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정보] ‘이호억展’ in 완주 연석산미술관

놀뫼신문
2021-08-06

|전시정보|

‘이호억展’  완주 연석산미술관에서 


이호억, 無盡昇天 130 x 600cm, Ink on Paper, 2020


논산이 낳은 한국화가 <이호억展>이 완주 연석산미술관에서 열린다. 7월 31일 테이프를 끊었으며, 8월 13일까지다. 

이호억 작가는 “제1회 광주화루 한국화 대상” 수상을 계기로 한국미술계의 지각변동을 예고하였다.(본지 2017-04-26일자 [특별인터뷰] 이호억 “예술은 기교가 아니라 생각의 가치체계” https://nmn.ff.or.kr/23/?idx=514377&bmode=view 상보)

그 후 그가 작품활동에만 전력할 수 있도록 장소 등을 지원해주는 레지던시는 세 군데였다. 2018 우도 창작스튜디오, 2020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2021 <연석산미술관 레지던스>이다.  이호억은 연석산미술관의 4기 입주작가이며, 미술관은 완주군 동상면 동상로 1118-22에 있다(063-247-2837). 비대면 감상은 연석산미술관 홈페이지 www.ysma.kr 초기화면에서도 가능하다. 

중앙대학교 한국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중앙대 박사과정에서 예술학을 전공한 그는 지금까지 43회의 단체전, 10회의 개인전을 했다. 이 중 논산에서의  개인전, 단체전은 한 번씩이다. 2019 <논산청년작가초대전>(논산문화원, 단체전)과 2021 <(VIRTUAL)날것들의 합주>(어린왕자 문학관, 개인전; https://nmn.ff.or.kr/17/?idx=6082037&bmode=view)이 그것이다. 

아래는 미술사학자 주수완 교수가 평론한 <수행하는 화가 이호억 : 그 은일과 폭발의 의미> 전문이다. 


- 이진영 기자






수행하는 화가 이호억 : 그 은일과 폭발의 의미

 


역설적이게도 우주는 빅뱅이라는 폭발과 함께 시작되었다. 폭발은 무엇인가를 부수는 파괴의 단어 같지만, 그것은 또한 거대한 시작이기도 했다. 이호억 작가의 그림에서는 이러한 폭발의 이미지가 많이 발견된다. 이 시대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가 새롭게 꿈꾸는 세상의 초석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는 종종 ‘극단의 고립’으로 스스로를 몰아갔다고 한다. 소통을 이상으로 하는 미술에 있어 작가들은 이렇게 반대로 고립과 단절을 표방한다. 이호억 작가가 표현한 폭발과 고립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우선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가 고립을 추구한 것은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나아가 주체적, 적극적 고립은 은일이며, 출가이며, 또한 면벽수행이다. 이러한 행위는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속세를 버렸다’고 할 때처럼 역설적이다. 작가가 그토록 자기 자신을 추구했던 것은 세상에 흡수되면 될수록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의 기준으로 보자면 성공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고, 다른 이의 요구에 맞춰야 한다. 그러다 보면 원하는 바는 성취될 수 있어도 궁극에는 무엇 때문에 자신을 버렸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강하게 붙잡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세상과 거리를 둔다. 그리고 온전한 주체로서의 자신으로 존재할 때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의미있는 소통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소통은 단지 SNS에서 이루어지는 가벼운 소통과는 다른 것이다.


▲ 이호억, 無盡昇天 (140 x 60cm) + (140 x 60cm) + (140 x 70cm) Ink on Paper, 2020


▲ 이호억, 無盡昇天_9/11 (145 x 80cm) + (145 x 80cm), Ink on Paper, 2020 


▲ 이호억, 無盡昇天 140 x 240cm, Ink on Paper, 2020


▲ 이호억, 이글이글_인천낙조 150 x 400cm, Ink on Paper, 2020


이렇게 자신을 찾은 작가는 세상을 변화시킨다. 석가모니도 고독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후에는 논쟁으로 수많은 브라만 사상가들을 격파했고, 예수도 성전의 장사치들을 뒤엎었다. 지난 2019년 갤러리 에무의 전시에서 만난 이호억 작가의 작품들이 은둔과 은일의 결과였다면, 이번 작품들은 그 이후, 폭발로서 세상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바람의 뼈> 연작은 그가 제주도에 은둔하며 직접 사생한 우도의 풍광이다. 섬을 둘러싼 바다는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바다를 닮아 파도치는 것처럼 섬 자체가 꿈틀거리고 있다. 그는 고립을 통해 자연과 대화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닐까? 석가모니도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하기 전에 사슴 두 마리에게 먼저 시험 삼아 설법을 하셨다는데, 이렇게 자연과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 어찌 사람과 소통하지 못할 것인가? 그것이 바로 고립이 소통으로 이어지는 과정일 것이다. 꿈틀거리는 섬은 마치 누워 있는 용이 몸을 추슬러 승천하려는 것처럼도 보인다. 섬의 이야기를 작가가 들은 것이다.

이렇게 승천한 용은 폭발하는 구름이 되었다. 이호억 작가는 낫이나 괭이를 든 농민혁명군은 아니지만, 대신 붓을 든 예술혁명가이다. 뛰어난 예술은 흔히 파격이라고 칭송받는데, 그는 조금 더 진실한 파격으로 나아가고 있다. ‘파격’은 말 그대로 ‘틀을 부순다’는 뜻이다. 그의 폭발이 왜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인지를 설명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동양화의 평범한 사군자 그림 같은 그의 <무진승천> 속 소나무, 대나무들은 언뜻 파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마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만화적 이미지가 연상되는 폭발의 모티프들이 뜬금없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그 ‘뜬금없음’은 작가의 예술가적 감각으로 이질감 없이 매우 자연스럽게 전통의 한 부분인 것처럼 녹아들어가 있다. 모란꽃 같기도 하고, 석류 같기도 한 형태가 온전한 전통적 소재 속에서 급작스레 폭발의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억눌린 무엇인가를 이렇게나마 분출하지 않고서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경험이자 충고처럼 묵시적으로 혹은 해학적으로 다가온다. 그가 심각한 폭발의 이미지를 이렇게 다소 만화적 이미지처럼 사용한 것도 그것이 단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폭발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해소하고 분출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내버려야 하는 감정의 찌꺼기들에 대한 마지막 헌사처럼 다가온다.

이러한 폭발의 이미지보다 한 단계 온건한 분출은 구름의 이미지다. 그의 <울먹울먹>, <이글이글>은 마치 화산과도 같은 폭발의 이미지를 품고 있지만, 이후의 폭발은 비가 될 것이고, 그 비는 지상에 살고 있는 생물들에겐 생명의 원천이 될 것이다. 먹구름으로 어두워지는 하늘을 두려워하면서도 시원한 빗줄기를 내심 기다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불안과 희망을 저 구름들이 품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작가는 <무진승천> 연작에서 이렇게 파괴된 형상에 과감한 복구를 감행한다. 분절된 파편들을 이어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조합이 특이하다. 소나무와 대나무를 이어붙이고, 또는 나무뿌리와 대나무가 접붙혀 있다. 언뜻 이러한 접합은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괴물을 연상할 수도 있다.


▲ 이호억, 바람의 뼈 I 70 x 140cm, Ink on Paper, 2019

▲ 이호억, 바람의 뼈 II 70 x 140cm, Ink on Paper, 2019

▲ 이호억, 바람의 뼈 III 70 x 140cm, Ink on Paper, 2019

 ▲ 이호억, 울먹울먹_우도장마 70 x 140cm, Ink on Paper, 2019


그러나 그의 작품은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실크로드 미술의 권위자인 권영필 교수는 한국미술, 나아가 실크로드 미술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로서 ‘이형접합(異形接合)’을 꼽았다. 이는 서로 다른 동물을 이어 붙이거나, 혹은 그릇의 형상에 뜬금없이 동물의 형상이 붙어있는 조형성을 말하는 것인데 결국 이것은 상상력의 조합이며, 예술적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호억 작가의 이러한 짜깁기한 식물의 형상은 파격을 통해 새로움을 처절히 추구하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인 셈이다.

전시장에 걸린 그의 대형의 작품들 사이를 거닐고 있다 보면 마치 원시림에, 바다에 나와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의 철학에 따라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그 생생함이 그림 속에 배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현장감은 그를 고행하는 수행자로 만들었다. 그의 그림은 묘하게 파괴적이며, 묘하게 생명적이다. 어쩌면 힌두교의 시바신을 닮았다. 그 틈 사이에서 우리의 아픔을 읽고, 우리의 감정적 해소를 읽는다면, 우리는 이미 이호억 작가와 소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주수완(우석대학교 조교수, 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