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100주년기념 기획시리즈(14-끝)] 금석문으로 본 노성의 독립운동가들

놀뫼신문
2019-12-18

[3·1운동100주년기념 기획시리즈(14-끝)]

금석문으로 본 노성의 독립운동가들

조중헌(논산향토문화연구회장)


다음은 논산향토문화연구회가 펴낸 “논산과 3·1절 14집-합본”에서 조중헌 회장의 [논산시 독립운동가 금석문]이다. 여기에는 28명의 독립유공자비 사진과 비문 한글 해석이 오롯이 기록되어 있다. 현장 하나하나 다 찾아가서 탁본이나 사진으로 찍은 다음, 한글 번역까지 해놓은 금석학자 온몸의 흔적들이다. 

비석이 세워져 있는 분 이름은 총 28명이다. 1. 김태호 2. 윤이병 3. 신현장 4. 박용진 5. 염상오 6. 윤태병 7. 이남규 8. 백남식 9. 권종해 10. 손필규 11. 윤교병 12. 윤홍중 13. 이근석 14. 남기언 15. 김조현 16. 이학순 17. 오철식 18. 곽성진 19. 배영직 20. 최영호 21. 권기수 22. 권기수 23. 김병년 24. 권인규 25. 배영술 26. 배영달 27. 강세형 28. 김종현

여기서는 노성과 관련 있는 분들만 소개한다. 합본집에서 윤흥식 논산향토연구회 총무는 [파평윤씨 노성종중 독립운동]을 집대성하였다. 논산의 독립운동가 중 노성에 윤씨가 많은 이유가 리얼하게 설명되어 있다. 여기 조중헌 회장이 해설한 금석문에도 파평윤씨가 비중있게 등장한다. 그 일맥상통함을 실감하기 위해서라도 본지 인터넷판에는 “논산지역 독립운동사”를 읍면동별로도 빠짐없이 실어보고자 한다. 2019년, 대망으로 맞았던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의 해’가 저문다. 올해 본지의 기획시리즈도 여기까지다. 그렇지만, 일본과 강대국들의 안하무인과 위협이 지속되는 한, 2020 우리의 결기는 또 다르게 구성되고 표출될 것이다. 


- 이진영 기자


1. 윤교병(尹喬炳)

윤교병 선생 묘비(상월면 지경2리)


애국지사 윤교병은 노성 병사리의 망족인 파평 윤씨의 후예로 1881년 8월 28일 상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직하고 재질이 영민하였으며 학업이 일취월장하여 주위의 촉망을 받았다. 그러나 국운이 기울어 일제의 침략 음모로 국모가 시해되고 을사늑약을 맺어 국권을 잃으니 윤공은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을 흘리며 통분을 금치 못했다. 

윤공은 분연히 일어나 보국에 몸을 바칠 결심을 단단히 하고 상경하였다. 그 때 나이 27세로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동서개진교육회를 조직하고 민족을 계몽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교육회가 와해되었다. 

윤공은 고향으로 내려와 1919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노성 장날을 기하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항일 연설을 역설하니 군중이 자꾸 모여들어 큰 무리를 이루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모여든 군중과 독립만세 행진에 당황한 일경은 주모자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찾고 있었다. 

윤공은 몸을 피해 지하운동으로 군자금 모금 운동에 나섰다. 만경 임시 연락 요원 나상필과 몰래 만나 군자금 모금을 참여하여 충남 일대를 돌며 650원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재정부장의 직책을 맡고 군자금 모금을 위해 귀국하여 고향의 가산을 정리하여 350원을 마련하여 전달하기도 하였다. 

1921년 윤공은 일경에 나상필과 함께 체포되어 10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 2년간 갖은 고문과 옥고를 치루고 출옥하였으나 1930년 9월 30일 돌아가 상월면 지경2리 뒷산에 장사하였다. 

1980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83년 논산 군민이 뜻을 모아 그의 묘소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묘비를 세워 놓았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 윤이병(尹履炳)

윤이병 선생 사적비문(병사리)


성재(省齋) 윤이병 선생은 본관이 파평이요 자는 계성(繼聖)이며 철종 6년 서기 1855년 11월 1일 논산군 구자곡면 왕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제 충신의 덕행과 문무를 겸하니 모두들 선생을 일러 김지산金池山 정기를 타고 난 분이라 일컬었다. 

선생은 7세 되던 해에 노성면 내촌리로 이사하고 당시 대유학자인 경회 선생에게 학문을 닦았다. 1889년 구국의 뜻을 품고 무과에 올랐으며 국가의 위기를 당하여 구국운동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1895년 8월 20일 영선사 주사로 있을 때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자 선생은 상소를 올려 범법자들을 엄벌할 것과 국무대신을 파면할 것을 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10월 정부 요직에 있는 친일파들의 숙청 계획을 세웠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이듬해에 42세 때 도리어 무고죄로 고군산도에 귀양 갔다가 12월 30일에 귀양에서 풀려났다. 선생의 충직과 청렴결백함이 고종에게 알려져 한성재판소 수반판사에 임명되어 모든 판결을 엄정하게 하므로 탐관 호족도 숨을 죽였고 정의로써 국맥을 바로잡아야 할 것을 애타게 외쳤다.

 1903년 1월 경부철도 부설권이 일본에 이양되자 러시아는 경의철도 부설권을 요구하므로 선생은 “외국인에게 허가해주면 안된다”고 진언하며 통분함을 참지 못하고서 일본과 러시아의 요구를 강력히 배격할 것과 간교한 매국도배들을 처벌하도록 하였으며 재정 양곡의 정책 등을 상소했었다. 

그 해 5월 청국의 동순태(同順泰) 상표와 일본은행권의 국내 유통을 적극 반대하는 민중운동을 일으키자 양국은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주모자의 처벌과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1905년 51세 때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국가의 위급을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전국에 살포하며 을사늑약 파기와 을사 5적의 처형을 요구하였다. 이듬해에 선생은 농상공부장관과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민중을 교도하려고 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를 창립하고 풍속을 선도하며 국권 회복의 애국운동을 펼쳤다. 

1907년 봄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 동우회를 창립하니 황실 존중과 동양평화와 청년교육이 삼대강령이었고 그래서 수개월이 채 못 되어 회원이 수천 명에 달했었다. 해아밀사사건에 이어 고종 양위와 군대 해산으로 국운이 어두워지자 동우회원들이 앞나서 일경과 싸운 끝에 선생은 회장으로서 투옥되었다. 이듬해 54세 정월 내란죄라는 평리원의 판결로 지도에 유배되었다가 2년이 지나 1910년 9월에 망국 후 풀려 나왔다.

1913년 9월에 독립의군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독립의군부는 의병들이 무장하여 투쟁하는 독립군단체로 서울에는 중앙순무총장이 있고 각 도에는 도순무총장이 있고 각 군에는 군수, 면에는 향장을 두어 일제식민통치를 거부하고 비밀리에 독립 정치를 주장하는 단체로 세계에 알리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려 노력하는 단체이다. 

선생은 1914년 4월에 일경에 체포되어 거듭 영어의 몸이 되었고, 풀려 나왔다가 다시 5~6년 후 광복의 뜻을 품고 북만주로 향하던 도중 북청에서 선조 문숙공 관의 현몽으로 결심을 굳혔으나 불행히도 일본 경찰에 다시 체포되어 경성으로 옮겨와 갇혔다가, 이른바 회유정책으로 1개월 뒤에 방면되었다. 

1919년 65세 되던 해 삼일운동에 가담하여 열렬한 투쟁을 전개하다가 서울 적선동에서 한남주 등과 13도 대표의 국민대회의 결의를 지지하고 한성정부안에 의거한 임시정부 수립을 요구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법정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민족의 대의를 떨쳤으며 일제의 만행을 큰 소리로 꾸짖고 심리조차 거부하였다. 

1921년 7월에 병으로 보석되어 고향에 돌아와 마침내 11월 17일에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논산군 노성면 병사리 뒷산에 안장하고, 1968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1977년 10월에 고향 인사들이 성재선생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그의 묘소 밑에 사적비를 세워 놓았다. 


3. 윤홍중(尹弘重)

윤홍중 선생 묘비(가곡리 증골)


애국지사 혜산 윤홍중 선생은 파평인으로 애국지사 윤이병의 아들로 1875년 8월 18일 노성 병사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조국 광복과 주권회복을 위하여 몸 받치기로 결심하였다. 

선생은 약관에 한국무관학교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으면서 반일운동의 일환으로 삭발령에 반대하여 시위를 하다가 퇴학을 당하였다. 아버지 윤이병 선생이 옥고를 치룰 때 조석으로 식사를 가져가 봉양하였다. 

1907년 서울에서 구국동우회에 들어가 항일결사대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한 달 동안 구금되었었다. 

1916년에는 풍기에서 동지 노백린, 김좌진 등과 광복단 조직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한군을 상해임시정부 대표로 파견하고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등과 협의하여 다수의 무기를 구입하여 일본 요인과 주요기관을 폭파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대구에서 체포되고 10개월 동안 가혹한 고문을 겪으면서도 일의 내막을 실토하지 아니하여 동지들의 희생을 막았다. 

 1927년 서울에서 60여개 소년단체를 규합하여 조선소년연합회를 결성하는데 방정환, 변세택, 조문환 등 14명의 동지와 함께 창립준비위원으로 선임되어 결성하고 자주독립정신을 배양하였다. 

1933년 6월 25일 일경의 가혹한 고문으로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82년 8월 15일 정부에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4. 윤태병(尹太炳)

윤태병 선생 공적비(읍내리)


애국지사 창송(蒼松) 윤태병 선생은 국운이 기운 한말에 태어나 일본의 강제 합병으로 나라가 존망의 기로에 서 있을 때에 분연히 일어나 나라 국권의 회복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윤 선생은 파평인으로 논산군 노성면 읍내리에서 윤상래의 장남으로 태어나 청년이 되었을 때는 이미 국운이 기울어 동지인 윤상기, 백남식, 조병채, 임종구, 강중견 등과 독립운동의 군자금을 모금하는 데 앞장서서 일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룬 애국지사이다.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옥고로 인한 병으로 돌아갔다. 

광복이 되고 사회가 안정이 되자 군민들이 일어나 그의 애국 공적을 들어 정부에서 1977년 12월 13일에 건국포장을 추서하고, 그의 묘소에 1980년 시월에 군민의 이름으로 공적비를 세웠다. 

다시 창송 윤선생, 송은 백선생 공적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1983년 5월 15일에 노성면 읍내리 도로변에 공적비를 세워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며 그 내용을 새겨 놓았다. 

그 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5. 김종현(金宗炫)

김종현 기적비(죽림1리)


김종현은 김해인으로 별칭이 인수인데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이 있는 학군 양무공 휘 완의 십대손이며 고의 휘 상섭의 아들로 1895년 논산군 노성면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15세에 사서삼경을 다 배우고 고전을 익혀 충효의를 몸에 익히며 학문이 점점 높아져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910년 경술년 국치의 소식을 듣고 학문에 열중하고 있던 선생은 울분을 금치 못하고 북향사배하고 3일간 단식을 했다. 그 때 나이 15세이어서 주변에서는 의로운 소년이라고 부르며 소문으로 퍼져 나갔다.

 1915년 20세 나이로 “조국광복은 오로지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향리에서 자제교육에 힘을 쏟았다. 

 1918년 11월에 단호히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앞서 나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상경하여 독립운동의 선구자인 손병희 선생의 문하생이 되었다. 

 1919년 2월 하순까지 만 3개월 동안 손병희 선생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으며 독립연판장과 기밀 서류 등을 비밀리에 독립운동 동지들을 찾아다니며 전달해 주었다. 그 해 2월 24일 손병희 선생의 지시에 따라 논산, 강경지방의 의거 책임자로 임명받고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귀향하여 3월 1일 의거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왜경의 감시를 피해 밤으로 큰길을 피해 외진 길을 이용하여 귀향하다보니 3월 2일에야 겨우 도착하여 독립선언문을 전달하고 3일 정오를 의거시기로 정하였다. 

1919년 3월 3일 논산과 강경에서 각각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였다. 김종현 선생은 논산에 집결한 시위군중과 학생들을 지휘하며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유감없이 발휘하다가 이를 저지하던 왜경에게 체포되었다. 

한편 왜경들은 당일 선생의 집을 급습하여 수색을 하면서 선생의 부인인 윤씨 부인을 총검으로 위협하고 협박했으나 부인은 애국지사의 부인답게 굽히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였다. 그 해 6월 10일 3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출옥하였으나 여독으로 고생하였다. 

1933년 해방도 보지 못하고 9월 타계하였다. 

그 후 김종현 선생의 공적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 선생의 독립운동 정신과 뜻을 기리고자 1981년 11월 29일 그의 고향인 논산시 노성면 죽림리에 세워 놓았다. 


6. 백남식(白南式) 

송은 백남식 선생 공적비(교촌리) 


송은 백남식(松隱 白南式) 선생은 일제의 강압적인 국권 찬탈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분연히 일어나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 독립운동을 하였다. 송은 백 선생은 1880년 논산군 노성면 교촌리에서 백낙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잃게 되자 청년인 백 선생은 울분을 누를 길 없어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분연히 일어나 상경하여 항일단체인 대동단에 가입하고 군자금 모금에 앞장서서 모금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1950년 돌아가니 1977년 정부에서 건국포장을 추서하고 1983년 군민이 뜻을 모아 그의 묘소에 공적비를 세우고 1983년에는 송은 백 선생과 창송 윤 선생의 공적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 노성면 읍내리 도로변에 공적비를 세우고 백 선생의 공적을 기리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