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사에서 향적산 국사봉 가는 길] 신천지로 상처받은 향적산 ‘치유의 숲’으로

놀뫼신문
2020-03-11

[무상사에서 향적산 국사봉 가는 길]

신천지로 상처받은 향적산 ‘치유의 숲’으로



계룡산은 이름이 여럿이다. 향적산은 계룡시쪽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향적(香積), 숲에 향나무가 많아서 그 향이 쌓이는 산이다. 산에 가면 산냄새가 물씬이다. 계룡산은 더 그러하다. 

계룡산 국사봉에 오르는 길은 크게 둘이다. 엄사리 청송약수터에서 출발하면 싸리골을 거쳐서 국사봉이다. 또 하나는 향한리 무상사쪽이다. 지름길 코스라서 좀 가파르다. 그런데 향적산 진입로는 엄사리에서만 해도 열 군데가 넘는다. 주 등산로 외에도 샛길이 씨줄 날줄 얽혀져 있어 산속의 거미줄이다. 어쨌거나 도달하는 곳은 국사봉인데, 국사봉의 다른 이름은 향적봉이다. 그래서 향적산이기도 하다. 


향적산, 그리고 할머니산 


계룡산 중에서 향적산은 기도발이 잘 받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무속인들이 향적산 골골에 기거한다. 그들은 자신의 영화를 위해서도 기도하지만 이웃과 나라를 위해서도 치성을 드린다. 비나리 치는 그 자리에서 치밀어 오르는 온갖 번뇌와 욕망을 짓누르고 있다.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오는 그것들을 눌러주는 것이 인향(人香)이다. 향적봉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인향 가득이고, 인향만리의 진원지여서 향적봉이란다. 향적산이 좋아 20여년 전부터 이곳에 눌러앉은 김태호 씨의 설명이 그러하다. 

그는 계룡산을 할머니산이라고 부른다. 지난 해 5월 ‘계룡산 인걸지령 계룡전’이 계룡문화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다. 계룡산 인근에는 영험한 계룡산 정기가 배출한 인걸들로 즐비하다. 그 유명 무명 성현들은 각자의 흔적을 남겼다. 한시와 글, 교훈적인 사연, 사찰, 지명의 유래, 동식물, 민속놀이, 무속신앙,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등 다양한 소재를 담아 전시하였다. 이 전시회를 기획하고 진행한 사람이 계룡서예원 김태호 원장이다. 

그에게 향적산 가이드를 부탁하였다. 네 명이 모였다. 계룡시 엄사리에 사는 손병륜 논산시친환경농업인연합회장은 7년전 신천지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을 때 임원은 아니었지만 맨몸의 행동대원이었다. 또다른 동행은 김명숙 씨. 향적산을 거의 매일 오르는 향적산 매니아이다. 작년 4월에 “‘훼손’ 아닌 ‘천혜’의 숲으로 거듭나기를”이라는 제목으로 향적산 기사를 쓴 본지 시민기자이다. 이렇게 네 명이 무상사 주차장에서 만났다. 

무상사는 프랑스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다. 이 조용한 산사에 요란한 굉음이다. 향적산 치유의 숲을 조성하기 위한 토목공사가 진행중이다. 뿌리채 뽑힌 나무들이 트럭에 실려서 내려온다. 자연을 그대로 살려가면서 개발해달라는 주문은 공염불로 그칠 거 같다는 불길 예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산은 산이다. 



애정 없이는 스쳐지나가는 것들 


김 원장은 땅을 보라고 했다. 신작로 흙길이다. 계룡산은 정상도 바위산이 아닌 흙산이라면서, 바위산이 오랜 성상 풍화작용으로 이제는 부드러운 흙이 되었고, 그래서도 할머니산이라는 설명이다. 가끔 큰 바위가 있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니, 큰 바위를 가리킨다. 대개 거석(巨石) 밑은 기도처로 삼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물이 있다고 단언한다. 싸릿골쪽으로는 ‘물탕집’인데, 거기에도 기도처가 많은 이유가 물이 있어서란다. 바위 아래는 물과 신단이지만 바위 꼭대기 어딘가에 신검이 숨어 있단다. 무속인들이 칼춤 출 때 비장의 장구인 신검(神劍), 그 금속이 햇빛과 각도가 맞으면 반짝이며 일부를 보여준다고....

이 영험한 땅도 코로나를 물리치지 못하나보다. 거북암 초입에 ‘코로나로 인하여 출입금지’ 안내글자가 써 있다. 산길 옆으로 무덤이 있다. 안내를 해주어서 비로소 찾아간 무명도인의 안식처이다. 돌 병풍이 둘러져 있고 무덤 앞에는 평평한 돌 제단이 있다. 무덤 자체가 하나의 자연이요 우주이다. 이런 무덤을 파보면 관 밑에 관, 또는 유해. 명당자리는 이리 층층시하(層層侍下)라고 한다. 무명 묘도 잘 안 보이는 판에, 땅속까지는....

“향적산방”이라는 팻말이 이정표 역할을 한다. 이정표 따라서 올라가는 가파른 신작로에는 탱크바퀴 같은 고무타이어들이 박혀 있다. 산속에서 사는 이들이 전화를 하면 이 길로 해서 올라오는 차가 있단다. 가파른 길을 차고 올라오려면 필요한 컨베이어 벨트길이다. 사람살이는 어디나 똑같은 모양이다. 

향적산방 주변에는 연기 나는 집도 있고 텃밭도 있다. 텃밭 위쪽이 용바위이다. 용바위에 포인트가 둘 있다. 득도를 많이 했다고 소문난 지점, 여기에도 물이 없을 리 없다. 향적산방은 정역의 대가 일부 선생이 거처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머물기만 했는지, 득도까지 했는지는 물어볼 사람이 없다. 향적산방은 비어 있고, 묵언(默言)해달라는 안내글씨만이 집을 지키고 있다. 동네사람들이 일부선생을 찾아와 잘 사는 법을 물었다고 한다. “이 산을 사두면 나중에 돈이 될 걸세.” 선비답지 않은 문답으로 보이지만, 현실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철거되어 버린 장군암


좀더 올라가니 장군암이다. 그런데 아뿔싸, 암자는 간데 없고 얼마 전 철거한 모양이다. 장군암이라는 싸구려 간판과 소유자 계룡시청의 안내문이 점령군의 팻말처럼 서 있다. 바위 밑에 석간수가 노정되어 있다. 바위 밑 기도를 드리는 입석과 신석들까지는 허물어뜨리지 않았다. 신천지 이만희 교주가 득도한 곳이 장군암이라고는 설도 있다. 신천지가 향적산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 듯 모를 듯하다. 

신천지 득도설은 설득력이 다소 떨어져 보인다. 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신천지가 무속인들이 득세하는 이곳에서 도를 깨쳤다?? 일견 물과 기름의 조합처럼 보여서이다. 그들 교리에 신세계 새누리는 동서양을 통합한다는 내용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신흥종교는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어떤 상징물을 필요로 하는데, 그 영험한 장소로 계룡산 향적봉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국사봉, 향적봉에 오르면 탑이 둘 서 있다. 천지창운비와 오행비가 있다. 북한에 살았던 조미양 할머니가 구월산에 있는 단군 성조의 얼을 이곳으로 옮겨 모시고, 단군 성조를 받들다 1948년 작고하자 며느리 손씨 부인이 시어머니의 공덕을 기리고 그 정신을 받들기 위해 비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 고부(姑夫)가 비를 세우기 위하여 머문 곳이 장군암이라고도 한다. 아참, 일행이 하나 늘었다. 김원장이 향적산방에서 득도포인트, 물 등을 설명할 때 귀 쫑긋하는 등산객들이 있었다. 산악자전거를 타는 이는 좀 듣다가 앞서갔지만 한 여인은 끝까지 경청하다가 자연스럽게 합류하였다. 향적산이 좋아 향한리에 통나무집을 샀는데 그 집에 천부경과 단군신상을 모셨다고 한다. 


천지창운비, 문화재로 보존되기는커녕


천지창운비는 1923년 신도안으로 이주해온 천도교의 초부당 이일형이 건립했다. 국사봉의 자태가 천계황지(天鷄黃地=봉황이 깃드는 천하의 길지)로 당시 일본에 국가를 빼앗긴 국권회복을 기원하는 비석이다. 4면에 새겨진 글씨는 동=천계황지, 서=佛, 남=南斗六星, 북=北斗七星이다. 지금은 탑만 있지만 자세히 보면 4개의 기둥 자리가 있다. 좀더 멀리에는 8개의 돌 흔적이 있다. 우주를 담은 천체 집우(宇) 집주(宙)이다. 이 비석은 정자로 지어졌는데 누군가에 의하여 훼손되어 이제는 비석만 덩그라니 남아 비바람을 온 몸으로 맞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근거로 김원장은 아찔한 낭떠러지 밑을 가리킨다. 직접 내려가서 살펴본 결과 그 밑에 건축물 파편들이 고스란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일제때 일본인들이 훼손했는지, 해방후 타 종교인들이 그랬는지는 오리무중이다. 비석 자체에도 새겨진 이름들 투성이다. 종교전쟁, 이름을 남기고 가려는 인습 등으로 몸살을 앓으면서도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한 채 인간풍상까지 온 몸으로 겪고 있다. 와중에도 이 비석을 신석으로 믿는 이들은 틈 사이에 자기 사진도 끼워넣고 하면서 계룡산 기를 받으려 한다. 

밤이면 국사봉 절벽 밑으로도 사람나무들이 출몰하기도 한다. 낮에 노가다가 끝나면 저녁을 먹고 올라와 기도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그들은 이불도 없이 한 밤을 지새지만 기독교인인 손병륜 씨는 날씨가 춥건 덥건 새벽에 올라와 한참을 묵언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단다. 

국사봉에서 김원장은 계룡산의 정상인 천왕봉 대신에 연천봉을 주목한다. 계룡산 봉우리 중에서 백두산을 향하는 유일한 곳이 연천봉이어서다. 북쪽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북면(北面)은 영어로 North Face다. 언제부터인지 이 브랜드가 우리 나라를 휩쓸다시피하는데, 계룡산과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도 싶다. 한때 ‘계룡선녀’라는 드라마도 나왔고, 정도령, 정감록... 샵인샵처럼 계룡산 품 안에는 또다른 계룡산이 안겨 있고... 이래저래 계룡은 신비 가득이다. 

국사봉에는 전망대가 있다. 시내쪽을 내려다 보니 아파트 숲이다. 숲속 아파트는 숲에 둘러싸여서 행복한 보금자리이다. 문제는 저 고층아파트가 계룡산의 시야를 가리고 정기를 차단하는 가름막이라고 손병륜 씨는 흥분한다. 신천지도 육탄으로 막았던 그는 23층 넘는 군인아파트 설계도를 15층으로 끌어내리는 데에도 온몸을 던졌다. 기자들을 불러모으고 투쟁의 선봉에 섰던 시절의 이야기가 무용담으로만 들리지 않는 게, 계룡산을 아끼는 사람의 눈에 고층아파트는 천하무식 점령군으로 비쳤을 성싶다. 



신천지 둘러싸고 엎치락뒤치락


남쪽 방향으로는 연산(連山) 황산성 가는 길이다. 산등이 굽이굽이 용의 꼬리처럼 이어져 있다. 산등성이를 타고 연산에 가서 순대국밥 먹으러 가는 이들도 있다. 

하산하면서 장군암 자리에 와서 철거를 두고 논쟁이 붙었다. “시가 매입을 하였다 하더라도 이런 집은 보전할 생각을 해야지....” vs. “잘 했다. 그 자리에 서니까 앞이 탁 트여 참 시원하다.” ‘좋아요’ 측 얘기가 처음에는 황당하게 들렸다. “장군암에 사람들이 사니까 그 마당 밟기도 신경 쓰였다. 더구나 뒤에 숨겨져 있는 석간수는 과객들 목을 거의 축여주지 못했다. 전망 좋은 장군암은 이제 우리 시민 모두의 공간이 됐다.”

이 논쟁은 무상사 지나칠 때도 이어졌다. 무상사 뒤편으로 해서 올라가는 등산로는 폐쇄되어 있다. 무상사 소유의 사유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국사봉 안내석 화살표는 여전히 산쪽을 가리키고 있다. 손 회장은 계속 말을 잇는다. “이 향적산을 신천지에게 팔았다면 계룡시민 누가 감히 여기를 밟고 지나가겠어요?” 당시 그는 택배를 하는 최악의 경제 상황에서도 일 끝나자 마자 대책위에 합류했다. 현수막을 걸었지만 시청에서 철거해가 찾으러 갖지만 회수하지 못했고, 그래서 저녁에는 현수막 모두 내리면서 지켰고 아침에는 다시 거는 숨바꼭질을 벌여야 했다. “그 때 신천지가 향적산을 사고 계룡시 아파트를 싹쓸이하여 지금 대구처럼 신천지교인들 집단거주지가 되고, 그들이 신천지 시장을 뽑고 했다면?....” 

7년 전, 이곳 향적산에는 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당시 계룡시장은 왜 재선을 앞둔 채 낙마를 하고, 현재의 계룡시장은 멀쩡히 잘 있는 향적산을 비싼 돈 들여가며 구매하였는가? 이만희 교주의 내연녀 김남희 씨는 계룡 어디에 살며, 엄사리에 있다는 빌딩은 어디에 있는가? 신천지 공인 제2인자였던 그녀는 왜 이만희에게 결별 선언을 하였나? 일전에는 이만희 씨가 계룡을 직접 다녀갔다고도 하는데.... 천계황지 계룡산 자락 계룡시는 신천지와 어떤 연(緣)인지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본다. 


- 이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