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0주년 특별기획] 제1편 ‘기레기’라는 오명을 벗어던지기 위한 몸부림

2026-01-02

지역 언론은 왜 신뢰를 잃었는가






놀뫼신문이 창간 20주년을 맞았다.

지역사회가 간절히 요구하는 '담대한 언론'으로서 비판해야 할 것은 비판하고, 감싸야 할 약자는 감싸며, 기록해야 할 진실은 끝까지 기록하는 신문이 되고자 한다.

이에 본지는 다음과 같은 특별기획 연재를 통해 지역 언론의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모색하고자 한다.

∎‘기레기’라는 오명을 벋어던지다 

∎“왜?”가 사라진 언론 -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따옴표 뉴스의 민낯

∎‘팩트체크’ 없는 뉴스는 속기록에 불과 - 사실과 진실의 간극

∎‘저널리즘’과 ‘처널리즘’의 차이를 증명한 시간들  

이번 연재는 특정 언론이나 개인을 겨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지역 언론 전체가 스스로를 성찰하고,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지 묻기 위한 기록이다. 언론을 향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은 결국 언론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기획에 뜻을 함께하고 싶은 독자 여러분의 기고는 언제든지 환영한다. 지역 언론의 내일은 언론인만의 몫이 아니라, 시민의 참여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기레기(기자+쓰레기)’, ‘기더기(기자+구더기)’.

오늘날 기자를 향한 이 조롱은 더 이상 일부 누리꾼의 과격한 표현이 아니다. 포털 댓글과 SNS, 커뮤니티 공간을 가리지 않고 언론 전반을 향한 불신과 냉소가 일상처럼 반복된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중앙이든 지역이든 예외는 없다. 언론이라는 이름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 된 현실은 뼈아프다.

문제는 이 비난이 전적으로 근거 없는 혐오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언론 스스로가 쌓아 올린 불신의 결과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 지역 언론은 과연 이 비판에서 자유로운가.

안타깝게도 답은 부정적이다. 지역 언론 역시 신뢰 위기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기사가 사라진 자리, 질문도 사라졌다


기자가 기사를 쓰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질문이 담긴 기사를 쓰지 않는다.

호흡이 긴 기사, 배경과 맥락을 설명하는 기사, 정책의 구조를 해부하는 기사는 점점 사라졌다. 대신 행정기관이 배포한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긴 기사, 인사말과 발언을 따옴표로 나열한 기사들이 지면과 포털을 채운다. ‘속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사실상 행정의 속기록에 불과한 기사들이다.

심지어 그마저도 ‘바쁘다’는 이유로 생략되는 경우도 있다.

취재의 부담을 덜기 위해 복사와 붙여넣기가 일상화된 지 오래다.

이 과정에서 언론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이 사라진다.

왜 이런 결정이 내려졌는지,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보는지, 대안은 없는지에 대한 질문이 실종된다. 질문이 사라진 언론은 더 이상 공론장이 아니다.


취재 대신 이권, 감시 대신 거래


문제는 단순한 기사 품질 저하에 그치지 않는다.

일부 기자들은 취재보다 본업 외 활동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관급자재 납품, 각종 건설공사 하도급 관여, 인사 청탁, 사업 알선, 축제·물품 납품 개입 등 이권의 영역은 놀라울 정도로 넓다.

취재를 빙자한 압력과 청탁이 실·과, 읍·면·동을 오가는 일은 이제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행정을 감시해야 할 언론이, 오히려 행정의 내부 이해관계에 깊숙이 얽혀드는 구조다.

이 기형적 관계 속에서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것은 시민이다.

행정의 결정은 검증되지 않고, 예산과 정책의 문제점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언론이 권력의 감시자가 아니라 거래의 당사자로 오해받는 순간, 신뢰는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무너진다.


비판을 가장한 충성, ‘홍위병 기자’의 등장


더 심각한 문제는 비판의 탈을 쓴 충성이다.

일부 기자들은 대놓고 시장이나 특정 권력자의 정책을 찬양하며, ‘기사수첩’이라는 이름으로 행정을 방어한다. 이들은 건설적 비판을 시도하는 다른 언론과 기자들을 향해 ‘발목 잡기’, ‘정치 공세’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이른바 ‘홍위병 기자’다.

권력에 비판적인 언론을 고립시키고, 질문 자체를 무력화하는 역할을 자처한다. 그 대가로 누리는 혜택 또한 적지 않다. 광고비, 각종 사업권, 행사 참여 기회 등 보이지 않는 보상이 뒤따른다.

언론이 권력의 감시자가 아니라 방패와 확성기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하는 언론


‘비판’과 ‘비난’은 다르다.

비판은 논리를 바탕으로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행위다. 잘된 점은 인정하고, 잘못된 점은 그 원인을 분석해 대안을 제시하는 과정이다. 반면 비난은 근거 없는 공격, 감정의 배출에 가깝다.

제대로 된 비판은 생산적이다.

비판에는 개선의 방향과 미래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긴다. 그러나 일부 언론의 행태는 비판이 아니라 공멸적 비난에 가깝다. 특정 인물이나 정책을 향한 비난이 반복될수록, 그 이면에는 반드시 이해관계가 작동한다.

공멸적 비난을 일삼는 기자 곁에는 이를 부추기는 세력이 존재한다.

비난이 기사로 포장될수록, 누군가는 반드시 이익을 본다.


후원 언론과 댓가성 기사라는 구조


특히 인터넷 언론의 구조적 취약성은 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광고 수익이 제한적인 현실 속에서 다수의 언론사는 ‘특별 후원’이라는 이름의 자금에 의존한다. 문제는 이 후원금 상당수가 기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후원 기관의 이해관계는 곧 기사 논조로 반영된다.

비판은 사라지고, 특정 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사만 남는다. 언론이 공론장이 아니라 이해관계의 도구로 전락하는 구조다. 검은 돈의 그림자는 결국 기사 문장 곳곳에 배어든다.


지역사회 분열을 고착화하는 언론의 책임


지역사회의 분열은 언론에 의해 강화되고 고착화된다.

이념과 진영을 앞세운 언론의 분화는 정치적 갈등을 넘어 사회적 균열로 번진다. 열악한 지역 언론 시장 구조 속에서 일부 언론은 특정 진영의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역할에 몰두하게 된다.

그 결과 언론은 중립성을 잃고, 지역사회는 더 깊이 갈라진다.

정치적 분열보다 언론의 분열이 더 위험한 이유다. 언론은 스스로의 생존을 이유로 분열을 선택하지만, 그 대가는 지역 공동체 전체가 치르게 된다.


다시 묻는다, 언론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유가 무엇이든 언론은 스스로의 기능과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권력을 감시하고, 시민의 편에 서며, 사실을 넘어 진실을 밝히는 것. 이것이 무너질 때 언론은 존재 이유를 잃는다.

놀뫼신문은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겠다.

‘기레기’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필요한 것은 변명이 아니라 실천이다. 더 많이 취재하고, 더 깊이 묻고, 더 오래 기록하는 것. 그것이 지난 20년을 버텨온 이유이자, 앞으로도 버텨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 전영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