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泰寺地와 開泰寺 : 개태사지와 개태사

놀뫼신문
2016-12-20


 

개태사와 주변지역


개태사지는 현재 절터로 남아있는 충남기념물 제44호 개태사지와 사지 남쪽의 새로이 사찰로 꾸며져 운영 중인 개태사로 구분된다.


開泰의 뜻은 만사가 순조롭고 평안함이라고 한다. 더불어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936년 후백제의 신검에게서 항복을 받아내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기념으로 세운 호국적 기념사찰일 뿐만 아니라, 태조의 어진이 모셔진 성지로써 호국신탁과 도참의 명소이기도 하다. 특히 개태사가 위치한 연산지역은 태조의 통일전쟁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개태사지는 고려 태조의 진전이 있는 왕실사찰로서의 역사적 위상에 비하여 문화재로는 저평가 받고 있는 유적이다. 현재 개태사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되어 있고 사찰 내에 있는 보물 제219호로 지정되어 있는 개태사 삼존석불입상,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로 지정된 개태사 오층석탑, 문화재자료 제275호 개태사지 석조, 유형문화재 39호인 비로자나석불,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인 개태사 철확이 있다. 그리고 반출된 유물이지만 국보 제213호로 지정된 금동대탑과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청동반자가 있다.


특히 현재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개태사의 범위는 삼존석불입상이 있는 개태사 주변에 제한되어 있어, 개태사 북쪽과 주변으로 넓게 분포되어 있는 개태사자의 전체사역에 대한 지정과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최근 논산시에서 개태사지 관련 사역권에 위치한 모든 민가를 이전하고 토지를 매입하고 발굴조사를 통하여 고려 황실사찰 개태사의 옛 모습을 구체적으로 고증하는 노력을 하고 있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현재 개태사는 외곽에 약2.7km 규모의 토루형 외곽시설이 있으며, 개태사와 개태사지로 구분되는 매우 넓은 사역의 범위를 살필 수 있다.


개태사지는 개태사에서 북쪽으로 약4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데, 외형상 사찰 건축을 위해 조성한 축대가 노출되어 있으며, 그 전면에 석조 한쌍이 노출되어 있어 사역의 범위를 넓게 살필 수 있는 상태이다.


개태사 일대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대부분 개태사주변에 토성이 존재한다고 전한다. 지명에서도 확인되는데, 개태사 앞의 연산역이 위치한 지역을 성안뜰이라 부르고 개태사의 남쪽 상송으로 기록된 마을을 성너머라고 부르고 있다

즉 지역주민의 전언에서 성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흔적기관과도 같은 지명에서 성과 관련된 내용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고려 태조와 별다른 연고가 없는 연산지역에 태조의 진전이 있는 개태사가 창건된 것은 주목해야할 내용 중의 하나이다. 고려 태조는 통일전쟁 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사찰을 창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태사의 특징과 성격


개태사는 다양한 특징과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화엄종 사찰이었다는 것이다.  통일 신라 말기에는 호족의 등장과 함께 선종이 유행하였다. 따라서 고려 태조 왕건도 그 집권 초기에는 주로 선종 승려들과 많이 교류하였다. 그러다가 통일을 전후한 무렵에는 교종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교종 특히 화엄종은 전제 왕권을 뒷받침하는 사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태사는 화엄종 사찰의 성격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개태사의 화엄법회소를 태조 왕건 자신이 직접 지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해준다.


둘째 개태사는 전승기념 사찰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후삼국 통일 전쟁과 관련하여 생긴 절이라는 것이다. 충남 연산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고 나서 그 기념으로 세운 절이었다. 그런데 개태사는 새로 창건한 절이 아니었다. 견훤이 죽은 절을 一新하여 새롭게 지은 절이었다. 후백제왕 견훤의 흔적을 없애고 통일 왕조 고려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 위한 절이었다.


셋째, 개태사는 眞殿寺院이었다. 테조의 어진을 봉안한 절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진전이 있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광종 때 태조의 지진사원인 泰恩寺가 개경에 처음 세워진 후의 어느 시기에 개태사에 진전이 세워졌다고 보는 것이다. 개경보다 먼저 진전 사원이 건축되었다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광종 이후 무신 정권기 이전의 어느 시기에 진전이 설치되었다고 생각된다.


넷째, 개태사는 불교과 토속신앙, 특히 山神信仰과의 융합 속에서 탄생한 절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다양한 사상과 종교를 다 중시하엿다. 그러한 가운데 부처님의 도움과 天神 山神의 도움으로 후백제를 물리치고 통일의 과업을 이룩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천신과 산신의 도움으로 태평성대를 열게 되었다는 뜻으로 개태사 뒷산을 天護山이라 하였고 사찰이름을 開泰寺라 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개태사는 위와 같은 특징과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몇 차례에 걸쳐 증축되엇으리라 생각된다. 견훤이 이 절에서 죽을 때 이미 작은 사찰이 있었고 태조 왕건이 이 절을 一新할 때 전면적인 개축이 있었으며 광종 이후 고려 전기의 어느 시기에 진전이 건축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또 산신 신앙에 입각한 산신각도 왕건이 창건할 당시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후 고려 말 왜구의 침략으로 훼손되었다가 이후의 어느 시기에 다시 개축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전반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밝혀지리라 생각한다.

 

1980년 후반. 개태사 삼존불(보호각이 낡아 다시 짓기 위해 철거하고 삼존불 근처를 발굴 조사했으며 이때 나온 기단석, 주춧돌에 근거하여 현재의 보호각을 새로 지었다.)


1970년대. 연산공원에 있을 당시의 개태사 쇠솥


1980년대 초반. 개태사 삼존불 보호각을 다시 짓기 전의 모습


일제강점기. 개태사 석탑


일제강점기. 파손되어 방치된 상태의 개태사 삼존불



대웅전 없는 개태사


현재의 개태사는 일제강점기 김광영이라는 무속인에 의해 도광사라는 암자로 지어졌다.


그후 윤보살이라는 여자보살이 방치되어 있던 삼존불을 복구하고 현재의 개태사를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당시 개태사는 규모도 적었으며 사찰이라기보다는 토속신앙이 깊이 깔려 있는 사원에 가까웠다.


윤보살이 사망하여 22녀의 자식들에게 상속된 후 방치되어 있던 개태사를 현 주지인 양산스님이 맡으면서부터 현재의 개태사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당시 개태사는 목조기와건물 우주당 253.05(76)과 부속건물 정법궁 53.9(16), 용화전 23.14(7), 우주정 12.96(4) 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2000년 우주당(76)을 노후로 인해 철거하였다.


그후 요사채, 어진각, 신종루 등을 신축하였으나 아쉽게 공부상에는 기재가 되어있지 않다.


이는 개태사를 증축하는 과정에서 시유지를 일부 점유하게 되어 건축허가 및 준공 등의 제반 절차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당국에서는 시유지를 사찰에서 매입하여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리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있으나 사찰측에서는 본래 시유지가 논산시 소유도 아니었으며 매입코자하여도 비용 등의 문제가 있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개태사지가 1983년 도지정문화재로 지정이후 19843필지를 필두로 2015년까지 총37필지를 매입하는데 1884백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되었으나(도비50%, 시비50%) 향후 개태사지가 국가사적으로 승격되면 국비지원이 용이해질 전망이다.


현재 천년의 역사적인 사찰인 개태사는 대웅전이 없는 민낯을 보이고 있다.


논산8(6)중에 하나이며 논산시의 대표문화재인 개태사가 남한 내 최고의 고려시대 유적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개태사지와 함께 철저한 역사적인 고증을 바탕으로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전영주


자료제공 :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이호경 박사, 공주대학교박물관 이현숙 박사, 대전대학교 김갑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