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충남지역언론지원사업] “충청의 동학, 논산에서 함성을 토하다”

놀뫼신문
2020-07-23

[2020충남지역언론지원사업-4]  동학농민혁명, 충남에서의 발자취를 따라서

“충청의 동학, 논산에서 함성을 토하다”

논산의 동학유적지 소토산과 황화산성 올라


① 충남지역 동학농민혁명 기인에 대한 서론

② 논산회맹(논산의 집결과 결전) 

③ 충청1 북부권- 천안상황(세성산 전투 중심으로)

④ 논산 황화산성, 절며 돌아가는 길

⑤ 논산 동학의 후손과 흔적 찾아(채운리, 손필규)

⑥ 충청2 공주 전투와 서부 내포권

⑦ 동학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나?

⑧ 논산 - 농민회의 남접북접 만나는 행사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이하·사업회)가 창립하기로 한 날짜는 6월 25일이었다. 그러나 코로나를 피해 잠정 연기중이다. 9월 13일에는 창립총회를 열기로 하였다. 그날 대외적인 창립기념식을 겸할지는 코로나가 변수이다.   

이러한 가운데 사업회는 지난 7월 12일, 논산동학농민혁명 현장답사를 하였다. 오후3시, 농민회에 모여서 특강을 들은 다음 소토산과 황화대를 돌아보았다. 이날 특강과 해설은 김대훈 쌘뽈여고 교사가 하였다. 주요 내용은 본지 2020-02-20일자 [논산정신과 동학] 논산 소토산전투와 황화대전투 참조(인터넷판 = nmn.ff.or.kr/17/?idx=3129242&bmode=view ). 

이날 특강에서는 일본군기록과 관측군기록 둘만 제시되었다.  “그밖의 자료는 없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당시 다른 기록들은 남아 있지 않아 찾기가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두 기록은 전사자 숫자에서 극명한 차이도 보인다. “일본군 기록은 20명, 관군기록은 300~1000명이다. ‘탄약소비=453발’이라는 일본군 기록에서보다시피, 일본기록에 믿음이 더 간다” 김교사의 평가다. 


L소토산으로 추정되는 대림아파트 뒷산에서

L동학농민군들이 울부짖으며 흩어지던 날, 세찬 비를 맞으며 황화산성 봉수대 올라


논산의 영광과 비참의 길을 걷다


사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추정(推定)이 이어졌다. ‘소토산’의 위치는 어디인가도 추정치였다. 

“소토산은 지금의 논산 대림아파트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 수만 명의 전국 농민군이 126년 전 논산에 왔다. 그리고 10여일의 해방구! 농민군들을 맞아들여 민본민주 시대의 새벽을 열도록 도운 것이 논산사람들이요 논산 땅이기에 우리는 이 역사를 자랑스럽다 하는 것이다.” 

우중에도 동행한 10여 명 중 하나인 윤여진 교사(논산여고)가 감회를 토한다. 

“출정의 북소리로 천지를 뒤흔들었을 논산평야의 그 진군식을 상상하면 가슴이 뛴다. 그러나 우금치 전투 패배로 쫒기고 쫒기며 노성산, 소토산을 거쳐 황화대에 이른 사연을 알면 참으로 슬프고도 분하다. 황화대는 등화동 뒷산이다. 말이 ‘황화대 전투’이지 관군과 일본군대에 의한 비정한 살육이었다. 어찌 논산 우리가 이 일을 없다 하랴.”

윤 교사는 계승사업회에서 자료연구분과장을 맡고 있다. 그는 황화대의 봉화대에서 우중강행군한 세 시간의 동학농민혁명 답사기를 “논산의 영광과 비참의 길을 걷다!”라는 제목으로 올렸다.  


[오후 3시] 한 시간 동안 답사지 소토산과 황화대 전투를 공부하고 쟁점을 확인했다. 쌘뽈여고 김대훈 교사(역사)의 발제에 이어 토론이 이어졌다. 남북접 동학농민군의 합류의 세는 어느 정도? 전국의 농민군을 받아들인 논산 상황은? 등등

[오후 4시] 비가 내렸다. 대림아파트 뒤 소토산에 오르려 했으나 진입로가 없어 관음사로 우회하여 접근했다. 일행 중 일부는 높은 담을 그대로 넘어서 관음사 뒤편 정상으로 직행하기도 했다. 아무런 흔적도 없는 이 소토산 언덕 일대의 오랜 침묵... 빗속에서도 등화동쪽 황화대(황화산성)가 선명하게 보인다. 

[오후 5시] 비가 거세졌다. 황화대에 오르기 위해 보명사 입구에 주차했다. 토성인 황화산성을 돌아 봉수대에 도착했다. 겨울에는 논산평야 사방이 다 내려다보였는데 여름엔 나무들에 막혀 보이질 않는다. 패퇴하던 농민군들이 쫒기고 쫒기며 죽음으로 맞섰던 비극의 황화대 여기, 전투의 자취도 없고 하늘빛은 처연하기만. 당당한 위령의 날이 오겠지!


이날 답사에는 논산시 한성환 미래발전사업단장이 동행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논산의 상황을 지방자치의 원형으로 보려는 논산시의 시각 일단도 엿보였다. 

이 사업회의 첫 번째 답사지는 연산관아였는데, “아들이 동학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붙들려 고초를 겪은 연산현감 이야기”가 동학소설 『은월이』에 실려 있다. 바로 그 연산 현감이 한단장의 선조여서 그 연(緣)도 있어서라고 한다. 


L 기록된 역사의 담을 넘어, 흔적을 찾는 행로


동학농민혁명과 3·1독립운동 연계작업


이런 얘기를 포함하여 9월 13일(일) 창립총회 개최와 동학농민군 지도자 묘소 참배를 결정하였다. 

은진면 남산리에 묻혀 있다는 분, 그는 부안이 낳은 천도교 성도사 용암(龍庵) 김낙철(金洛喆) 선생이다. 용암은 1917년 12월 22일 60세를 일기로 환원하였다. 당시 묘소는 서울 이태원이었으나 그 후 논산 은진면 남산리 산37-10로 옮겼다. 그의 묘소가 있는 남산리는 논산에서 3·1운동을 주도한 남산리 출신 손필규 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천도교 은진교구장였던 손필규가 3·1운동을 하게 된 뿌리는 무엇일까? 1870년 은진면 남산리에서 태어난 손필규가 1894년 동학혁명 때 나이는 25세였다. 혹시 이분은 동학혁명때 참여했던 분이 아닐까?

논산시는 작년 8월 29일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주관 ‘논산 동학농민혁명의 계승과 활용방안’을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세미나에서 논산에서 토론자로 나선 사람은 김무길 강경역사문화연구원 연구부장 하나뿐이었다. 김부장은 그날 여러 연구과제를 쏟아놓았다. 

“논산 소토산(대건고, 쌘뽈여고)에서는 진지를 구축하였다. 황화대에서는 11월15일에 전주로 후퇴했다. 농민군 철제 다배통은 백제군사 박물관이다. 6·25때 폭격 맞은 호암리는 박희동 장군과 연관성이 있다. 무기 제작한 고산..... 강경 채운2리에는 강태형, 강무형, 강백형 등 진주 강씨집 많았다. 현재는 강현중 한 사람 살고 있다. 이 동네에 사는 87세 장광표 씨의 증언이 기록되어야 한다. 채운동에서 동학군이 하루 묵고 갈 때, 앞송정(소나무 많은 곳)에 솥을 걸어놓고 밥해 먹었다는 이야기를 어르신들에게 들었다고 한다.” 

이런 동학관련 이야기를 쏟아내면서, “우리 논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3·1독립운동과도 연관성을 갖고 밝혀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토론을 마쳤다. 

논산지역에서 동학의 사료는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기에 증언을 통한 구전기록과 거기에 근거한 추적, 추론 작업이 절실해진다. 그래서 본지가 처음 계획했던 충남전역의 동학은 그 범위를 대폭 축소시키고, 이제부터는 논산 동학에 좀더 집중하고자 한다. 동학과 정역(正易)은 공통분모가 많다. 동학하는 사람들이 정역을 완성한 김일부 선생을 찾아 향적산방을 찾은 적도 있다 한다. 본지는 동학 취재의 방향 전환과 호흡을 가다듬는 의미에서 김일부 선생의 연구자 김용수 님의 동학에 관한 대의를, 직접화법으로 들어본다. (https://nmn.ff.or.kr/17/?bmode=view&idx=4301942&back_url=&t=board&page= )


[기록·정리]  이진영 기자 

<이 기획기사는 2020년도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서 취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