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충남지역언론지원사업] 충청의 동학, 논산에서 함성을 토하다

놀뫼신문
2020-04-29

[2020충남지역언론지원사업-1] 동학농민혁명, 충남에서의 발자취를 따라서

충청의 동학, 논산에서 함성을 토하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왕조중심의 역사를 민중사로 바꾸어 쓰게 하는 변곡점이 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근대민중사는 1894년을 원년으로 삼고자 한다. 전북의 동학은 물론 충남의 동학농민혁명사도 전봉준의 봉기일을 원년으로 삼은 가운데 여러 연구업적이 쌓여져 왔다. 이런 과정에서 동학의 메카가 어디이고, 누구누가 동학농민운동의 견인차였는지 속속 밝혀지고 있다. 법적으로는 2018년 3월부터 동학농민명예회복법(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중이다. 충남도의회에서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추진을 위한 지원조례를 제정 발표했으며, 이에 따라 시군에서도 시군지원조례를 제정해 가는 추세이다.

그럼에도 전라도와 접해 있는 충남의 남부 지역 연구는 크게 나가지 못한 상황이다. 이에 본지는 4월부터 충남도의 2020 지역언론지원사업으로 <동학농민혁명, 충남에서의 발자취를 따라서> 간다. 8회 예정인 이 사업은 충남동학 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충남의 남부, 특히 논산을 중심으로 하여 충남의 동학과 농민혁명을 조명해 나가고자 한다. 

논산 위주의 접근이 지역이기주의로 비출 수도 있음에 우려 아니 되는 바 아니다. 지금까지 전북과 충남의 동학 연구가 다소간 그러한 한계를 드러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시쳇말로 팩트 체크가 첫 단추이다. 논산은 1894년보다 한 해 전인 1893년 노성민란(魯城民亂)이 일어났던 곳이다. 1894년에는 남접과 북접의 회맹장소가 된다. 어디로 모이자 결의할 때는 교통상황만 보는 게 아니다. 허용적인 분위기를  넘어서 넉넉히 품어줄 만한 땅이어야 최적지이다. 당시 논산은 그런 곳이었다. 

이렇듯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점유하는 위상과 비중이 큰 땅 논산이지만 그 동안 논산은 동학연구의 불모지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2년 전 논산농민회가 주변의 비아냥에 답하기라도 하듯 논산동학에 눈을 뜨면서 서서히 불을 지펴가는 형세다. 지난 4월 23일에는 논산동학농민혁명 계승사업회(대표 김선덕)가 비영리단체 등록을 하였다. 충청권 남부의 동학을 살펴보기에 앞서 동학연구지의 한복판인 논산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 날짜별로 일별해볼 필요가 있다.  


[2018-07-12] 

논산농민회의 농민역사학교

“동학농민혁명과 논산”을 주제로 특강이 이어졌는데, 이때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전주화약일과 논산결집일 등을 놓고 논의가 진행 중에 논산에서 나서는 이가 없으므로 지난 문화체육관광부 선정위원회에서 5월 11일 황토현전승일로 선정했음을 공식 발표했다. 

논산 지역은 2차로 봉기한 남접, 북접의 동학농민군이 총집결하여 회맹결의하고 규약을 정했던 곳이다. 4천명에서 출발한 전봉준의 군대가 논산에서는 4만 대군으로 불어났다. 이 기적 같은 일이 논산에서 가능했던 것은, 논산이 그만큼 동학에 대하여 주도적이었고, 당시 유회군이 득세하는 중에서도 동학도가 활달했던 지역이었음을 방증한다.  


[2019-08-29] 

논산시 주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논산동학세미나’

관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논산시는 작년도 8월 29일 논산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 ‘논산 동학농민혁명의 계승과 활용방안’을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논산시가 주최하고,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이 주관한 세미나는 논산 지역의 동학 농민혁명 집결지 및 전적지에 대한 위치와 당시 활동상황을 고증하고, 동학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람중심 정신을 되새겨 역사적 사건과 유·무형 유산의 활용방안을 모색하였다.

이 세미나에서는 논산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와 의의(충북대학교 신영우 명예교수), 논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활동(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병규 연구조사부장), 논산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성격과 기념사업의 방향(원광대학교 원도연 교수)을 주제로 발표를 진행했다. 이어 임형진 경희대학교 교수를 좌장으로 홍동현 독립기념관연구원, 이철성 건양대학교 교수, 김무길 강경역사문화연구원, 정을경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이 참여해 발표주제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2019-12-18] 

논산농민회 ‘논산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작년도 12월 18일, 논산시 농민회에 민예총 논산지부, 전농 논산시농민회 등 8단체가 모였다. “논산 근현대사로 ‘새세상’을 밝히다”는 기치 아래 <논산 동학농민혁명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강사로 나선 민중사 연구자 박성묵 소장은 논산동학에 세계사적 의미를 던져주었다. 논산동학이, 국내 국지전의 선봉장였던 전봉준에게 매몰되어 있다는 점을 꼬집고나왔다. 역사적 사실로 보더라도 논산동학과 노성민란은 전봉준 봉기보다 1년 앞서서 일어났다. 동학군의 상대는 동족인 조선인이 아니라 외세인 일본제국주의였다. 논산에 모인 동학군들은 관군이 아니라 일본군대와 싸우기 위하여 모여든 창의군이었다. 처음에 동학을 탄압하던 조정에서도 이제는 외세 몰아내줄 세력으로 논산동학을 기대하고 밀지까지 내려보내던 상황이었다. 시에서 주관했던 세미나보다 내실있는 특강이었다는 평가다. 


[2020년 1월 7일 ~ 2월 9일] 

‘논산동학농민혁명 계승사업 준비위원회’ 구성과 첫 답사

이러한 노력들이 하나씩 결실을 맺으면서 지난 1월 7일 ‘논산동학농민혁명 계승사업 준비위원회’가 논산농민회에서 열렸다. 조직구성으로는 준비위원회 산하에 3개의 분과를 두기로 하였다. 연구조사, 현장답사, 기념사업 분과이다. 준비위원장에는 김선덕 전 농민회정책실장이 맡았다. 산하 분과위원장으로 연구조사위원장는 윤여진, 현장답사위원장에 변해숙, 기념사업분과위원장에 배형택 농민회정책실장이 맡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논산동학농민혁명 계승사업회가 동학유적 첫 번째 답사지로 택한 곳은 연산의 관아터와 황산성였다. 답사팀은 2월 9일 오후 3시에 연산관아터에서 만났다. 아들이 동학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붙들려 고초를 겪은 연산현감 이야기가 동학소설 ‘은월이’에 나온다. 연산전투 장면에 이르기까지 각자 알고 있는 당시 얘기를 주고받으며 황산성으로 향했다. 하산한 다음에는 만복이네 집에 내려와서는 윤여진 연구조사위원장 중심으로  각자 알고 있는 동학 관련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동학 스터디를 하였다.  


[2020-02-13]

코로나 사태 이후 향후 과제 논의

2월 13일에는 논산시농민회에서 동학연구가인 ‘은월이’ 작가 한준혜 씨의 남편인 정선원 교사 초청특강을 가졌다. 코로나 정국에도 논산의 정신 일단을 동학에서 찾기 위한 노력들이 간단 없이 이어져 가는 가운데 4월 23일에는 논산동학농민혁명 계승사업회가 국세청에 비영리단체 등록을 마쳤다. 이제는 논산시 동학 조례 등 외적 정비는 물론 크고 작은 학술세미나와 현장답사, 증인채록 등 내실화 작업에 본격 돌입하려는 출발점이다. 그리하여 올해 하이라이트는 동학혁명군인 남접과 북접이 만났던 날(음 10월 12일=양 11월 9일)로 잡고 있다. 이 날을 기념하여 논산동학혁명 기념일이나 기념 주간을 선포하고, 동학혁명 추모제, 진군식도 개최할 것을 검토하고 준비중이다. 

126년 세월 전 1894년 당시, 논산과 이 주변 일대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이러한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당시의 주변 정세, 조선은 물론 세계사까지 알아야 한다. 향후 본지는 진행 도중 일부 수정은 있겠지만, 아래와 같은 얼개로 충남의 동학 연구와 답사를 진행해 나가고자 한다. 



[충청의 동학, 논산에서 함성을 토하다]

① 충남지역 동학농민혁명 기인에 대한 서론

② 논산회맹(논산의 집결과 결전)

③ 충청1 북부권- 천안상황(세성산 전투 중심으로)

④ 충청2 공주 전투(이인, 우금치와 세종 첫마을 벌-대교리

⑤ 충청3 서부 내포권(당진-승전목/ 예산-관작리, 내포 등)

⑥ 논산 황화산성, 절며 돌아가는 길(금구로, 대둔산으로)

⑦ 동학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나?(“싸우러 갔다가 왜 팔목을 놓고 오셨소”)

⑧ 논산 - 농민회의 남접북접 만나는 행사


황화대 지도

 동학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논산 황화산성


이 작업에 지역별 동학연구단체나 연구자들이 동참하여 논산의 동학 운동을 응원하게 될 것이다. 문헌 연구 못지않게 봉기의 현장성을 중시하여 향토사연구자들의 증언과 성과물은 최대치로 담아내고자 한다. 이번에는 30여 년간 동학을 연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현장을 찾아다니는 이상호 충남향토사학자(사진)가 들려주는 당시 시대적 배경을 경청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황화산성 답사중인 이상호 충남향토사학자 


충남지역 동학농민혁명, 왜 일어났는가?

동학농민혁명의 기인은 삼정의 문란과 동학군의 폐정개혁요구조항

수령‧아전의 탐욕과 수탈


충청지역농민군의 봉기의 요인은 19세기말 당시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대내‧대외 두 측면에서 볼 때 보통 대내적인 요인을 중시하지만, 실은 대외적 착취에 방점을 두어야 하는 상황이다. 강화도조약 이후에 일본상인의 침투는 농민들로 하여금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나아가 농민군들이 축멸왜이(逐滅倭夷)를 표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내적 요인에 방점을 두기로 한다. 이야기 바탕을 다음 세 가지 측면의 반성에 두고서 농민전쟁의 의의를 조명해 가도록 한다.


1) 삼정의 문란 = 개항 이후 청‧일 양국의 세력침투에 맞서 전통 산업구조의 변화 속에 동학군의 폐정개혁요구조항을 살펴보고 일제가 값없이 거두어간 일에 대한 경고와 현재적 의미의 반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사회가 지녀온 사회적 모순과 배경을 극복하려는 게 폐정개혁요구조항이었다. 이를  통해 무력봉기에 다다르게 된 원인을 규명해 봐야 한다. 단언컨대, 동학농민혁명은 삼정의 문란에서 기인한다. 

 

2) ‘패배주의 오염’에 대한 분노 = 당시 외세는 정권기반의 취약성이 초래한 것인데, 그 외세에 의거한 ‘패배주의 오염’에 대한 분노이다. 유교적 왕도정치가 세력균형을 잃고 하나의 노론파당에 의해 농단되는 상황이었다. 강화도 조약의 체결에서 드러나듯, 조계설정, 해안측량의 자유허용, 최혜국조항 등 불평등조약이 체결되었지만 거기에 대한 침통함이 결여되었다. 청‧일 제국의 음모와 관여 앞에서 정권의 위약성만 내보이고 말았다. 

게다가 관료기강 해이가 심해져서 조선중기 이후 과거제는 문란해져갔다. 매년 양반층의 수효가 상승곡선을 그었지만, 도포와 유건을 쓴 사대부들이 실사구시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 봉건 사회 혁신의 당면과제는 전세(田稅), 군정(軍政), 환곡(還穀; 고리대 등) 세 가지였다.

수령‧아전의 탐욕과 수탈은 도를 넘었다. 경복궁 중건을 위한 원납전의 피해와 수한재를 당하였을 때 지방재정으로 쓰는 공명첩(空名帖)이 사찰의 중건으로 쓰였다. 감영에서 주관한 공명첩의 피해는 우리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공주 신원사‧동화사 중건에 각각 500장의 공명첩이 발급되어 실직(實職)이 아닌 관작(官爵)의 수여를 불러왔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민중들이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살펴보고 헤아려 볼 일이다. 


3) 봉건적 신분 규제의 혁파에 대한 조정의 미온적 대처 = 대원군의 전단정치는 외척세력의 기형적인 정권농단에서 대한 배제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왕권 복구의 연장선상에서 합의기관인 비변사를 폐지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신분제 개혁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한국의 전통사회가 지녀온 여러 사회적 모순이 19세기 말에 양반관료사회의 부패와 결부되어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농민 봉기의 주요 계기가 되었던 이 문제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1893년 노성민란


이런 시대적 배경을 미리 알아두어야 논산에서의 동학농민군 봉기가 무엇에 중점을 두었는지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래야만 지역 내의 전반적인 동학농민운동 의의를 찾아서 알릴 수 있으며, 논산 지역의 농민군이 타 지역과 어떤 점에서 특징지워지는지 확실해질 것이다. 

전국적 민중의 동요와 관련된 민란의 재연에 ‘노성민란’에 구체적 증거가 있다. 노성민란은 1893년 노성현감의 탐학 행위에 반발하여 충청남도 논산 지역 농민들이 일으킨 봉기이다. 노성민란은 전운소에서 운송하다 남은 미곡 400석 중 200석을 전 노성현감이 착복한 게 발단이 되었다. 1893년에 부임한 신임 현감 황후연(黃厚淵)이 농민들에게 이 200석을 대신 물게 하였다. 그러자 농민들은 장두(狀頭) 유치복(兪致福)  중심으로 여러 차례 민회를 개최하였고, 이의 시정을 위해 정소(呈訴)를 올렸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봉기하여 관아를 점령하고 황후연을 쫓아냈다. 민란의 주모자들은 유치복을 비롯한 윤상건(尹相健)·윤성칠(尹成七) 등으로, 노성 지역의 파평 윤씨도 상당수 참여하여 일어났다.

노성민란의 불꽃은 번져나갔다. 노성에 집결한 농민군이 경천‧계룡 쪽과 이인 쪽으로 진출하여 공주성을 공격하였다. 불행히 실패하여 전주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 봉기에 내재된 실상을 살펴보면 기선(汽船)에 의한 공미전운(貢米轉運), 미곡의 값이 오를 것을 예상하여 폭리를 얻고자 매점(買占) 유출하는 행태에 관이 개입하였고, 이를 알게 된 농민들이 분노한 사건이다.

충청감사는 민란을 조사한 뒤 주모자들을 처벌하고자 했지만, 주모자들이 모두 피신하여 화를 면하였다. 다만 백화서(白化西)만 주모자에 동조했다는 죄로 그에게는 원악도 유배라는 중형에 처해졌다. 민란을 야기한 노성현감 황후연은 의금부에 투옥하여 관직이 박탈되는 처벌을 받았다. 충청감사는 주모자 외에도 노성 지역 향촌사회의 주도 세력인 좌수 양주흥(梁柱興)을 비롯하여 이방 이석민 등을 처벌하였다.

노성민란은 다음해 갑오농민혁명의 발판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들 중 동학도가 대부분이고, 유림과 관에서도 협조하는 척왜척화로 애국사상이 고취된 단초를 마련해준  사건이다. 그러므로 ‘노성민란’이 아니라 ‘노성농민혁명사건’ 으로 기록해야 마땅하다. 


1932년 ‘양촌리 농민운동’


일반적으로 농민운동은 노동운동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가 된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농민이 스스로의 노동 조건과 경영 조건의 유지·개선·확장 또는 사회·정치적 생활 조건의 유지·향상을 위해 단결하여 행동하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말한다.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은 역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서 독립운동으로 발전되는데, 그 한 사례가 일제강점기때 활발하게 전개된 ‘양촌리 농민운동’이다.

양촌 머슴계는 1894년에도 동학봉기가 드세던 양촌면에서 설립되었다. 이를 1932년 5월경 경찰이 불허하자 70여 명의 양촌면 농민들이 시위를 감행하여 출동한 경찰과 투쟁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양촌면 지역에서는 머슴을 잃고 폐농 지경에 이른 지주가가 많아졌다. 모두 19명이 검사국에 송치되어 권영민과 이지용을 포함한 총 10명이 치안유지법 위반과 공무집행방해죄가 적용되어 1933년 2월 28일 공판에 회부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처럼 동학농민운동은 거기에서 그친 게 아니라 역사의 물줄기에서 면연히 점철되어 왔다. 정선원 교사(계룡중)는 1894년 한국의 근대사 뿌리를 동학농민전쟁에서 찾았다. 즉, 동학농민혁명 → 의병전쟁 → 3·1운동 → 국내의 민중운동과 만주의 무장투쟁 → 8·15해방과 통일 투쟁 → 4·19혁명 → 5·18 민주화운동 → 6월 민주항쟁(1987년) → 박근혜탄핵촛불운동(2016년)으로 파악한 것이다. 최근 코로나로 인하여 생겨난 신조어 주 하나가 ‘동학개미운동’이다. 동학농민운동때 몰살된 민초들에 비유하여, 급락 정국에도 불구하고 매수하는 개미들을 비아냥 내지 가련하게 보는 시각에서 생겨난 말이라고 한다. 씁쓸함이 여운으로 남는다. 조정래는 그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 동학농민군 이야기를 진중하게 접맥하고 있다. 동학의 이미지를 어떤 식으로 펼쳐나갈지는, 이제 우리의 몫이요 방향성이다. 다음 이야기 <논산회맹(논산의 집결과 결전)>에서 동학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오늘을 사는 우리의 방향성을 잡아가보기로 한다. 


[글·사진]  이진영/성수용/전해주 기자 

[삽화·그래픽] 권하경


<이 기획기사는 2020년도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서 취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