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정신과 동학] 논산 소토산전투와 황화대전투

놀뫼신문
2020-02-20

[논산정신과 동학]

논산 소토산전투와 황화대전투


1894년 이후 12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지만 올해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준)가 그 동안 묻혀져 있던 ‘논산동학’의 정신을 찾아나섰다. 2월 9일 동학유적 첫 번째 답사지로 택한 곳이 연산의 관아터와 황산성였다. 13일에는 동학소설인 ‘은월이’ 작가 한박준혜 씨 남편인 정선원 교사(계룡중)를 초청하였다. 이어서 김대훈 교사(쌘뽈여고)가 강의를 이어갔다. 출범식 준비를 위한 다음 모임은 3월 12일 7시이다. 


정선원의 '공주논산 전투사'


정선원 교사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논산 일대의 전투기를 일자별로 보여주었다. 한국의 근대사의 뿌리를 동학농민전쟁에서 찾았다. 즉, 동학농민혁명 → 의병전쟁 → 3.1운동 → 국내의 민중운동과 만주의 무장투쟁 → 8.15해방과 통일 투쟁 → 4.19혁명 → 5.18 민주화운동 → 6월 민주항쟁(1987년) → 박근혜탄핵촛불운동(2016년)으로 파악한 것이다. 

논산은 남북접연합 농민군이 집결한 곳이다. 동학농민군은 논산에서 남북접연합 농민군이 집결해서 공주(당시 충청남북도 도청인 충청감영이 있던 곳)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해서 일본을 몰아내고, 탐관오리를 몰아내려 했다. 논산에서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모두 세 부대였다(전봉준 부대, 이유상 부대, 손병희 부대)

공주전투는 10월 23일부터 11월 11일까지 18일간(이인전투~효포전투~우금티전투) 벌어진 다. 공주를 점령하고자 했던 효포전투와 우금티전투는 실패하고 남쪽으로 퇴각한다. 11월에 벌어진 논산 황화대 전투(15일), 원평전투(25일), 태인전투(27일)에서도 연이어 패배하며 전봉준은 농민군 해산 결정을 내린다. 12월 달에 전라도 강진·해남·장흥에서는 수만 명이 참가하는 전투가 벌어졌고, 보은 북실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황해도에서는 다음해 3월까지 동학농민군이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상 1984년의 전황을 정리한 정선원 교사는 본인이 지금까지 정리해온 자료도 파일채로 공유하였다. “11월 29일 김명환부대의 농민군 진압”에서부터 “일본공사관기록 1-연산전투상보-1권” 등 총 12개의 귀중한 자료이다. 


김대훈의 '황화대 전투'


이어서 강의를 진행한 김대훈(쌘뽈여고) 교사도 파일을 공유했다. 6쪽에 달하는 “1984.11.15.-논산 황화대 전투-논산”은 이날 특강 때 미처 풀지 못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김대훈 교사는 지도를 중심으로 진군로, 퇴각로를 풀어나갔다. 소토산은 어디인가? 모리오가이찌(森尾雅一)가 기록한 「論山 戰鬪詳報」에 의하면, 소토산에서부터 서남쪽으로 1,200m떨어진 곳에 황화대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 내용을 근거로 하여서 황화대에서 1200m 떨어진 곳, 즉 현재 대림아파트에서부터 부창동 성당에 이르는 언덕을 소토산으로 추정하였다. 

이날 김대훈 교사가 집중한 전투는 논산 소토산, 황화대 전투(음 11월 15일/양 12월 11일)이다. 농민군의 수는 집결 인원만으로도 1만 여명에 달했으며, 대기중이던 인근의 병력을 합하면 족히 2만에서 3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1차 봉기와는 명백히 구별되는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척왜’였다. 


관군과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압박해 왔고 농민군은 다급했다. 방어태세를 채 갖추기 전에 섬멸하려는 연합군의 공격은 효과적이었다. 결국 농민군은 또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의 노력으로 신속하게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갔지만 피해는 컸다. 이 황화대 전투에서 인적 피해는 물론이거니와 목인(木印)과 심지어 대장기까지 빼앗겼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패전을 거듭하며 전주를 거쳐 태인으로 퇴각하였다. 1894년은 뜨거운 한해였다. 진정 농민들이 원했던 세상을 꿈꾸며 전국을 뜨겁게 달궜지만 순식간에 무참히 짓밟혔다. 


-이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