 유교문화의 정신적 가치인 충(忠), 효(孝), 예(禮)를 주제로 걷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충의 길은 충곡서원, 계백장군 묘역, 충장사(忠壯祠)로 이어지는 백제의 계백과 조선의 사육신(死六臣)의 연결고리로서의 연산 지역이 부각되었다.
효암서원, 효자 강응정의 정려, 병암유원지로 연결되는 효의 길은 현재도 논산천에서 살아 헤엄치는 효자고기 을문이로 이어지며 가야곡면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되살렸다.
또한 돈암서원, 모선재(摹先齋), 양천허씨정려(陽川許氏旌閭)로 이어지는 예의 길은 익히 잘 알려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돈암서원이 예학의 정신이 깃든 기호문화의 성지임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는 길이다.
충곡서원
충의 길
백제의 계백은 5천 명의 결사대로 신라군 5만 명과 마지막까지 싸우다 최후를 맞이하여 충신의 표상이 되었다.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인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계백장군 묘역을 조성하고 위패와 영정을 모시는 사당인 충장사를 건립했다. 옛 문헌에서 계백의 목이 떨어졌다고 전하는 ‘수락산’과 시신을 급히 거두어 가매장했다는 ‘가장곡’이 바로 이 부근이다.
충곡서원은 계백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사육신인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을 모시고 있다. 1692년(숙종 18)에 건립된 후, 1700년(숙종 26)에 연산의 유생 김득겸이 상소한 내용을 보면 “연산 지역이 계백, 성삼문 등 충신들의 유풍과 공적이 남아있는 곳이면서 사람들이 80~90년 전부터 지속해서 건립을 요청한 지 오래되었다.”라는 점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연산지역을 충절의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계백이 죽고 백제가 망한 지 천 년이 넘게 흐른 조선 중기에 이 지역에서는 왜 조선의 충신 사육신만이 아니라 계백장군도 함께 모시는 서원을 만들었을까요? 오랜 세월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백제에 대한 사랑, 그리고 ‘충’이 왕조와 시대를 초월하는 소중한 가치임을 보여주고자 했던 이 지역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효암서원
효의 길
500여 년 전 논산시 가야곡면 함적리에 살던 강응정은 개장국이 드시고 싶다는 편찮으신 어머니를 위해 한겨울 추위를 뚫고 20리 길을 걸어 양촌장에 갔다. 어렵게 구한 개장국을 품에 안고 돌아오던 길에 빙판에 미끄러져 국을 쏟았다. 불효를 한탄하던 중 넘어지면서 깨진 얼음 구멍으로 작은 물고기가 모여들고 있었다. 그것을 잡아 탕을 끓여 드렸더니 어머니 건강이 좋아졌다. 이때 잡은 물고기를 ‘을문이’ 혹은 ‘강효자 고기’라고 부르며 지금도 탑정호 상류 병암유원지 인근 논산천에 서식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나이 17세에 부모가 병에 걸리매, 항상 모시고 간호하면서 밤이 새도록 자지 않고 보살피며, 부모가 죽자 묘 옆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예절을 다하였으며, 소금과 소채를 먹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나라에서는 효자 강응정의 효행을 기리는 문(정려)을 지어주었고 성종은 친필 현판을 내렸다. 효자 강응정을 모신 효암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우암 송시열이 1713년(숙종 39)에 중건을 주창하여 다시 세워졌다.
효자를 모신 효암서원, 지금도 살아 헤엄치는 논산천의 효자고기, 500년이 넘게 후손이 살고 있는 함적리 마을의 존재는 우리에게 ‘효’가 동화 속의 이야기나 현실과 동떨어진 먼 옛날의 가치가 아닌 지금 우리 옆에 살아 숨 쉬는 실체임을 보여준다.
돈암서원
예의 길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제자로서 율곡의 학맥을 계승했다. 조선시대에 ‘예’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규범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예’가 많이 무너졌다. 고향 논산에서 제자를 가르치던 김장생은 예를 다시 세우지 않고는 나라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예학을 연구, 정리하여 무너진 사회질서를 다시 세우는 것은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상례비요, 가례집람 등의 예서를 편찬하여 예학의 기본을 세운 김장생은 예학의 종장으로 우뚝 섰다. 이런 연유로 논산은 예학의 본향, ‘예가 스민 고장’으로 불리고 있다.
돈암서원은 김장생과 그의 제자인 김집, 송시열, 송준길을 모시는 서원이다. 1634년(인조 12)에 창건되었고, 1660년(현종 원년)에는 ‘돈암(遯巖)’으로 사액을 받았다. 돈암서원은 건축 구조 측면에서도 ‘예(禮)’를 잘 구현한 서원이다. 김장생이 고대 예서들을 정리하면서 나온 여러 내용이 건축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응도당은 고대 예서에서 나오는 하옥 제도를 본받아서 만들었다. 무엇보다 사당의 이름을 ‘예를 숭상한다’는 뜻의 숭례사로 지은 것에서 돈암서원이 철저히 ‘예’를 강조하는 서원임을 알 수 있다. 1871년 서원 훼철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보존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201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역사적 사료에 근거한 ‘충효예 길’
1569년 3월 4일(음력), 퇴계 이황은 선조에게 사직 상소를 올리고 귀향길에 오른다. 당시 퇴계 이황은 말을 타고 배를 타고 13박 14일간 이 길을 갔지만, 오늘날 지방자치단체에서 길을 잘 닦아놓은 덕분에 경복궁에서 안동 도산서원까지 9일 정도면 걸어서 도착할 수 있다.
도산서원에서는 퇴계 선생의 귀향 450주년이 되던 2019년부터 '퇴계 선생 귀향길 재현 걷기'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이 길은 퇴계 선생의 귀향길이지만 퇴계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걷는 길만은 아니다.
육백 리 귀향길은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았던 우리 국토 곳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하며 걷는 나의 길, 우리의 길이다. 퇴계 선생 덕분에 역사의 길, 휴식의 길이 생긴 셈이다.
안동이 퇴계 이황의 영남유교의 본고장이면, 충절과 예학의 고장 논산은 세계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돈암서원 등 많은 서원과 향교가 있고,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호유학의 본고장이다.
이 유서 깊은 기호유학의 본고장에 유교문화의 총체적 거점 연구기관으로 2022년 한국유교문화진흥원(원장 정재근)이 노성면 병사리에 설립되었다.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은 ‘충효예길’ 개발을 위해 지난 5월 30일 시범적으로 걷기 대회를 개최하여 ‘충효예길’에 대한 의미, 가치 발굴과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가능성을 확인하는 자리를 가졌다.
한국유교문화진흥원 K-유교활용부 ‘충효예길’ 담당자는 “단순한 장소 활용이 아닌 연재 송병선의 ‘황산유람기’의 역사적 사료에 근거하여 해당되는 코스와 논산의 다양한 유교문화유산을 토대로 기본안을 구상하고 직접 걸어보며 그에 맞는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충효예길’ 코스(안)는 강경 죽림서원 → 성삼문묘 → 양촌장터 → 함적리 효자마을 → 효암서원 → 병암유원지 → 김장생 묘 → 고정리 모선재, 양천허씨 정려 → 돈암서원 → 백제군사박물관 → 충곡서원 → 탑정호수변생태공원 → 탑정호 출렁다리로 약 41㎞이며 도보로 10시간 정도 소요된다.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은 충효예길 운영을 통해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일회성 단순한 길 걷기 행사가 아닌 유교문화 연계 행사와 교육콘텐츠 개발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본지는 '충효예 길'의 구성안이 완성되면 구간별 세부적으로 답사해, '충효예 길'의 아름다운 풍광과 선조들의 유교문화유산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한다.
- 전영주 편집장
- 이 기획기사는 2024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을 받아서 취재한 것입니다.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사업]인‧의‧예‧지 ‘선비의 혼’을 찾아서(5)
탑정호, 명재고택, 한국유교문화진흥원과 서원을 이용한 ‘선비의 길’
오랜 기간 유교는 개인의 인격수양과 도덕성 함양을 중시하며 사회의 안녕과 평화로운 번영에 기여해 왔다. 개인보다는 국가와 공동체를 우선시하고 노부모를 돌보며 배움과 근면 성실을 강조하는 충효예와 인의예지의 정신은 세계 최빈국이었던 우리나라가 다른 국가들에 비해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한 핵심 원동력이 되어 왔다. 가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배움과 교육을 중시하는 유교의 강한 정신문화는 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가 인적자원을 육성하고 빠른 기술혁신으로 수출주도형 선진 공업국가로 발돋움하는 토대가 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는 유교문화에 대해 일부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는 편이다. 이에 이러한 시각을 해소하고 4차산업혁명시대의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인간중심의 성숙한 사회를 만드는 새로운 유교문화를 정립하고자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은 돈암서원을 비롯한 10개의 서원과 명재고택, 종학당 등의 풍부한 유교문화유산을 배경으로 특색있고 차별화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이에 이번호 <인‧의‧예‧지 ‘선비의 혼’을 찾아서>에서는 ‘길을 걸으며 인생의 도리를 깨닫는 선비의 길’을 찾아본다.
논산만의 킬러 콘텐츠 ‘충‧효‧예의 길’
논산은 논산만이 보유한 다양한 유교문화유산자원이 있다.
그 중에서도 계백장군과 사육신을 배향한 ‘충곡서원’(忠), 효자마을과 효자 강응정을 배향한 ‘효암서원’(孝), 예학의 종장 김장생 등을 배향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돈암서원’(禮)을 잇는 ‘충‧효‧예의 길’이 대표적인 유교문화유산인 것이다.
‘충‧효‧예의 길’은 논산의 지역 특성을 바탕으로 선비정신으로 대표되는 ‘충‧효‧예’ 콘텐츠가 집약된 것으로 유교문화의 정신적 가치를 일상에서 실현하고, 지역소멸의 위기에서 기호 유학의 중심지인 논산의 유교문화유산과 기존의 논산길을 연계하여 맞춤형 문화관광자산 개발과 홍보 확대를 위해 개발한 것이다.
무엇보다 ‘충‧효‧예의 길’은 전통문화유산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현대화 및 대중화와 K-유교 장르 개척을 위한 융복합, 세대공감, 현대화 등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의 미래 비전 실천이다.
이러한 문화유산 활용 사업이 일회성 체험 위주의 양적 관광사업이 아닌 지속가능한 전통문화의 교육적 요소에 초점을 맞추고자 ‘지속 가능한 걷기 여행길’이라는 목표로 유교문화의 정신적 가치인 충(忠), 효(孝), 예(禮)를 주제로 걷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충의 길은 충곡서원, 계백장군 묘역, 충장사(忠壯祠)로 이어지는 백제의 계백과 조선의 사육신(死六臣)의 연결고리로서의 연산 지역이 부각되었다.
효암서원, 효자 강응정의 정려, 병암유원지로 연결되는 효의 길은 현재도 논산천에서 살아 헤엄치는 효자고기 을문이로 이어지며 가야곡면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되살렸다.
또한 돈암서원, 모선재(摹先齋), 양천허씨정려(陽川許氏旌閭)로 이어지는 예의 길은 익히 잘 알려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돈암서원이 예학의 정신이 깃든 기호문화의 성지임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는 길이다.
충곡서원
충의 길
백제의 계백은 5천 명의 결사대로 신라군 5만 명과 마지막까지 싸우다 최후를 맞이하여 충신의 표상이 되었다.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인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계백장군 묘역을 조성하고 위패와 영정을 모시는 사당인 충장사를 건립했다. 옛 문헌에서 계백의 목이 떨어졌다고 전하는 ‘수락산’과 시신을 급히 거두어 가매장했다는 ‘가장곡’이 바로 이 부근이다.
충곡서원은 계백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사육신인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을 모시고 있다. 1692년(숙종 18)에 건립된 후, 1700년(숙종 26)에 연산의 유생 김득겸이 상소한 내용을 보면 “연산 지역이 계백, 성삼문 등 충신들의 유풍과 공적이 남아있는 곳이면서 사람들이 80~90년 전부터 지속해서 건립을 요청한 지 오래되었다.”라는 점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연산지역을 충절의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계백이 죽고 백제가 망한 지 천 년이 넘게 흐른 조선 중기에 이 지역에서는 왜 조선의 충신 사육신만이 아니라 계백장군도 함께 모시는 서원을 만들었을까요? 오랜 세월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백제에 대한 사랑, 그리고 ‘충’이 왕조와 시대를 초월하는 소중한 가치임을 보여주고자 했던 이 지역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효암서원
효의 길
500여 년 전 논산시 가야곡면 함적리에 살던 강응정은 개장국이 드시고 싶다는 편찮으신 어머니를 위해 한겨울 추위를 뚫고 20리 길을 걸어 양촌장에 갔다. 어렵게 구한 개장국을 품에 안고 돌아오던 길에 빙판에 미끄러져 국을 쏟았다. 불효를 한탄하던 중 넘어지면서 깨진 얼음 구멍으로 작은 물고기가 모여들고 있었다. 그것을 잡아 탕을 끓여 드렸더니 어머니 건강이 좋아졌다. 이때 잡은 물고기를 ‘을문이’ 혹은 ‘강효자 고기’라고 부르며 지금도 탑정호 상류 병암유원지 인근 논산천에 서식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나이 17세에 부모가 병에 걸리매, 항상 모시고 간호하면서 밤이 새도록 자지 않고 보살피며, 부모가 죽자 묘 옆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예절을 다하였으며, 소금과 소채를 먹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나라에서는 효자 강응정의 효행을 기리는 문(정려)을 지어주었고 성종은 친필 현판을 내렸다. 효자 강응정을 모신 효암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우암 송시열이 1713년(숙종 39)에 중건을 주창하여 다시 세워졌다.
효자를 모신 효암서원, 지금도 살아 헤엄치는 논산천의 효자고기, 500년이 넘게 후손이 살고 있는 함적리 마을의 존재는 우리에게 ‘효’가 동화 속의 이야기나 현실과 동떨어진 먼 옛날의 가치가 아닌 지금 우리 옆에 살아 숨 쉬는 실체임을 보여준다.
돈암서원
예의 길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제자로서 율곡의 학맥을 계승했다. 조선시대에 ‘예’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규범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예’가 많이 무너졌다. 고향 논산에서 제자를 가르치던 김장생은 예를 다시 세우지 않고는 나라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예학을 연구, 정리하여 무너진 사회질서를 다시 세우는 것은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상례비요, 가례집람 등의 예서를 편찬하여 예학의 기본을 세운 김장생은 예학의 종장으로 우뚝 섰다. 이런 연유로 논산은 예학의 본향, ‘예가 스민 고장’으로 불리고 있다.
돈암서원은 김장생과 그의 제자인 김집, 송시열, 송준길을 모시는 서원이다. 1634년(인조 12)에 창건되었고, 1660년(현종 원년)에는 ‘돈암(遯巖)’으로 사액을 받았다. 돈암서원은 건축 구조 측면에서도 ‘예(禮)’를 잘 구현한 서원이다. 김장생이 고대 예서들을 정리하면서 나온 여러 내용이 건축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응도당은 고대 예서에서 나오는 하옥 제도를 본받아서 만들었다. 무엇보다 사당의 이름을 ‘예를 숭상한다’는 뜻의 숭례사로 지은 것에서 돈암서원이 철저히 ‘예’를 강조하는 서원임을 알 수 있다. 1871년 서원 훼철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보존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201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역사적 사료에 근거한 ‘충효예 길’
1569년 3월 4일(음력), 퇴계 이황은 선조에게 사직 상소를 올리고 귀향길에 오른다. 당시 퇴계 이황은 말을 타고 배를 타고 13박 14일간 이 길을 갔지만, 오늘날 지방자치단체에서 길을 잘 닦아놓은 덕분에 경복궁에서 안동 도산서원까지 9일 정도면 걸어서 도착할 수 있다.
도산서원에서는 퇴계 선생의 귀향 450주년이 되던 2019년부터 '퇴계 선생 귀향길 재현 걷기'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이 길은 퇴계 선생의 귀향길이지만 퇴계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걷는 길만은 아니다.
육백 리 귀향길은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았던 우리 국토 곳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하며 걷는 나의 길, 우리의 길이다. 퇴계 선생 덕분에 역사의 길, 휴식의 길이 생긴 셈이다.
안동이 퇴계 이황의 영남유교의 본고장이면, 충절과 예학의 고장 논산은 세계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돈암서원 등 많은 서원과 향교가 있고,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호유학의 본고장이다.
이 유서 깊은 기호유학의 본고장에 유교문화의 총체적 거점 연구기관으로 2022년 한국유교문화진흥원(원장 정재근)이 노성면 병사리에 설립되었다.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은 ‘충효예길’ 개발을 위해 지난 5월 30일 시범적으로 걷기 대회를 개최하여 ‘충효예길’에 대한 의미, 가치 발굴과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가능성을 확인하는 자리를 가졌다.
한국유교문화진흥원 K-유교활용부 ‘충효예길’ 담당자는 “단순한 장소 활용이 아닌 연재 송병선의 ‘황산유람기’의 역사적 사료에 근거하여 해당되는 코스와 논산의 다양한 유교문화유산을 토대로 기본안을 구상하고 직접 걸어보며 그에 맞는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충효예길’ 코스(안)는 강경 죽림서원 → 성삼문묘 → 양촌장터 → 함적리 효자마을 → 효암서원 → 병암유원지 → 김장생 묘 → 고정리 모선재, 양천허씨 정려 → 돈암서원 → 백제군사박물관 → 충곡서원 → 탑정호수변생태공원 → 탑정호 출렁다리로 약 41㎞이며 도보로 10시간 정도 소요된다.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은 충효예길 운영을 통해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일회성 단순한 길 걷기 행사가 아닌 유교문화 연계 행사와 교육콘텐츠 개발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본지는 '충효예 길'의 구성안이 완성되면 구간별 세부적으로 답사해, '충효예 길'의 아름다운 풍광과 선조들의 유교문화유산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한다.
- 전영주 편집장
- 이 기획기사는 2024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을 받아서 취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