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동학의 대의] “아, 동학!” 얼마나 착한 백성이요 민중입니까?

놀뫼신문
2020-07-23

[특별기고] 동학의 대의

“아, 동학!” 얼마나 착한 백성이요 민중입니까?

                             

𝍠.우리나라는 본래 하느님이 세웠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환인(하느님)이 아들 환웅에게 인간구세의 뜻을 심어 세상에 내려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건국절이 아니라 개천절입니다(개국신화).’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가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대리하게 했다’는 성경 말씀과 구조가 똑같습니다. 성경 창세기 이전에 벌써 하느님의 뜻이 전달된 민족이 있었던 것입니다. 둘 다 비유이지만, 고대인들의 사유전달방식(秘意)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겨레의 이름이 ‘밝달(배달)민족 ‘밝’은 큰 밝음(하늘)을 추구하는 민족 이념성향을 뜻하고, ‘달’은 땅이라는 의미이다. 음운변화로 배달이 되었다. 배달민족은 환웅시대 민족애칭이다. 황하문명보다 1000년 이상이 빠른 고조선문명이 만주 요하 홍산지역에서 발굴되었다. 홍익인간 사상은 환웅이 단군에게 전한 사상이다. 우리민족은 새를 토템으로하는 한(환)족, 곰 토템의 맥족, 호랑이 토템의 예족으로 구성되었는데, 새토템과 곰토템족이 만나 단군조선을 세우고, 예족이 후국(侯國)으로 출발하였다.’입니다. 

주특기는 ‘하늘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늘자손(천손사상)’이라는 말에 그 함의가 모두 녹아 있습니다. 이는 지금도 시골 할머니들이 장독대에 하얀 사발에 정한수(정화수) 떠놓고 천지신명(하느님)께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풍습에 면면히 잇대어 있습니다. 하얀 사발은 태양이요, 새벽에 떠온 정화수는 생명이자 북두칠성을 상징합니다. 할머니들이 치성(칠성신앙)을 드릴 때 산 아래 바위 시냇가에서 의식을 행하는 것이나 정한 수를 올리는 이유가, 북두칠성을 생명관장의 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빛과 물이 없으면 시들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 겨레는 출발부터 하늘공경, 인간존엄, 생명경외의 뜻을 안고 있습니다. 이것이 후대 음양사상 관념론으로 변질됩니다.

고조선 천황이 올리는 예법을 훔쳐다, 중국에서는 하늘 제사는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신성불가침의 특권으로 바꿉니다. 그래서 명나라 섬기는데 조선의 얼빠진 선비(사림)들이, “조선 왕은 제후이므로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은 명나라 황제를 능멸하는 것이 되니, 천제 단이 있는 왕실 ‘소격서’를 철폐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상소를 올리고, 실력행사를 하는 바람에 폐지되고 맙니다. 조선 중종 때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민초들은 환웅시대부터 지금까지 6000년을 일상으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조선 500년 동안 유교의 발흥으로 하느님을 까마득 잊고 있다가, 하느님을 되찾은 것이 동학입니다. 이것이 동학도가 폭발적으로 늘 수밖에 없던 이유입니다. 동학이 잠자고 있던 겨레의 문화유전자 ‘밈’ 밈meme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1976)』에서 문화의 진화를 설명하면서 처음 씀. “유전자(DNA)가 자기복제를 통해 생물학적 정보를 제공하듯이, 문화유전도 같은 속성으로 이어진다”는 뜻을 자극한 것입니다. 천주교가 겨레의 감성을 살짝 건드려 우후죽순처럼 성장했으나 10만을 넘지 못한 반면, 동학교도는 순식간에 100만을 넘었습니다.

‘사람 섬기는 것이 하늘 섬기는 것과 같다(事人如天)’는 동학의 종지는 세계종교사상의 꽃이요, 홍익인간 정신의 환생입니다. 예서 더 나갈 수 있는, 쉽지만 만만치 않은 종지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어느 종교도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종지를 에두르지 않고 직설로 천기를 누설한 교단은 없습니다. 자성의 길, 세계평화의 길, 생명의 길, 상생의 길, 대동세상, 지구촌의 길 등등은 모두 이 간결한 메시지, ‘사람이 하늘임’을 자각하는 순간에 폭죽 터지듯 만발할 것입니다. 


𝍡. “귀천이 같고 등위의 차별이 없으니, 백정과 술장사들이 모이고,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포교소를 세워 과부나 홀아비들이 모여들며, 재물과 돈을 좋아하여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우니(有無相資) 가난한 자가 기뻐한다.” 


이 글은 1863년 소위 동학을 배척하기 위한 서원통문(書院通文)기록인데, 당시 시대 상황을 잘 대변하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모두 자기들이 만든 시대의 그늘로 껴안고 보듬어야 할 나약한 백성들을, 사림(선비)들이 통문을 보내 오히려 흉보며 동학이 발흥할까 경계하고 있는 글입니다. 서원은 사대부와 사림들의 상징과 같습니다. 이곳을 통하여 조선의 지배세력들이 통교하고, 세력화하고, 유교이념을 확장했습니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은 극으로 치닫는 이 비대해진 서원권력을 해체하고자 한 것입니다. 윗글에서처럼 조선 성리학은 적서, 반상, 천민을 위시하여, 사士농農공工상商 계급 차별을 정당화하고, 지배이념으로 성리학을 학문도구화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5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왜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하냐면, 원래 유교 이념의 정수는 인의(仁義)입니다. 요즘 말로 사랑과 정의입니다. 요즘 미국에서 흑인청년의 죽음으로 등장한 시위대 구호중 하나가 “정의 없이 평화가 없다”입니다. 이 구호와 똑같습니다. 평화(平和)는 사랑의 다른 말입니다. 그런데 조선 유학은 이 사랑과 정의가 표제어에 그쳤습니다. 즉 이론과 실천이 따로 놀았다는 말입니다. 이 사랑과 정의가 자기들에게 작동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것이 당쟁입니다. 자기들의 이념인 인의로 어루만져야하는 대상인 조선의 민중들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저 자기들 수발하는 아랫것들이자, 통치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통계가 말해 줍니다. 조선시대 노비 수는 40%입니다. 1000만 중 400만이 노비입니다. 솔거노비(주인집에 머물며 잡일과 수발을 듦)와 외거노비(따로 살면서 노동력을 제공함) 합산입니다. 이는 노비를 계속 만들어내는 ‘노비세습제’ 결과입니다. 요즘말로 연좌제입니다.노(奴)는 남자 비속이고, 비(婢)는 여자비속입니다. 원래 조선 3대 태종 때는 종부법(從父法)이었습니다. 아비가 양민이면 어미가 노비여도 양민이 되도록 했습니다. 

헌데 세종에 이르러 유학자들이 “노비를 면하기 위하여 여종들이 양인에게 시집가려고 모두 나설 것이니, 그렇게 되면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를 들어 계속 상소를 올립니다. 이를 세종이 윤허함으로써, 일즉일천(一則一賤)제로 바뀝니다. 곧 부모 어느 한쪽이라도 노비면, 자식도 노비로 만드는 것입니다. 선비들 야심대로 자기들이 부릴 노비를 양산하는 길을 튼 것입니다. 

노비는 상속됐을 뿐 아니라, 거래도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폭락한 값인데도 20~30대 장정노비는 큰 소 한 마리에 면포나 곡물을 더 주어야 했고, 여자노비는 면포 25필이 호가했습니다. 선비들에게는 노비도 일종의 자산이었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명나라에서 노비제도를 폐지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체제유지를 위한 전통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라는 명분을 내세워 거절하였다니, 유림정치는 그야말로 양심이 마비된 허울을 쓴 사림들의 리그였던 것입니다. 

또 이들 노비를 포함한 칠반천인(七般賤人)이라 하여 승려, 광대, 기생, 무당, 갖바치, 백정이 있었습니다. 이 중 백정은 가축을 도살을 직업으로 하는 집단을 말합니다. 이들은 부모가 죽어도 상복을 입을 수 없었으며, 평소 좋은 옷을 입어서도 안 되었고, 이름도 인仁, 의義, 예禮, 지智라는 글자를 넣어 못 짓게 하는 등 형언할 수 없는 학대를 가하였습니다. 충효를 숭앙케 하면서, 상례를 어기도록 강제하는 이 배반의 역사에서 우리 백성들은 어떻게 견디어냈는가? 그 이름 서민의 아름다운 삶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 노비제도는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 폐지합니다. 송나라 노비는 세습이 아닌 당대로 끝나는 제도였습니다. 같은 시기 고려는 4~6%, 통일신라가 고려와 비슷합니다. 이때의 통치이념이 화엄사상입니다. 불교교리는 차별(差別)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일본도 당대로 끝나는 노비제도였는데, 16세기에 폐지됩니다. 

조선은 1801년 순조 때야 관청노비를 폐하고, 1886년 노비세습제를 없애 부모 당대로 합니다. 노비제도가 온전히 사라진 것이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갑오경장 때입니다. 

무언가 기시감(旣視感)은 느끼지 않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참는 데 임계점을 넘은 백성들이 저항하기 시작하자, 낌새를 채고 푼 것입니다. 같은 종족을 500년을 노비로 부렸다는 것은, 우리가 배웠던 것처럼 선비사상을 아무리 좋게 평가하려 해도 도무지 입이 떼 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양민(상민)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노비 40% 양반 10%(후대로 가면서 더 늘어남) 여기에 양반들의 서얼(양민에게 얻은 자식=서자, 노비에게서 얻은 자식=얼자孼子)들을 빼고, 위에 언급한 일곱 천민 집단을 제하면 양민이 50%가 못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국방, 각종 세금, 각종 노역(성을 쌓거나 보를 막거나 등), 군포 등등과 탐관오리의 폭정, 아전의 폭리, 각 고을에 촘촘히 박혀 있는 양반 수발 등 도저히 한 인간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마저 조선 말기 삶을 포기하고 떠도는 유랑인이 100만이 넘었다 하고, 학정을 피하고자 스스로 노비가 되는 양인 또한 많았습니다. 


𝍢.이러한 폭정에 시달리다 드디어 일어난 봉기가 바로 동학농민 항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항쟁의 명분이 아름답습니다. ‘왜놈과 양놈을 배척하고 정의를 드높여, 나라를 지키고 민심을 편안하게 한다(斥倭洋倡義, 輔國安民)’는 것입니다. 온갖 혜택을 다 누리고도, 아랫것들에게 그 의무는 모두 떠넘기고, 인의충효(仁義忠孝)만 뇌까릴 뿐, 국난을 당하여 자기 살길을 찾아 뺑소니만 치던 양반 사대부, 선비들이 들끓는 나라를 다시 지키자고, 외세를 물리치자는 구호! 이 얼마나 착한 백성이요 민중입니까? 

오, 사람을 하늘로 섬기라는 가르침을 가슴에 품은, 이 착한 백성들을 우리의 왕 고종은 청과 일본을 끌어들여 박멸했습니다. 일본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미국제 다연발 기관총으로 무차별 사살하고, 패퇴하는 동학의 무리를 전남 해남쪽으로 몰아붙여 섬멸합니다. 공주-논산들-호남 펄-땅끝 해남까지 60만 동학군의 영혼은 오늘도 허공을 맴돕니다. 동학이 죽은 후 조선의 생명도 끝을 맺습니다. 나라를 판 대가로 받은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다수가 노론이었습니다. 이것이 조선 선비무리 사림정치의 민낯이었습니다. 그 후손들은 오늘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아 동학이여, 고조선의 맥이여 다시 뛰라!


김용수 조각가