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지역미디어지원사업] ‘충효예 선비의 길 - 황산유람길을 찾아서’6
덕은온지길,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논산의 충효열

예로부터 논산은 유교와 예학 문화의 유서가 깊은 곳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예론(禮論)과 산림 인사들의 거점으로, 정신문화 전통과 선비들의 정서가 반영된 유교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안다.”라는 뜻의 사자성어로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에서 유래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옛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지방의 옛 명칭은 ‘덕은군’과 ‘온고지신’을 합쳐 명명된 황산유람길 제2구간 “덕은온지길”은 약 17.7km, 소요 시간 약 4시간 50분의 코스로 ‘미내다리-칠원윤씨 효자비-충열공 사월정 강선생비-행림서원-성삼문묘-진주강씨 효열정려-창녕조씨 효열정려’구간이다. 이 구간에서는 논산의 충효열을 주제로 과거의 유교문화유산과 현대의 유교문화유산을 만나게 된다.

칠원윤씨 효자비

충열공 사월정 강선생비
마을 곳곳에 새겨진 충효열 ‘칠원윤씨 효자비’, ‘충열공 사월정 강선생비’
“효는 모든 것의 근본이며, 모든 행실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논산시 채운면 화정리에 있는 칠원윤씨 효자비의 첫 문장이다. 논산에는 명소로 알려진 유교문화유산도 많지만, 칠원윤씨 효자비처럼 마을에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유교 자원도 그만큼 많다.
효자 윤영원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왔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 효심이 지극하였고, 성년이 되어서는 이치와 몸가짐을 닦고 시·서·예·악에 힘써 익혀 높은 인물로 칭송받았다. 은진향교와 노성향교의 표창문에는 “어머니가 병상에 누웠을 때 온갖 약을 구해 치료했지만, 차도가 없어 병이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내어 먹이니 3일 만에 다시 깨어났다.”라고 전해진다.
향년 4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나라가 혼란하고 집안이 흥망을 겪는 바람에 그의 효행은 비석에 새겨지거나 표창으로 나타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세간의 이야기로, 마을의 소문으로 후세에 전해져 내려왔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역의 여러 선비가 힘을 모아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충열공 사월정 강선생비에도 선조를 향한 후손의 존경이 담겨 있다. 진주강씨 사람인 강수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 나섰다. 길을 나서기 전 그는 자신의 상투를 붉은 실로 동여맸다. 만약 자신이 죽은 뒤 표지(標識)가 없으면 가족이 유해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수남은 삭녕전투에서 전사했고, 1709년(숙종 35)에 임금이 충열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묘역 입구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신도비와 진주강씨 충열공 선영이라는 표지석이 놓여있다. 강수남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집의 당호는 홍선재인데, 그가 전장에 나갈 때 붉은 실로 상투를 동여맨 일화에서 연유한 것이다.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반기는 곳 ‘행림서원’
논산에는 서원이 많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돈암서원을 비롯해 각각의 서원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행림서원은 1867년(고종 4)에 지어졌다. 탄핵을 받은 이이와 정철을 변호하다 파직된 서익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고, 완성된 뒤에는 산노리에 있는 효암서원에서 분향하던 서익을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고 한다. 행림서원의 특징은 마을 안에 있어 주민들의 삶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다. 논산 가야곡면 육곡리 주택가 지붕 사이로 슬며시 보이는 기와지붕과 돌담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대에서 조선시대로 시공을 뛰어넘는다.
행림서원은 마을 안에 있다 보니 배산임수(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있는 것) 같은 거창한 명당의 느낌은 없다. 보통 서원의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홍살문이 이곳에서는 향교와 거의 붙어 있어 소박한 서원의 규모를 짐작게 한다.
대신 서원 입구 외삼문 바로 앞에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범상치 않은 느낌을 준다. 행림서원의 이름도 바로 이 은행나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성균관이나 서원, 향교처럼 유학을 가르치는 전통 교육기관에서는 은행나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은행나무가 아니라 살구나무였다고는 하지만, 살구나무보다 은행나무가 더 수명이 길고 선비의 기상과 닮아 은행나무를 심었을 거라는 추측도 전해진다.




조선시대 절개와 충의의 상징 ‘성삼문묘’
성삼문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라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들려 이름을 ‘삼문(三問)’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선 뒤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대표적인 집현전 학자다. 계유정난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다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어 거열형을 당했다. 시신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팔도의 각 곳으로 보내졌다.
성삼문의 시신(다리)을 짊어진 지게꾼이 지금의 가야곡면 양촌리에 들어섰을 때였다. 먼 길을 걸어 무거운 시신을 지고 오느라 지쳤던 그가 힘든 마음에 “무겁기도 하고 귀찮기도 한데, 아무 데나 버릴까?”하고 혼자 투덜거렸다.
그때 “아무 데나 묻어라.”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분명 자신과 시신밖에 없는 곳에서 대답이 들리자, 지게꾼은 성삼문의 시신이 대답하는 거라는 생각에 혼비백산하여 지게를 내팽개치고 도망갔다고 한다. 이후 근처의 선비들이 나서서 지금 자리에 묘소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성삼문묘에 오르면 하늘을 향해 곧게 자란 장송이 있다. 성삼문의 묘를 쓴 후 자라난 소나무를 보고 사람들은 성삼문의 충의를 대신해 소나무가 자랐다고 하여 그 언덕을 ‘사송치’라고 불렀다.
또 하마비의 전설도 함께 전해지는데, 성삼문묘 앞을 지날 때는 아무리 직위가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가야 했다고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화를 당하였다고 한다.
역적으로 죽임을 당했지만, 끝내는 만고의 충신으로 남게 된 성삼문. 그의 묘소에 여러 이야기가 함께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그의 넋을 위로하며 오래도록 의로운 충의를 기억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은 아니었을까.

한 마을 두 명의 효열부 ‘진주강씨 효열정려’, ‘창녕조씨 효열정려’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는 닮은 듯 다른 두 효열부의 이야기가 담긴 유적이 있다. 바로 진주강씨 효열정려와 창녕조씨 효열정려다.
먼저 강씨 부인의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어려서부터 마음이 착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던 강씨 부인은 불행히도 10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마음이 착하여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왔고, 이상희에게 출가하게 되었다.
이후 남편이 병들어 고생하자, 산에 올라 단을 쌓고는 목욕재계하며 “내 몸을 대신하소서”라며 하늘에 기원하였다. 그러자 꿈에 선인이 나타나 “꿩고기 탕이 가장 좋다”고 알려주었다. 다음날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날지 않는 꿩이 있어 잡아 남편에게 달여 먹였더니 효험이 있었다.
남편이 또다시 중병에 걸리자, 풀을 베어 기름을 짜고, 피를 섞어 남편에게 먹여서 3일을 더 연명시켰다. 하지만 결국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강씨 부인은 남편을 따라 죽으려 했으나 시부모님과 어린 딸을 생각해 슬픔을 억누르며 남은 가족을 더욱 정성껏 봉양했다고 한다.
조씨 부인도 강씨 부인과 비슷한 결의 삶을 살았다. 조씨 부인은 타고난 성품이 순하고 부드러웠고, 어릴 적부터 효도하고 우애가 깊었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언니에게 의지하여 자랐다가 전주 최광식에게 시집을 갔다. 집안이 매우 청빈하였으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도를 잃지 않았다.
남편이 병을 앓자, 밤낮으로 간호하고, 약초를 찾고, 뒤뜰에 단을 마련해 목욕재계하며 몸을 대신하겠다는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조씨 부인도 강씨 부인처럼 남편을 따라 죽기를 결심하고는 문을 걸어 잠그고 삼베에 누웠다.
하지만 연로한 시숙이 눈물로 타일렀고, 돌봄을 받을 곳이 없는 어린아이들이 있어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났다. 그 후 더욱 효성으로 시숙을 보양하고 자식의 도리를 대신하여 시숙을 돌봐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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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정용 가야곡면 강청1리 이장 
박정용 이장은 가야곡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3살 때 현 강청리로 이사와 현재까지 살고 있다. 지금 황산유람길의 2번째 코스인 '덕은온지길'은 그가 나고 자란 곳이다. 박정용 이장은 "가야곡면에는 '행림서원', '성삼문묘', '진주강씨 효열정려', '창녕조씨 효열정려', '효암서원' 등의 유서 깊은 유교문화유산이 있다"며, "그런 연유로 황산유람길 제2구간의 명칭이 <덕은온지길>이라 명명된 거 같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육곡리 마을 안에 있는 '행림서원'은 서원 입구 외삼문 바로 앞에 거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범상치 않게 서 있으며, '행림서원'이란 이름도 바로 이 은행나무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준다. "또한, '성삼문묘'는 가야곡면 양촌리에 그의 다리 한쪽이 묻힌 묘소인데, 계유정난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다 거열형을 당해 시신이 팔도의 각 곳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본 묘역은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가야곡면 양촌리에는 한 마을에 두 명의 효열부의 이야기가 담긴 유적이 있으며, <덕은온지길>은 아니지만 산노리에는 '효암서원'과 '강응정 정려'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박 이장은 "강경 미내다리에서 시작해 칠원윤씨 효자비, 충열공 사월정 강선생비, 행림서원, 성삼문묘, 진주강씨 효열정려, 창녕조씨 효열정려를 잇는 총 17.7km를 걸어보며,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알게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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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뿌리내린 ‘유교문화’
황산유람길 2구간 ‘덕은온지길’은 인도가 없어 차량이 쉴 새 없이 지나가는 좁은 도로 위로 아스팔트 열기가 올라와 위험했지만, 지역의 유서 깊은 유교문화유산을 찾아 걷는 길이었다.
걸을 때 조금 위험할 수 있지만, 유교의 정신적 뿌리를 내린 곳이자 명실상부한 기호 예학의 산실인 이 지역에는 더 발굴되고 알려져야 할 문화유산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논산만이 지닌 역사적, 정신적 유산들은 내밀하게 지역 주민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독특한 층위를 형성하고 있는 듯했다. 논산 지역의 유교문화를 넘어 충청 유교와 고귀한 이념을 계승하여 한국 유교문화를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것, 그리고 그 전통과 가치를 인류의 유산으로 계승시키고 발전해 나가는 것, 글로컬 유교문화 기관을 추구하는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목표일 것이다.
한국유교문화진흥원에서는 지난 9월 10일,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동참하고 있는 선비회원과 일반 참가자들 233명과 함께 ‘한국유교문화축전’의 행사 중 일부로 ‘제3구간 을문이효길’, ‘제4구간 사계예길’, ‘제5구간 계백충길’의 3가지 코스를 서원 행사와 이야기가 있는 해설 등과 함께 차별성을 가진 걷기 행사로 진행하였다.
이번 행사는 논산을 대표하는 효자인 중화재 강응정의 이야기, 예학의 대가 김장생, 충신 계백장군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황산유람길 3개 구간을 따라가는 여정으로, ‘수기치인’의 삶 등 선비정신을 매개로 전 국민과 소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며 ‘선비정신’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자리였다.
향후 걷기 대회 행사를 정례화하여, 많은 분과 함께 걸으며 ‘선비정신’을 되새기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 전영주 편집장, 이병주 한유진 연구교육부 책임연구원
이 기획기사는 2025년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으로 시행한 것입니다.
[2025 지역미디어지원사업] ‘충효예 선비의 길 - 황산유람길을 찾아서’6
덕은온지길,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논산의 충효열
예로부터 논산은 유교와 예학 문화의 유서가 깊은 곳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예론(禮論)과 산림 인사들의 거점으로, 정신문화 전통과 선비들의 정서가 반영된 유교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안다.”라는 뜻의 사자성어로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에서 유래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옛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지방의 옛 명칭은 ‘덕은군’과 ‘온고지신’을 합쳐 명명된 황산유람길 제2구간 “덕은온지길”은 약 17.7km, 소요 시간 약 4시간 50분의 코스로 ‘미내다리-칠원윤씨 효자비-충열공 사월정 강선생비-행림서원-성삼문묘-진주강씨 효열정려-창녕조씨 효열정려’구간이다. 이 구간에서는 논산의 충효열을 주제로 과거의 유교문화유산과 현대의 유교문화유산을 만나게 된다.
칠원윤씨 효자비
충열공 사월정 강선생비
마을 곳곳에 새겨진 충효열 ‘칠원윤씨 효자비’, ‘충열공 사월정 강선생비’
“효는 모든 것의 근본이며, 모든 행실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논산시 채운면 화정리에 있는 칠원윤씨 효자비의 첫 문장이다. 논산에는 명소로 알려진 유교문화유산도 많지만, 칠원윤씨 효자비처럼 마을에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유교 자원도 그만큼 많다.
효자 윤영원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왔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 효심이 지극하였고, 성년이 되어서는 이치와 몸가짐을 닦고 시·서·예·악에 힘써 익혀 높은 인물로 칭송받았다. 은진향교와 노성향교의 표창문에는 “어머니가 병상에 누웠을 때 온갖 약을 구해 치료했지만, 차도가 없어 병이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내어 먹이니 3일 만에 다시 깨어났다.”라고 전해진다.
향년 4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나라가 혼란하고 집안이 흥망을 겪는 바람에 그의 효행은 비석에 새겨지거나 표창으로 나타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세간의 이야기로, 마을의 소문으로 후세에 전해져 내려왔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역의 여러 선비가 힘을 모아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충열공 사월정 강선생비에도 선조를 향한 후손의 존경이 담겨 있다. 진주강씨 사람인 강수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 나섰다. 길을 나서기 전 그는 자신의 상투를 붉은 실로 동여맸다. 만약 자신이 죽은 뒤 표지(標識)가 없으면 가족이 유해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수남은 삭녕전투에서 전사했고, 1709년(숙종 35)에 임금이 충열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묘역 입구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신도비와 진주강씨 충열공 선영이라는 표지석이 놓여있다. 강수남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집의 당호는 홍선재인데, 그가 전장에 나갈 때 붉은 실로 상투를 동여맨 일화에서 연유한 것이다.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반기는 곳 ‘행림서원’
논산에는 서원이 많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돈암서원을 비롯해 각각의 서원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행림서원은 1867년(고종 4)에 지어졌다. 탄핵을 받은 이이와 정철을 변호하다 파직된 서익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고, 완성된 뒤에는 산노리에 있는 효암서원에서 분향하던 서익을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고 한다. 행림서원의 특징은 마을 안에 있어 주민들의 삶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다. 논산 가야곡면 육곡리 주택가 지붕 사이로 슬며시 보이는 기와지붕과 돌담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대에서 조선시대로 시공을 뛰어넘는다.
행림서원은 마을 안에 있다 보니 배산임수(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있는 것) 같은 거창한 명당의 느낌은 없다. 보통 서원의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홍살문이 이곳에서는 향교와 거의 붙어 있어 소박한 서원의 규모를 짐작게 한다.
대신 서원 입구 외삼문 바로 앞에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범상치 않은 느낌을 준다. 행림서원의 이름도 바로 이 은행나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성균관이나 서원, 향교처럼 유학을 가르치는 전통 교육기관에서는 은행나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은행나무가 아니라 살구나무였다고는 하지만, 살구나무보다 은행나무가 더 수명이 길고 선비의 기상과 닮아 은행나무를 심었을 거라는 추측도 전해진다.
조선시대 절개와 충의의 상징 ‘성삼문묘’
성삼문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라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들려 이름을 ‘삼문(三問)’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선 뒤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대표적인 집현전 학자다. 계유정난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다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어 거열형을 당했다. 시신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팔도의 각 곳으로 보내졌다.
성삼문의 시신(다리)을 짊어진 지게꾼이 지금의 가야곡면 양촌리에 들어섰을 때였다. 먼 길을 걸어 무거운 시신을 지고 오느라 지쳤던 그가 힘든 마음에 “무겁기도 하고 귀찮기도 한데, 아무 데나 버릴까?”하고 혼자 투덜거렸다.
그때 “아무 데나 묻어라.”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분명 자신과 시신밖에 없는 곳에서 대답이 들리자, 지게꾼은 성삼문의 시신이 대답하는 거라는 생각에 혼비백산하여 지게를 내팽개치고 도망갔다고 한다. 이후 근처의 선비들이 나서서 지금 자리에 묘소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성삼문묘에 오르면 하늘을 향해 곧게 자란 장송이 있다. 성삼문의 묘를 쓴 후 자라난 소나무를 보고 사람들은 성삼문의 충의를 대신해 소나무가 자랐다고 하여 그 언덕을 ‘사송치’라고 불렀다.
또 하마비의 전설도 함께 전해지는데, 성삼문묘 앞을 지날 때는 아무리 직위가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가야 했다고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화를 당하였다고 한다.
역적으로 죽임을 당했지만, 끝내는 만고의 충신으로 남게 된 성삼문. 그의 묘소에 여러 이야기가 함께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그의 넋을 위로하며 오래도록 의로운 충의를 기억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은 아니었을까.
한 마을 두 명의 효열부 ‘진주강씨 효열정려’, ‘창녕조씨 효열정려’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는 닮은 듯 다른 두 효열부의 이야기가 담긴 유적이 있다. 바로 진주강씨 효열정려와 창녕조씨 효열정려다.
먼저 강씨 부인의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어려서부터 마음이 착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던 강씨 부인은 불행히도 10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마음이 착하여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왔고, 이상희에게 출가하게 되었다.
이후 남편이 병들어 고생하자, 산에 올라 단을 쌓고는 목욕재계하며 “내 몸을 대신하소서”라며 하늘에 기원하였다. 그러자 꿈에 선인이 나타나 “꿩고기 탕이 가장 좋다”고 알려주었다. 다음날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날지 않는 꿩이 있어 잡아 남편에게 달여 먹였더니 효험이 있었다.
남편이 또다시 중병에 걸리자, 풀을 베어 기름을 짜고, 피를 섞어 남편에게 먹여서 3일을 더 연명시켰다. 하지만 결국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강씨 부인은 남편을 따라 죽으려 했으나 시부모님과 어린 딸을 생각해 슬픔을 억누르며 남은 가족을 더욱 정성껏 봉양했다고 한다.
조씨 부인도 강씨 부인과 비슷한 결의 삶을 살았다. 조씨 부인은 타고난 성품이 순하고 부드러웠고, 어릴 적부터 효도하고 우애가 깊었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언니에게 의지하여 자랐다가 전주 최광식에게 시집을 갔다. 집안이 매우 청빈하였으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도를 잃지 않았다.
남편이 병을 앓자, 밤낮으로 간호하고, 약초를 찾고, 뒤뜰에 단을 마련해 목욕재계하며 몸을 대신하겠다는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조씨 부인도 강씨 부인처럼 남편을 따라 죽기를 결심하고는 문을 걸어 잠그고 삼베에 누웠다.
하지만 연로한 시숙이 눈물로 타일렀고, 돌봄을 받을 곳이 없는 어린아이들이 있어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났다. 그 후 더욱 효성으로 시숙을 보양하고 자식의 도리를 대신하여 시숙을 돌봐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인터뷰] 박정용 가야곡면 강청1리 이장
박정용 이장은 가야곡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3살 때 현 강청리로 이사와 현재까지 살고 있다. 지금 황산유람길의 2번째 코스인 '덕은온지길'은 그가 나고 자란 곳이다.
박정용 이장은 "가야곡면에는 '행림서원', '성삼문묘', '진주강씨 효열정려', '창녕조씨 효열정려', '효암서원' 등의 유서 깊은 유교문화유산이 있다"며, "그런 연유로 황산유람길 제2구간의 명칭이 <덕은온지길>이라 명명된 거 같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육곡리 마을 안에 있는 '행림서원'은 서원 입구 외삼문 바로 앞에 거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범상치 않게 서 있으며, '행림서원'이란 이름도 바로 이 은행나무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준다.
"또한, '성삼문묘'는 가야곡면 양촌리에 그의 다리 한쪽이 묻힌 묘소인데, 계유정난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다 거열형을 당해 시신이 팔도의 각 곳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본 묘역은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가야곡면 양촌리에는 한 마을에 두 명의 효열부의 이야기가 담긴 유적이 있으며, <덕은온지길>은 아니지만 산노리에는 '효암서원'과 '강응정 정려'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박 이장은 "강경 미내다리에서 시작해 칠원윤씨 효자비, 충열공 사월정 강선생비, 행림서원, 성삼문묘, 진주강씨 효열정려, 창녕조씨 효열정려를 잇는 총 17.7km를 걸어보며,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알게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지역에 뿌리내린 ‘유교문화’
황산유람길 2구간 ‘덕은온지길’은 인도가 없어 차량이 쉴 새 없이 지나가는 좁은 도로 위로 아스팔트 열기가 올라와 위험했지만, 지역의 유서 깊은 유교문화유산을 찾아 걷는 길이었다.
걸을 때 조금 위험할 수 있지만, 유교의 정신적 뿌리를 내린 곳이자 명실상부한 기호 예학의 산실인 이 지역에는 더 발굴되고 알려져야 할 문화유산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논산만이 지닌 역사적, 정신적 유산들은 내밀하게 지역 주민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독특한 층위를 형성하고 있는 듯했다. 논산 지역의 유교문화를 넘어 충청 유교와 고귀한 이념을 계승하여 한국 유교문화를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것, 그리고 그 전통과 가치를 인류의 유산으로 계승시키고 발전해 나가는 것, 글로컬 유교문화 기관을 추구하는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목표일 것이다.
한국유교문화진흥원에서는 지난 9월 10일,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동참하고 있는 선비회원과 일반 참가자들 233명과 함께 ‘한국유교문화축전’의 행사 중 일부로 ‘제3구간 을문이효길’, ‘제4구간 사계예길’, ‘제5구간 계백충길’의 3가지 코스를 서원 행사와 이야기가 있는 해설 등과 함께 차별성을 가진 걷기 행사로 진행하였다.
이번 행사는 논산을 대표하는 효자인 중화재 강응정의 이야기, 예학의 대가 김장생, 충신 계백장군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황산유람길 3개 구간을 따라가는 여정으로, ‘수기치인’의 삶 등 선비정신을 매개로 전 국민과 소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며 ‘선비정신’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자리였다.
향후 걷기 대회 행사를 정례화하여, 많은 분과 함께 걸으며 ‘선비정신’을 되새기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 전영주 편집장, 이병주 한유진 연구교육부 책임연구원
이 기획기사는 2025년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으로 시행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