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100주년기념 기획시리즈(9)] 논산사람 서재필 다시 만나는 날

놀뫼신문
2019-04-10

[3·1운동100주년기념 기획시리즈(9)] 

논산사람 서재필 다시 만나는 날

2017년 서재필기념사업회 기념식 당시 모습


4월 7일은 신문의날, 보건의날이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독립신문』 창간 61주년을 기하여 언론인들이 제정한 날이다. 4월 10일, 독립운동가 송재 서재필 박사 기념식이 열린 날이다. 연무체육공원 실내체육관서 열린 이 기념식은 올해로 15회째이다. 송재 서재필박사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논산시와 연무읍, 논산문화원이 후원하였다. 연무읍번영회(회장 안일순)가 주관단체로 나서는 것은, 서재필 박사의 고향이기 연무읍이기 때문이다. 금곡리 256, 당시의 행정구역명은 은진군 구자곡면 화석리였다. 

이날 행사에 유족과 시민, 각급기관단체장 등 100여 명이 참석하여 체육관을 채웠다. 식전행사는 특강이다. 특히 올해는 3·1운동100주년을 맞아 ‘3·1운동과 서재필의 독립운동’이란 주제의 특강이 펼쳐졌다. 강사로는 문학박사인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장이 나섰다. 1부 기념식이 시작되었다. 서재필 박사의 생애와 업적 소개는 논산시낭송인회 이필붕 회장이 맡았다. 윤숙희 회원 기념시 낭송, 유공회원 공로패 전달에 이어 단체장 기념사, 이어서 유족대표 인사말로 마쳤다. 묘소참배는 2부 순서이다. 선생은 1951년 87세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1994년 4월 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고종의 절대군주제와 상반된 민주국가를 제창한 만민공동회


구한말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는 김옥균·홍영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독립신문』발간과 독립협회 결성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민족의 선각자였다. ‘송재 서재필박사 기념식’은 지난 2004년 3월 25일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화석개발위원회에서 서광효(서재필부), 성주이씨(서재필모), 송재서재필, 부인광산김씨를 추모하기 위한 사단 설립을 결의한 데서 시작됐다.

논산에는 서재필박사기념사업회 외에도 선생에 대하여 유별난 애정을 표출하는 개인도 눈에 띈다. 우선 서재필전도사로 불리는 윤석일 강경역사문화연구원장. 강경 제일감리교회 담임 시절, 강경역사문화관에 서재필박사코너도 마련할 정도다. 1~2층에 분야별로 정돈되어 있는 근현대사 전시관은 천안의 독립기념관 별관 못지않다. 윤원장은 “서재필 선생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미국시민권 1호, 미국의사 1호, 미국공무원 1호, 국제결혼 1호, 심지어 처음으로 골프친 사람”이었다고 소개한다. 고종이 주장하던 절대군주제와 등을 지고 반대편에 서서 민주국가 건설을 주창한 선구자였음을 강조한다. 한편, 은진면 토양리에 사는 장세근 씨는 서재필 박사 소개 논문을 쓸 정도로 서재필 매니아이다. 

연무대 선샤인랜드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미스터션샤인(미·션)”의 시대적 배경은 구한말이다. 서재필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김은숙 작가가 이름없는 의병들을 끌어낸 점은 한국사에서 위대한 작업이다. 그 무명의병들에 비하여 서재필은 지나치게 드러난 개인이다. 미·션에서 이병헌으로 분한 유진초이와 교집합도 있어 보이지만, 둘의 시대극 배역은 상당히 달라 보인다. 클라이맥스만 보더라도 이병헌은 사랑을 위해 죽었고, 서재필은 해방후 귀국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 되었으니 말이다. 

혁명가, 정치가, 의사, 교육자, 군사학전문가, 독립운동가, 사업가, 시인, 문필가, 언론인, 박사위의 박사.... 이리도 유명한 서재필이지만, 후세들은 그 이름 석자 정도만 기억할 뿐이다. 한때 3천 명 모였던 연무대 서재필 기념사업회 열기를 봐도 온도차가 느껴진다. 서재필 기념관으로 논산시에 내놓은 땅 3천평은 바람만 오가고 있다. 100여 년 그 전, 그 후 풍전등화 조선 앞에서 개척자, 선구자로서 형극의 길만 골라서 걸어갔던 고독한 영웅 서재필! 이제 그 좁은길을 평범한 시민 하나가 밝혀주는 손전등에 의지하여서 걸어가 본다. 2부 행진곡 중, 오늘은 1부이다. 


- 이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