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부활 꿈꾸는 옥녀봉예술촌의 낭독공연] ‘별들의 고향’ 그리고 ‘별들의 낭독’

2025-11-02

데뷔 71년 맞은 90세 고은정, 그 성성한 목소리

레전드 성우 6인, 강경의 가을밤 물들이다

낭독공연 , 다양한 예술의 결로 새로운 장르 제시 


지난 10월 24일 금요일, 논산 일대는 문화의 물결이었다. 돈암서원의 인문학축제는 밤이 되자 고품격 음악제로 이어졌다. 강경 옥녀봉 아래 금강 둔치는 젓갈축제로 북적댔다. 밤이 되자 옥녀봉예술촌으로 마실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설의 성우 6인이 출연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경사람 중에는 옥녀봉예술촌을 모르는 사람도 좀 되는 듯하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장 관사’로 사용된 곳이라 해도 갸웃한다. 옥녀봉 초입 안내판이 서있는 골목길 따라 200m쯤 오르다 보면 나오는 예술촌! 좌회전하여 쑥 들어가 보면 감탄사가 절로다. 100년 넘은 건축물 때문이 아니라 마당바위를 90도 세워놓은 절벽과 그 앞으로 펼쳐진 천혜의 놀이마당에 경탄해서다. 

암벽 자체로 예술인 마당 한마당에 예인들이 가세하였다. 전설의 성우 여섯 명이 모이고, 지역 아티스트들도 합세하였다. 강경은 서편제 동편제의 뿌리인 중고제의 본산이다. 이번 무대의 하이라이트는, 낭독과 전통소리의 조화를 선보인 제5장 ‘고은정 스페셜’이다.


고은정 성우

중고제 소릿꾼 박성환


91세 고령의 고은정과 조응한 강경의 중고제 


고은정, 김종성, 배한성, 박기량, 서혜정, 김상현.... 이번에 총출동한 전설의 성우 6인 명단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인 고은정, 그녀는 누구인가? 올해 아흔을 맞은 고은정 씨는 1954년 KBS 1기 공채로 데뷔해 격동의 현대사 70년간 목소리 하나로 관통한 ‘살아 있는 전설’이다. 천여 편 방화더빙 중 하나가 ‘별들의 고향’이고, 2025현재 그녀는 ‘별들의 낭독’으로 강경 금강 적벽 무대에 선 것이다. 고은정 스페셜에서 그녀는 한국중고제판소리진흥원장인 소릿꾼 박성환과 함께 단가〈적벽부〉를 펼쳤다. 고은정이 먼저 한 소절 낭독하면 박성환이 받아서 소리하는 방식으로, 노익장의 낭랑 음성과 전통 소리의 긴장이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이 흘러갔다. 고은정 성우가 애송시로 낭송한 시는 권선옥 논산문화원장의 “비단강 흘러 이리로 오네”

여기서 잠시, 공주대 설양환 교수의 중간평을 듣고 가보자. “이번 무대는 낭독극, 시 낭송, 노래와의 협연 등으로 이전보다 훨씬 다채로운 장르의 결을 선보였다” “특히 성우, 소릿꾼이 한 무대에서 호흡하는 모습은 청각의 향연이자 지역문화의 새로운 실험이었다.” “바위를 스크린으로 활용한 무대 아이디어는 특허감인데, 젓갈문화로만 기억되던 강경이, 이 공연을 통해 예술의 도시로 새롭게 기억될 것으로 전망된다.”



박기량~배한성, ‘그 가을 연산에서’


고은정 스페셜에서 영화 〈별들의 고향〉 더빙을 재연할 때 보조를 맞춘 성우가 있다. 박기량이다. 성우로서의 기량을 아낌없이 발휘한 박기량은 누구인가? 성우는 얼굴보다 출연작을 알려주어야만 “아~”하는 반응들이다. VJ특공대, 생활의 달인에서 맹활약한 박기량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한 음색이어서 문학작품과 시 낭독에 특화된 거 같다. 그는 ‘가을을 부르는 시’에서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소환했다. 낭독 하면 시부터 떠올리는데, 이 공연 2장은 뜻밖에도 라이브 드라마였다. <그 가을 연산에서>는 1589년 기축년, 동인과 서인의 파벌 전쟁 이야기를 다룬 장편소설 『고변』을 재구성한 것이다. 특히 논산 지역의 이야기로만 꾸민 낭독드라마이다. 최학 원작인 이 낭독극에서는 고은정 빼고 5인의 성우가 열연하였다. 

공연 3장은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시간이었다. 여기서 박기량은 강경젓갈광고VJ, 특공대버전– Kiss and say goodbye 등 목소리 장기자랑으로, 방금 전 마이크에서 흘러나왔던 김종성&김상현의 강경젓갈 광고를 연호해주었다. 6장 ‘별들이 사랑한 詩’에서는 자기 애송시로 정호승의 “강변역에서”를 읊조렸다. “목소리와 공간이 서로를 비추는 순간, 우리 자신도 낭독의 일부가 된다”는 그의 소감처럼, 목소리 체화(體化) 현장이다. 

배한성은 지난 5월에서처럼 평범한 애송시를 들고 나왔다. 박목월의 “나그네”. 팔도나그네가 되어 강경을 찾은 전설의 6인 성우 중 인물 지명도가 단연 돋보이는 배한성의 대표작은 ‘맥가이버’다. 대중성을 구가하는 그는 ‘가을을 부르는 시’ 시간에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로 가을 분위기를 깔았다. 레트로에서 소환한 것은 ‘모차르트가 살리에르에게’

 


산소같은 여자 서혜정~카리스마 여걸 김상현


얼굴보다는 ‘남녀탐구생활’이나 ‘생로병사의 비밀’ 등 천의 목소리로 인지도 짱인 서혜정 성우의 선곡, 아니 선시(選詩)도 대중적이었다. 별들의 낭독 타이틀에 걸맞는 윤동주의 ‘별헤는 밤’에 이어 추억 멘트로는 “산소같은 여자-마몽드”를 소환하였다. 당시 신인이었던 이영애는 목소리 대역 서혜정과 함께 스타덤에 올랐다는 건 아는 사람만 아는 비하인드 스토리^

그녀가 ‘詩와 낭독과 노래’에서도 윤동주로 일관한 것은 ‘서시’가 시노래 가수 정친채의 대표곡이기도 해서다. 사전에 맞추어보는 예행 연습 없이도 호흡이 척척 맞았다. 이어진 시노래는 ‘대추한알’였는데 논산출신 장석주 시인의 대표작이다. 그의 시가 바위에 한알 한알 새겨져 있는 대추축제장 연산은, 서혜정도 열연한 라이브드라마 “그 가을 연산에서”에뿐 아니라 동학농민혁명 때에도, 이문열 작품 등등에도 등장하는 연세(延世) 연이은 역사의 현장이다. 

김상현은 남자 이름 같다. 강렬한 카리스마도 있어설까.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 윤도현의 러브레터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녀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럽지만 강렬하다. 무대에 오르면서 ‘가을노래’로 선을 보인 그녀는 ‘금성 하이테크 칼라텔레비젼’을 소환해 주었다. 애송시로는 신경림의 ‘낙타’를 띄웠다. 


카리스마 넘치는 성우 김상현 


‘격동 50년’ 김종성과 150여 강경젓갈집


‘격동 50년’으로 우렁찬 김종성 역시 이름만으로는 가늠이 잘 안 된다. 깊이 울리는 그의 중후한 목소리는 다큐멘터리와 찰떡 궁합. 곽재구의 ‘파란 가을의 시’로 가을 문을 열어제친 그는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로 충청도 어느 소읍의 늦가을에 깊이를 더했다. 추억시간에 MBC9시 시보를 재현한 그는 김상현과 함께 강경젓갈광고로써 강경산 아래 150여 젓갈가게를 응원하였다.    

옥녀봉예술촌 무대는 조수연이라는 한 개인이 꾸려가고 있다. 수년차 줄기차게 끌고가다 보니 이제는 응원해주는 손길도 늘어났다. 이번 공연은 논산문화원, 강경역사문화연구원, 서혜정낭독연구소, 소울미디어, 강경성당, 강경나누리로타리클럽, 명성기획, 경희한의원이 음양으로 힘을 보탰다. 한국생활연극협회, 극단 젓갈창고, 종가집젓갈집도 신경을 써주었는데, 이들 덕에 명맥을 이어가는 “낭독공연”은 강경에서 발원하는 생활문화의 신기원 같다. 

이번 무대는 지난 5월 초연 이후 두 번째로 선보인 공연으로, 지역 예술의 내밀한 정서와 예술적 깊이를 확장하려는 시도의 결실로 보인다. 문학과 낭독, 그리고 음악과 전통소리가 교차한 무대는 소도시의 시간과 감성을 시적으로 재현하며 ‘말의 예술’이 가지는 감동의 폭을 확장시켰다는 반응이다. 

현장을 찾은 200여 관객 중 하나는 “이 공연은 말이 아니라 ‘빛과 호흡의 예술’이었다”며 종합예술이라고 규정하였다. 지역 예술인은 “별들의 낭독은 강경의 문화 정체성을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라며 “도시의 밤이 오랜 만에 숨을 쉬는 거 같다”며 사의를 표하였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예술인, 마이웨이는....


조수연 옥녀봉예술촌 대표의 말도 직접화법으로 들어본다. “강경읍은 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지만, 숨겨진 이야기와 문화적 자양분을 하나씩 찾아내다보면 여전히 심장을 뛰게 한다”  “별들의 낭독은 서울 부산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공연을 이곳 강경에서 만들고 싶다는 열망 끝에 탄생한 공연이다.”  “지방의 문화는 소멸의 끝이 아니라 다시 살아날 씨앗이다.” 이렇게 열거하면서, 공연의 의미로 “지역공동체 회복으로 확장시키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종성 성우는 지난 10월 12일 강경본당에서 열린 성가극 <1845 라파엘> 공연에서도 열연하였는데, 이 성가극 연출가 역시 조수연이다. 



강의 경치가 유독 빼어나서 붙여진 이름 강경(江景). 강경산 중턱에 있는 소금문학관은 금강을 완상할 수 있다. 그 건너편 옥녀봉예술촌은 사람 사는 동네가 더 잘 보인다. 조선의 3대 시장였던, 당시 부산 같은 곳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던 시절 강경은 식산은행, 백화점도 우뚝하던 대도시였다. 뱃길 끊기면서 사람 떠나고 돈 떠나는 소읍이 되었다. 그래도 김장철이면 레트로 상품인 강경젓갈축제 특별열차가 뜰 만큼 젓갈시장이 버텨준다, 아직은.

금강의 흐름과 더불어 강경을 문화도시로 부활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간단 없이 이어지고 있다. 관이 주도한 강경근대화거리 작업은 그 자체로 빛과 그림자의 공존이다. 민 주도의 일례가 강경 중고제인데, 금강의 물안개다. 중고제는 이번 옥녀봉예술촌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시노래로 지역문화를 선도해가는 가수 정진채, 마당극패 ‘우금치’ 음악감독으로 ‘플룻테이너 티나마리’로 활동하는 이선희도 가세하였다. 

강경 안팎으로는 섬유예술가, 영화감독, 사진작가, 금속공예가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각인각색의 작품세계를 펼쳐가고 있다. 마이웨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들을 주시하는 눈길, 손길은 아직까지는 좁은길이다. 옥녀봉 올라서면 찬연한 금강 노을이 나그네의 눈길을 꽉 채운다. 이제는 옥녀봉예술촌의 암벽도 눈에 들어온다, 서서히..... 


- 이진영 편집위원


일제강점기 때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장 관사’로 사용된 곳이 강경문화의 산실 “옥녀봉예술촌”으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