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석의 독립운동가 4명의 활약상

놀뫼신문
2019-11-20


2005년 간행된 “논산시지”에 의하면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은 논산출신 독립 운동가는 29명이었다. 14년이 흐른 2019년 6월말 현재 69명으로 무려 40명이 증가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이는 국가보훈 행정의 활성화가 가져온 결과가 아닌가 한다. 즉 독립운동가 후손이나, 관련단체 및 관련인사가 적극적으로 조사 발굴하여 서훈 신청을 했고, 이에 독립운동가 숫자가 대폭 증가한 것이라 본다.

논산시에서는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아주 바람직한 일이란 생각이다. 후손의 부재로, 아니면 무관심과 자료의 미비로 인해 독립운동을 하고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지자체가 앞장서 해결해 준다는 건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이 결실을 맺어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 숫자가 늘어난 게 아닌가 한다. 

이에 본고에서는 논산시 독립운동가 69명을 읍․면별로 분류해 활동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활동 내용은 국가보훈처 공훈록의 내용이 주가 되겠다. 공적심사위원회의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쳐 국가가 인정한 내용이기에 이보다 더 정확한 내용을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마을이나 가문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부풀려지기 때문에 공정성이나 객관성에서 의문이 가는 부분도 있다는 걸 감안해서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 많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의 공적을 발굴해 햇빛을 보게 하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란 생각이다. 본 논문이 지하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지상으로 이끄는 작업에 촉매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염상오


1919년 3월 12일 오후 3시반경 강경시민과 학생 100여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논산읍내로 행진하자, 논산읍민이 합세하여 1,000여명의 시위대열이 이루어져 그는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 경찰의 야만적인 발포로 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7~8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때 그도 체포되었으며,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항월리 초포에 있는 염상오 묘비(廉公象五之碑; 碑字-국립묘지로 이장 후 墓자를 碑로 바꿈)


애국지사 염상오는 1891년 논산군 광석면 항월리 초포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남달랐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졌다. 청년에 이르자 한말의 국난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구국운동에 나섰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국권을 잃게 되자 통곡하면서 임금이 계신 서울을 향하여 절을 하고 단식을 하였다. 염지사는 궁내부 주사의 관직에 있을 때 한일 합방이 되자 구국 일념으로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후진을 교육시켰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염지사도 동지들과 태극기를 손수 만들어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3월 12일 논산 읍내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때 시위하는 군중이 자꾸 합세하여 시위군중이 무려 천여 명에 달했다. 다급해진 일경과 일본 헌병들은 무력을 써서 지압하기 시작하자 시위 군중은 흐트러지고 혼란 속에 빠졌다. 이 때 염공은 왜 헌병이 쏜 총탄에 맞아 부상을 당하여 왜경에게 체포되고 강경경찰서로 이송되어 모진 고문으로 사지가 절골되었다. 그래도 불굴의 정신으로 버티자 사경이 된 염공을 내쳐버렸다. 집으로 기어서 돌아오다가 도중에서 돌아가니, 그 때 공의 나이가 불과 28세였다. 

항월리 초포 뒷산에 장사하였다가 그 후에 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정부에서 1968년 대통령 표창을 내렸고 1980년 그의 묘소에 공적비를 논산군민이 세웠으나 국립묘지로 이장 돠자 마을 도로변으로 이건하고 묘자를 비자로 다시 새겨서 세워 놓았다. 1970년에도 마을 사람들이 염공의 공적비를 만들어 마을 어귀에 세워 놓았다. 다시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용진


1919년 4월 4일 광석면(光石面)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그는 약 200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하다가, 천동리(泉洞里) 부근에서 야만적인 일본 헌병의 발포로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윤상기(尹相起)


1920년 1월 충남에서 비밀조직인 대한건국단(大韓建國團)을 만들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윤상기는 백남식(白南式)·임종귀(任鍾龜)·윤태병(尹太炳) 등과 함께 대한건국단을 만들고 전국을 활동무대로 삼아 독립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시키는 한편, 이와 같은 인쇄물을 가지고 부호들을 찾아가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1920년 1월경, 그는 백남식·임종귀 등과 함께 모의하여, 공주군 우성면 봉현리의 부호 박영태(朴榮台)를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하여 50원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3월경에는 전북 금산군 금산면 하류리 부호 송석기로부터 현금 360원을 모집하고 건국단 군자금으로 10,000원을 내겠다는 계약서를 받아냈다. 이렇듯 그는 동지들과 함께 전국을 무대로 군자금 활동을 전대하던 중, 일경에 발각되어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20년 5월 3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죄로 징역 1년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이해 7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동빈


1922년 3월 전북 정읍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7월 전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동맹휴교에 가담하여 퇴학을 당했다. 

1926년 4월 서울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여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며 이에 크게 공감하고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29년 4월부터 조동빈은 제동(濟洞)에서 삼평사(三平社) 기자가 되어 잡지 『평론(平論)』의 발행에 관계하였다. 

1930년 1월, 간도공산당사건 출옥자의 위로회에 참가하였다가 동대문경찰서에 검거되어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 관련자로 취조를 받고 구류 25일을 받았다. 

그 후 조동빈은 전주읍 완산금융조합의 서기로 재직 중 전주읍 사무소 서기 최경득(崔庚得), 전주 공화자동차부 사무원 조희문(趙熙文) 등에게 1932년 4월 중순경부터 9월경까지 수십 회에 걸쳐 현 사회제도는 불합리하므로 변혁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확고한 이론을 파악해야 된다며 독서 지도를 했다.

일제는 1933년 4월부터 이리경찰서를 중심으로 서울과 경북 밀양 등지에서 조선공산당 관련자들의 대대적인 검거를 실시하였는데, 조동빈은 이때 체포되었다. 

1934년 3월 19일 조동빈은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으나 이에 불복하고 공소를 제기하였다. 

1934년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도 앞서의 판결을 그대로 내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4개 읍면동 소개를 기약하며


이상은 15개 읍면동 중에서 광석면만 소개한 것이다(나머지 자료는 논산향토문화연구회 “논산과 3,1절 14집-합본” 참조). 지금 우리 사회는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다. 어찌 보면 국가의 존망과 관련이 있다고도 할 북한의 비핵화 문제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일본은 우리나라를 경제적으로 압박해 오고 있다. 거기에 중국과 러시아 전투기가 우리 영공을 침입해 오는 사상 초유의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올바른 선택과, 국민 모두의 단합된 의지의 결집이 중요하다고 본다. 바로 나라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정신을 되살려, 어려움 극복에 최선을 다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예순아홉 분, 우리 논산 출신 독립 운동가들은 오로지 구국의 일념 하나만으로 가족도 버리고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 덕분에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의 정신을 바로 알고 바로 새겨 소중한 자산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본고에서 각 읍․면 별로 독립운동가를 나누어 설명한 것은,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지역화 자료로 편리하게 사용토록 하는 배려 차원에서다. 현재 각 초등학교 어린이들은 ‘향토충절인’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있고, 또 향토탐구 활동도 꾸준히 실시하고 있다. 

“향토 사랑이 나라사랑이다”는 말이 있듯,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나라도 사랑하지 못한다는 뜻이 되겠다. 사랑하는 마음은 알아야 생긴다. 알려면 찾아가 살펴보아야 한다. 그게 바로 ‘향토탐구 활동’인 것이다. 

본 자료가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향토충절인 교육에 유용하게 활용되길 희망한다. 지금까지는 향토충절인하면, 충남에서도 국가적인 인물, 즉 윤봉길, 유관순, 김좌진 등이 주였다. 이제부터는 범위를 좁혀 우리고장 논산 독립운동가들의 자랑스러운 활동 내용을 교육 자료로 만들어 활용한다면, 향토 사랑의 마음이 더 커지지 않을까 한다.


[글] 윤흥식(논산향토문화연구회  총무)

[비문사진과 후속글] 조중헌(논산향토문화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