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에게 나침반 되어줄 가족영화 “저 산 너머”

놀뫼신문
2019-10-30

[김수환추기경 어린시절 영화 ‘저산너머’ 촬영기]

각자에게 나침반 되어줄 가족영화 “저 산 너머”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의 어린 시절을 다룬 영화 『저 산 너머』가 김추기경 선친의 고향인 논산에서 크랭크인한다” 지난 3월 본지가 1면에 실은 기사이다. 그로부터 7개월 여 지난 10월 26일, 논산에서의 마지막 촬영을 마쳤다. 상월면 숙진2리 농협창고 내부 세트장에서, 그 위로 조금 올라간 이광실길 초가집세트에서 야간촬영을 하였다. 

최종택 감독과 60여 명의 촬영진은 그 동안 전국을 돌았다. 외지로는 김수환 추기경이 태어난 군위와 대구 계산성당, 지리산 구례와 순천낙안읍성, 고창선운사 등등이다. 그러나 주무대는 논산이다. 숙진리 본가를 위시하여 인근 상월의 대명리 꽃밭, 양촌 그리고 벌곡면 검천리였다. 그림은 벌곡에서 더 잘 나왔다. 추기경의 부친 김영석(안내상 분)이 사망하고 장례식을 치룬 곳이 검천리이다. 이곳에서는 어린 수환이가 행상하느라 집에 늦게 돌아오는 엄마를 기다리는 느티나무, 개천뚝방길 등이 등장한다. 영화제목대로 ‘저 산 너머’의 산도 검천리 산이다. 주인공 김수환은 260대 1의 경쟁을 통과한 이경훈으로, 현재 두드림 광고에도 나온다.


주촬영지 논산 구석구석 


논산은 김수환 추기경의 할아버지 김익현의 출생지이다. 김익현이 1868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붙잡힌 곳이 연산이다. 김익현은 해미로 끌려갔다가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아사하였다. 김익현의 아내, 즉 추기경의 할머니 강말손은 병인박해 당시 관아에 함께 끌려갔으나 ‘임신한 사람은 처형하지 않는다’는 국법에 따라 풀려나 논산에서 김영석을 낳는다. 김영석 나이 55세때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순교자 집안의 늦둥이! 저잣거리에서 엄마와 국화빵을 팔며 행상하는 엄마를 보면서 하느님을 알아갔던 소년 김수환! 그 소년의 이야기를 재현하는 작업의 중심지가 논산이 된 것이다. 

탑정리에서도 찍었다. 영화에는 김대건 신부가 등장한다. 당시 김대건 신부는 25세로서 한국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하다 26세에 순교를 당한다. 김신부가 25세때 김수환의 할아버지 김익현은 17세였으니 8살 위였는데, 중도에 배교하지 않고 버티다가 감옥에서 아사하는 순교자의 길을 걷게 된 데에는 김대건 신부의 설교에서 감명받은 바가 절대적이어서다. 이런 관계로 김대건 신부가 등장하는데, 한국에 귀국할 때 강경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탑정리 갈대밭에서 촬영한 것이다. 김대건 신부역은 중견배우 김영재가 분하는데, 김 배우의 세례명은 안드레아로서 김대건 신부의 세례명과도 일치한다. 

이러저런 시대적 배경과 적합한 장소를 찾아내는 데에 상당 부분은 논산 사람들에게 역할이 주어졌다. 특히 광산김씨의 족보 부분은 논산에서만 해결 가능한 대목이었다. 올해 7월 사계 김장생 선생이 세운 돈암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광산김씨 김장생 선생의 아들 중에 2남 김집 다음으로 3남 김반이 있다. 그 첫째 후손은 부자지간에 전경련 회장을 역임한 김용완/김용각 집안이다. 그 김반의 여섯째 후손이 바로 김수환 추기경의 선조이다. 


성현의 뿌리를 찾아서 


결혼을 하지 않는 신부는 본인에게서 대가 끊긴다.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하여 신부 두 명에게 족보 등집안 관련 자료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한다. 그러나 천주교 박해로 파문당한 집안이었기에 실적이 없었는데, 이번 영화를 촬영하면서 극적으로 찾아내게 된다. 25억이 들어간 이 영화의 투자자 남상원 회장은 돈만 댄 게 아니다. 올 봄 촬영지 물색에서부터 동참을 시작하였다. 영화 속의 생가는 10여 년 전 고사리밭으로 연을 맺었던 윤석헌 씨의 만여 평 밭에다 짓기로 하였다. 장소 결정을 하고 보니 김수환 추기경 할아버지가 기거하는 연산면 표정리가 지척지간이었다. 우연의 일치라 볼 수도 있지만, 이 결정과 발견은 기적의 시작에 불과하였다고, 남회장은 술회한다.

돈암서원도 지척지간인데, 연산면 고정리에는 광산김씨 종손인 김선원 씨가 종가집을 지키고 있다. 고문서와 족보를 펴고 함께 찾아보니, 막연하게 알고 있던 사항들이 명료하게 정립되었다. 김추기경 할아버지 김익현이 사계선생의 후손으로 명기되어 있음을 문서로 확인한 것이다. 당시 김익현은 참판, 세 살 위인 김보현은 판서로서 명문가였다. 그 위대인 증조부 이름은 김재성인데 참판을 지낸 명문가였다. 그 아래대인 김영석의 형 김영덕은 참판였고, 한일강제합병때 자결한 애국지사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추기경 된 것은 어쩌다가 아니고, “이러한 뿌리와 음덕, 공덕으로 된 것”이라고 남 회장은 역설하면서, 아버지를 챙기는 게 자식이듯, 이렇게 고군분투 애써 왔으니 이만하면 자기도 이 집안 아들 자격이 있음을 웃으면서 애둘러 표현한다.

대개는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거기에 따르는 게 영화제작의 흐름이다. 그런데 저산너머는 그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새롭게 발굴해가거나 미리 정해진 섭리 지점으로 회귀하는 일들이 연잇는 거 같다”고 자평한다. “논산에서 시작한 게 기적이요 축복”이라고도 술회한다. 보통 영화 촬영장은 전투분위기인데, 이 영화 촬영진들은 팀플레이가 잘 되어 큰 막힘 없이 진도를 나갔다고 한다. 올 한해 영화 제작진이 영화촬영 본부처럼 이용해온 곳이 김홍신 문학관이다. 

김홍신 작가는 김수환 추기경과 자별한 사이였다. 홍상문학관 건립에 전액 투자한 남상원 회장은 불자이지만, 김추기경의 인품에 끌려 처음에는 공부 수준였다가 지금은 탐구 단계로 진입중이다. 처음에는 영화에 백지 상태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투자자로서뿐 아니라 영화에도 출연하여 시장통에서 장기 훈수도 두고 싸우는 두 사람 화해시키는 단역배우로도 출연하였다. 


불교가 천주교에게 양보하고...


본인의 변신뿐 아니라 주변 정황도 기적으로 보인다는 사례 제시가 또한편의 영화 같다. 촬영의 마지막 장소는 26일 논산에서 찍은 다음 지리산 거쳐 고창 선운사이다. 31일, 선운사에 있는 동굴에서 천주교 세례식을 집례하는데, 이 촬영을 허락한 곳은 다름 아닌 조계종 선운사측이다. 

나바위 암자에 있던 스님이 양보하여 건립이 가능했다는 강경 나바위 성당 미사 촬영에도 여러 사람이 필요했다. 이때 난데 없이 25명의 군인이 등장했다. 1930년대 당시 두발은 양극이었다고 한다. 상투를 틀거나, 머리를 밀거나! 당시 미사를 보는 100여 명의 신도 중에 머리 깎은 사람이 다수 필요했는데, 이 일의 해결사로 나선 사람이 김형도 도의원이었다. 집이 연무대인 김의원은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서 촬영에 조력한 것이다. 머리 긴 사람으로는 여칠식, 박두서 등이 상투를 틀고 단역배우로 공식 출연하였다. 

이번 영화의 특징은 논산사람들의 대거 출연이다. 그 중 맹활약자는 김형도 의원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아버지 김영석의 직업은 옹기장수였다. 당시 옹기장수는 백정보다 급이 낮은 천민이었다. 영화를 찍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연산 개태사쪽으로 가마터가 있었다고 한다. 김수환 아버지를 출산한 할머니는 고향인 표정리로 돌아와 몸을 풀었으므로 다시 사형장으로 끌려갈 신세가 되자, 옹기장수들이나 드나드는 천호산 깊은 산속 가마터쪽으로 몸을 숨긴다. 그러다 보니 그 아들은 옹기장수가 되고.... 김영석은 31세에 17살 서중화를 신부로 맞아들이면서 고된 옹기장수일을 더 열심히 하게 된다. 



배우로 대거 데뷔한 논산사람들 


영화의 첫 장면은 옹기장수들이 지게를 지고서 깊은 산길을 걸어나오는 장면으로 인트로할 확률이 높다. 여기에 김의원은 김수환 아버지인 김영석 동료로 등장한다. 김영석은 55세에 막내 수환이를 낳고 6년 뒤에 세상짐을 내려놓는다. 그 지게는 김영석이 61세로 죽을 때 장례운구차가 돼준다. 당시 꽃상여는 부자들이나 탔던 거고 서민 천민은 멍석말이하여 지게에다 지고 공동묘지로 보냈던 시절이다. 이 장례식 행렬에는 논산사람 최재욱, 김도천도 보조로 출연하였다.  

아버지가 죽은 후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 왕대 서중화 여사(이항나 분)는 풀빵장수를 하면서 8명의 자식들을 먹여 살린다. 이때 저잣거리에서 풀빵 사러 오는 사람은 전민호, 장터 국밥집 주모로는 깨순네가 등장한다. 문경장터에서 장기두는 사람은 대명리 박두서와 윤석헌, 이 둘에게 훈수하고 쌈 말리는 사람은 남상원..... 

풀빵장수하면서 자식들을 키워나가는 어머니 서정화는 배우 이항나가 맡았다. 큰딸 명례, 둘째아들 달수, 여섯째 아들 필수, 일곱째 동환, 여덟째 막내 수환.... 이 중에서 동환과 수환은 성장하여서 천주교 신부가 된다. 시집간 큰딸은 자식들 키우느라 젖이 마른 엄마 대신 수환에게 젖을 멕여 키운다. 신심이 도타왔던 어머니는 어느날 깨닫는다. “얘들은 내 자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식이구나.”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의 씨앗이 자라면서 두 아들에게 사제의 길을 권한다.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본인의 삶으로 신자의 길을 걸었다. 풀빵장수를 하던 중 경쟁자가 나서자 양보하고 행상으로 전직한다. 이렇게 온몸으로 고생하는 엄마 속을, 수환이라고 해서 아니 썩일 리 없었다. 친구들 따라 서리하고 숙제 안 하고... “너 같은 놈은 신부 되기 텄다”며 탄식하면 수환은 이내 잘못을 뉘우치고 운다.  시간 좀 지나면 또 속 썩이기 반복하고...

이성호 제작사장에게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돌직구했다. 저 산 너머 “각자 자기 길 찾기”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저 산 너머”는 종교영화라기보다 가족영화로 분류되기를 원한다는 개인적 관점도 밝힌다. 내년도 2월 16일은 김추기경 선종 11주기이지만, 개봉은 5월 가정의 달이 적기라고 잡아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영화를 전혀 몰랐다는 투자자 남상원 회장은 영화도 영화지만 인간 김수환에 대하여 매료되어 있는 듯하다. 우리는 세계 최초라든가 국제적이라는 말 쓰기를 자랑스러워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47세에 추기경이 되었는데, 이는 세계 최초이다. 올해도 7월 광산김씨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전인 4월에 경사스러운 발표가 또 하나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세계선교모범” 14위가 되었는데, 아시아인으로서는 유일한 1인이라고 들려준다. 세계적으로 성인 숫자가 수천 명에 달하는데, 14인이라는 희소 숫자는 대한민국의 영예이자 광산김씨 집안의 영광이라는 부언 설명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1920년 당시의 삶이 또 다른 양상으로 부활하는 곳, 2019 논산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적의 땅 같다. 


- 이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